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북 오산학교, 남 고창고보 민족교육의 산실 고창고등학교(상) [남도 학교기행]

이건상 기자 2025. 12. 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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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선운사 꽃무릇

"그까짓 사랑 때문에 (중략)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짐해 놓고,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더란다. 김용택 시인의 <선운사 동백꽃>이다. 사연이야 넘치겠지만, 대웅전 뒤안에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 가슴에 담으려, 이른 봄 상춘객 발길이 이어지곤 한다.

여름 끝자락에는 꽃무릇이 또한 절경이다. 연세를 초월하여 다정스레 손을 맞잡으신 노년들도 계시던데, 붉은 꽃무릇은 시각의 충만을 넘어 다시 마음을 들끓게 하는, 회춘 효과가 있음이 분명하다.
선운사 부도밭과 백파율사비

나도 거의 매년, 때로는 두어 차례 도솔산 자락 선운사를 찾는다. 도솔암까지 이어지는 숲길 산책도 좋지만 빠트리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다. 입구에서 시작되는 꽃무릇의 향연이 끝날 즈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보이는 부도밭이다. 숲길 따라 그냥 걷다 보면 지나치기 십상인데 최근 안내판이 설치되었다.

좁혀 얘기하자면 그 중 '백파율사비'이다. '화엄종주 백파 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 白坡 大律師 大機大用之碑)'가 정식 명칭이다. 보통은 '화엄종주 백파 대율사지비' 이러고 말 것을, '대기대용'이라는 수식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 해서 '아동근 무율사(我東近 無律師)'로 시작되는 248자의 비문을 살펴보았다.

"우리나라는 근래 하나의 종파라도 율법을 잘 아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그에 해당하므로 율사라고 할 것이다. 대기대용은 백파가 80년을 살면서 힘쓴 결과이다. (중략) 다른 이들이 제 뜻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백파가 '살·활·기·용'(殺活機用)에 집착하고 있다고 하는데, 하루살이가 나무를 흔드는 격이다. (중략) 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곳도 없었지만 기개는 수미산을 눌렀다. 어찌하면 백파를 다시 일으켜 마주하고 크게 한번 웃어 볼 수 있을까.(하략)

'대기대용(大機大用)'이란 깨달음의 원숙한 경지에 이르러 아무런 거리낌없이 활동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백파야말로 그러한 경지에 이른 인물이라는 칭송이다. 비문의 필체를 보면 단번에 눈이 확 뜨이고, 깊은 호흡을 하면서 몇 바퀴 돌아보게 되고, 그러다 보면 묵직한 힘이 전달되어서 매번 매료되곤 한다. 이에 비해 비석 조형 솜씨는 너무 단순하지 않나 싶지만, 내가 만난 비문 중에서, 아니 조선팔도의 비문 중에서 단연 으뜸이지 않을까 싶다. 비문은 상징성이 깊으면서도 강물의 흐름처럼 유려하다. 추사 김정희가 찬하고 직접 쓴 것이다.
고창 오산학교의 주역들. 앞줄 마스토미 부부와 어머니(중), 뒷줄 김영구, 양태승, 윤치병 추정(출처 국민일보 전정희 기자)

#사과꽃 향기, 교육으로 피어나다

남도에서 고창에 들러 변산반도로 달리다 보면 같은 이름의 이정표가 연거푸 나타나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선운산도립공원과 곰소만 사이 고창군 부안과 변산반도를 아우르고 있는 부안이 그것이다. 앞선 것의 행정구역 단위는 면(面)이며, 뒤의 것은 군(郡)이다. 한자 표기로는 각각 富安과 扶安이다.

조선 시대 부안면(富安面)은 고부군에 속해 있었다. 동학 농민 혁명 당시 탐관오리의 상징 조병갑이 군수로 있었던 그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몇 개의 마을과 합하여 고창군에 편입되었다.

고창교육을 얘기하자면 개신교 장로이기도 했던 일본인 마스토미 야스자에몬(富 安左衛門, 1880~1934)에 대한 이해가 먼저이다. 이 인물의 성명에 '부안(富安)'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것은 우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1909년에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땅을 개간하면서 해당 지명이 자신의 이름자와 동일하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스토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04년 러·일전쟁 때이다. 군 복무를 마쳤지만 잠시 와세다대학 상과를 다녔던 터라 제12사단 경리 담당 장교로 다시 징병되어 주로 호남지역에서 물류 업무를 맡으면서 약 2년간 한국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전쟁이 끝나고 징집이 해제되어 1905년 12월 귀국하였다가 1906년 6월 다시 군산으로 들어와 토지 시찰, 매수를 통해 사업을 시작하였다. 저렴한 지가와 고율의 수익은 좋은 투자 환경이었다.

1907년 마스토미의 삶에서 중대한 전환이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데루코(枡富 照子, 1888~1971)를 만나 결혼을 한 것이다. 부인 데루코는 미국 선교사로부터 신학과 영어를 배운 신여성이었으며 일본 전통 문학인 와카(和歌)의 작가이기도 하다. 와카 시집을 6권 출간하였는데, 일본에서는 시집이라기보다 가집(歌集), 가인(歌人)이라고 한다.

그녀는 일본 왕족에게 와카 수업을 하기도 했던 사사키 노부츠나(佐佐木 信綱, 1872~1963)로부터 문학 수업을 받았던 수제자였다. 또한 3대, 5대 조선 총독을 지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 1858~1936)의 부인 하루코(1873~1971)와는 문학 동문이기도 했다고 한다. 다도, 서예, 회화 등에서도 그녀의 다재다능함이 출중했다. 마스토미는 식민지 투자가 목적이었지만 데루코와의 결혼을 계기로 기독 신앙과 한국인에 대한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회상이나 회고는 늘 그럴듯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치장되는 법이니, 과연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마스토미 부부는 1909년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상오산 일대 비교적 평지였던 11정보(약 36,000평)를 매입하였다. 약 2년간 땅을 정리하여 사과를 심고 과수원을 조성하였다. 본격적인 과수원 경영은 1911년 말부터 시작되었다. 생산된 사과는 일본으로 보내 판매하기도 하였지만 낙과된 사과는 잼을 만들어 수익을 내기도 하였다.

당시로서는 사과잼은 흔한 것이 아니었는데 사과와 함께 지역 특산물이 되었다. 이후 오산리 사과 맛은 널리 알려져 꽤 유명하게 되었다. 바로 이웃 마을인 선운리 진마마을 태생인 미당 서정주(1915~2000)의 시 <가시내> 등에 등장하는 '능금'은 이곳 사과이다. 그의 시집 『질마재 신화』의 질마재는 오산리에서 창내저수지를 지나 선운리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갯길이다.

1912년 10월 농장 내 야트막한 언덕배기(오산리 196번지)에 교회를 건립하면서 동시에 흥덕학당이라는 공부방을 운영하였다. 과수원 경영을 통한 수익, 농장 일꾼들을 대상으로 한 목회 활동, 그 자녀들을 위한 교육활동 등 세 가지를 병행한 것이다. 1918년 4월 교회당 공간을 교실로 활용하여 중등 과정인 오산학당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학생 수는 8명 정도였다. 사과 농장에서 나온 수익금의 대부분은 교회와 학교 운영비로 쓰였다. 학교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교사 채용, 무상교육의 기회가 여기에서 나왔다.
옛 오산학교 터에 자리한 현재의 고창 부안초등학교 전경. 사진 좌측에 제1회 졸업기념으로 식재한 아카시나무가 보인다.

# 두 개의 오산학교

1919년 4월 마스토미는 교회와 함께 운영되고 있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연계 교육을 위해 오산학당을 폐지하고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호남 최초의 사립 중등교육 기관이었다. 설립 시기가 전국적으로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직후라는 점도 특별하다.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 현재 고창 부안초등학교 자리였는데, 사과 농장 입구에서 약 150m 거리 도로 남쪽에 있다. 17명 1학급 체제로 학급을 편성하면서 본격적인 학교 체제를 갖춘 것이었다.

비록 마스토미에 의해 교회와 학교가 건립되기는 하였지만 실제 운영은 주로 한국인 교사 3명에 의해 이루어졌다. 윤치병(1889~1979), 양태승(1889~1954), 김영구(1887~1928)가 그들이다.

기호학당(현 중앙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윤치병과 양태승 그리고 신명학교(현 신명여중·고) 교사로 있던 김영구, 마스토미는 그들에게 학비 등 경제적 지원을 하여 1914년 9월부터 일본 고베중앙신학교에 유학하도록 하였다. 농장 경영은 대리인에게 맡기고 자신도 1912년 9월부터 3년 과정으로 신학 공부를 하고 있던 곳이었다. 이들 셋은 신학과 교육학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1919년 오산학교에 설립에 합류하였다.

교회는 설립 당시 전도사였던 황방연에 이어 윤치병이 담당하였으며, 양태승은 교회 집사로 주로 학교 업무를 맡았다. 1910년 만주 명동학교에서 김철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고 그곳에서 이동녕으로부터 민족의식 교육을 받기도 했던 김영구는 기숙사 사감과 주일학교를 맡았다.

이 세 명의 젊은 교사들의 업적과 역할을 여기에서 모두 기술하지는 못하지만 이후 한국 교회사 혹은 교육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다. 오산고보를 이끌었던 또 다른 교사 유상준이라는 이름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이들의 헌신과 노력에 힘입어 개교 1년 뒤 1920년에는 학생 수가 30명에 달할 만큼 성장했다.

오산리를 중심으로 한 교육은 보통교육과 중등교육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1912년 교회 설립에 맞춰 건물 내에 공부방 형태로 운영되던 흥덕학당은 1919년 2월에 오산보통학교로 전환하면서 학교 체제를 갖추었다. 중등은 1918년부터 잠시 오산(고등)학당이 운영되었으나 이듬해 4월 학교 형태를 갖춰 오산학교로 개편되었다.

오산학교는 다시 1920년 3월 오산고등보통학교로 재편되었다. 현재 고창고등학교는 1919년 4월에 설립한 오산학교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과수원 내 교회를 중심으로는 보통교육이, 교회에서 남쪽 도로를 지나 약 300m 떨어진 현재 부안초등학교 자리에서는 중등교육이 실시된 것이다. 고창읍에 설립된 고창고보로 옮겨가면서는 그 자리에 보통학교가 운영되어 현재의 부안초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1907년 남강 이승훈 등이 평북 정주군 갈산면에 설립한 4년제 중등교육 기관 역시 오산학교였다. 학교가 설립된 지역이 제석산, 황성산, 자성산, 남산봉, 소형산 등 다섯 개의 산이 솟아 있어 오산(五山)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교명을 딴 것이다. 마스토미가 1919년 설립한 고창 부안면의 오산학교는 마을이 자라 형국이어서 오산(鰲山)이다. 자랏등, 오미등, 자라바우와 같이 주변 지형에 지금도 자라와 관련된 이름이 남아 있다. 학교를 건립한 시대와 주체, 교육과정이 달랐지만 두 학교는 민족교육을 지향했던 대표적 사립 중등교육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오산학교의 재정 기반 사과 과수원이 운영되었던 홍해농장. 현재는 파와 고구마 등이 재배되고 있다.

#홍해농장

주제에서 어긋나지만, 마스토미의 양자 노릇을 했던 홍종철(洪鐘轍, 1893~1973)의 행적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20대 초반 이른 나이에 다방면의 경제활동을 하였는데, 일제강점기 아버지 홍재삼(洪在森)이 축적한 경제력이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고창군 일대에 아버지로부터 직접 물려받은 토지만도 여의도 면적의 1.3배인 111만 평이나 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고창고보 설립 과정에서 천석꾼 지주들은 보통 1만 원을 내었지만 그는 1만6천 원을 기부하였다. 마스토미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경제적으로만 따진다면 학교 설립에 그가 가장 큰 기여를 하였지 않았나 싶다. 고창이라는 지역 연고, 마스토미의 관심사였던 고창고보 건립 과정에서 막대한 자금 지원, 이런 것 등이 인연이 되어 1924년부터 오산리 사과 농장을 운영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따서 홍해(洪海)농장이라 이름 지었다. 현재는 오산농장이라고 쓰인 화강암 안내 표지석이 있지만 여전히 주변 주민들은 홍해농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1932년에는 이 농장을 유상으로 매입하여 자신의 소유로 하고 말았다. 마스토미가 고창고보 이사직마저 그만두면서 사과 농장과 교육활동을 정리하던 무렵이었다. 창씨개명 당시 홍종철의 일본식 이름이 '코우카이 쇼테츠', 즉 홍해종철(洪海鐘轍)이었다.

홍종철은 이후 전주여고보와 한성여중에 대해 기부를 한 바도 있다. 하지만 현금과 미곡 등 일제에 바친 재산은 실로 엄청났었다. 이로 인해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특히 1944년 부안면장 재직 시 주민들에 대한 무리한 공출과 선산이나 묘지 주변 나무 벌채를 강제하여 원성을 샀던 인물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1949년 8월 반민특위에 체포된 사실도 있다. 이 인물 홍종철이 고창 출신 정치인 홍영표의 조부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마스토미가 고창지역 교육과 지역 개발에 공을 남겼다 하여 1995년 12월 김영삼 정부는 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하였다. 그가 한국에서 행한 종교활동, 교육활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많은 자료와 글에서 그를 선의를 가진 일본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가 상업자본을 앞세워 한국으로 들어온 근본 배경을 살필 필요가 있다.

급격히 팽창한 일본인 이주 정책과 자국의 식량 안보를 위한 미곡 증산이 주된 것이었다. 마스토미를 비롯한 대부분의 재한 일본인들이 일부 종교적, 교육적 기능을 했다 할지라도 이는 침탈을 위한 명분이었음이 분명하다. 때문에 일제강점기 재한 일본인들에 대한 평가는 종교나 교육 영역만을 드러내 우호적 시선으로만 평가할 게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여, 엄정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후 진행된 오산고보 운영의 어려움과 고창군민들의 교육에 대한 열망 그리고 민족교육에 앞장선 고창고보의 이야기는 <하> 편에 이어가겠다.

선명완 담쟁이대안교육연구소장
선명완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