'인왕제색도'가 연상된 비 갠 후 남간정사, 우암 송시열의 숨결이 흐르고
[김병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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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간정사 |
| ⓒ 김병모 |
비 갠 후 안개 자욱한 남간정사가 물안개 걷어내고 본색을 드러낸다. 마치 겸재 정선이 비 온 뒤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인왕제색도>가 연상된다. 그야말로 맑고 깨끗한 남간제색(南澗霽色)의 모습이다. 남간정사 편액도 예사롭지 않다. 자연 속에서 학문과 정신을 수양하고자 하는 주자의 시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빌렸다고 한다.
남간정사 앞엔 세월을 이겨낸 연못이 정사(精舍)에서 흐르는 물을 담아내고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조선 선비들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나타낸다. 연못 가운데엔 세월을 가늠하기 힘든 늙은 고목나무 한 그루가 앙상한 가지만 붙인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
흥미롭게도 계곡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남간정사 중앙으로 흘러 연못으로 이어진다. 돌담 아래로 물이 흐르는 장하유수(牆下流水) 형태이다. 계곡을 품은 남간정사. 마치 풀잎의 삶이 흔들리고 물의 삶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지향하는 우암 송시열(1607~1689). 그의 숨결이 남간정사에 흐르고 있었다.
1633년 인조 11년, 27세 때 우암 송시열은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급제한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진다. 2년 후 봉림대군(후일 효종)의 사부(師傅)로 임명되기도 한다. 그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로 이어진다.
1647년(인조 25년), 우암 송시열이 호남을 유람하다 화순 능주 은봉정사에서 호남의 석학 은봉 안방준(1573~1654)을 만난다. 그는 시경(詩經) <풍우(風雨)> 구절 "풍우여회, 계명불이(風雨如晦, 鷄鳴不已)"를 통해 충효와 절의(節義)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다. 비바람이 칠흑 같이 몰아쳐도, 닭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암은 호남에서 당대 석학 은봉을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았으리. 그 무렵, 담양 소쇄원에 들러 돌담 밑으로 흐르는 물을 보고 감탄하였으리라. 그리하여, 자연을 품은 남간정사가 탄생하지 않았을까.
우암 송시열은 4명(인조, 효종, 현종, 숙종)의 왕을 섬기면서 때론 왕권보다 신권(臣權)을 앞세웠다. 그는 낙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도 노론의 영수답게 한양 조정에서 일어나는 정사(政事)에 귀를 대고 있었다. 무엇보다, 우암은 효종과 현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북벌론과 예론과 같은 핵심 현안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양 조정에서 번번이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한 신하들은 "전하! 잠시, 말미를 주시옵소서"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왕으로부터 말미를 얻은 대신들은 득달같이 우암 송시열을 찾아와 자문과 지침을 받은 후, 의사결정 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위세를 보는 듯하다.
남간정사 뒤편엔 우암 송시열이 후학을 가르치며 심었다는 배롱나무가 세월을 견디지 못해 부러진 가지를 끌어 앉은 채,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 우암이 손수 심었다는 '송부자수식수(宋夫子手植樹)' 푯말만이 주인을 잃고 무심하게 서 있다.
발걸음을 돌려 송자대전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藏板閣)으로 눈길을 돌린다. 장판각에는 송자대전판(유형문화재 제1호)이 보관되어 있다. 목판본이 팔만대장경처럼 가지런히 꽂혀 있다. 17세기 조선 정치와 사상계의 중심에 있었던 우암 송시열의 시(詩)와 글을 모은 <송자대전>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본이다.
이 목판본은 정조 때 평양 감영에서 제작되어 보관해오다, 1907년 순종원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대 중반에 다시 제작된 것이다. 송자대전판은 현존하는 조선 시대 개인 문집 판본 가운데, 가장 방대한 수량이라고 한다.
필자는 송자 선생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하고자 유물관으로 향했다. 유물관으로 들어서니 예상과 달리 관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온풍기 소리만 요란하다. '해설사는 식사 중'이란 안내판이 덩그러니 데스크에 놓여있다. 해설사가 오길 기다리면서, 우암 선생에 대한 파편적 지식으로 주변을 훑어본다.
그때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한 젊은이가 우암 송시열이 생원시에 직접 쓴 답안지 앞에서 멈칫한다. 그 논술 시험문제는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이다. 한번 음이었다 한번 양이었다 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는 의미이다. 당시 송시열 답안지를 두고 채점관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명길(1586~1647)이 그의 답안지를 보고 장원으로 강력하게 추천한다. 그 대학원생은 송시열의 답안지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무렵, 점심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해설사가 거침없이 우암 송시열 이야기를 풀어낸다. 무엇보다, 단비의 털로 만든 초피(貂皮) 옷을 상(효종)으로부터 친히 하사받았다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송시열의 위상을 다시 한번 보여 주는 일화이다. 북벌을 정책 목표로 삼은 효종이 오죽 답답했으면, 옷을 선물하면서까지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을 설득하려 했을까. 남간정사 뒤편, 그 배롱나무는 그 정치적 일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련만 말이 없다.
1785년 정조 9년에는 왕께서 친히 "대로사(大老祠)"라는 은액(恩額)을 내리고 승지를 보내 제물과 제문을 챙기는 것을 보면, 남간정사 주인 우암 송시열이 해동(海東)의 난사람인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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