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에서 처음 만난 반딧불이, 영원히 빛나리 박준형의 아이와 백패킹

“아빠, 우리 그럼 배를 한번 더 타?”
우리의 목적지는 ‘섬 속의 섬’ 가파도다. 지난 10월 화창한 어느 주말, 목포발 크루즈선을 타고 제주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배를 타기 위해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운진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응, 그런데 배 타기 전에 저녁거리를 준비해야 해. 마트에 들렀다가 항구로 갈 거야!” 해안선 길이가 4.2㎞에 불과한 작은 섬 가파도에는 규모 있는 마트가 없다. 가파도의 청보리와 해산물을 주재료로 하는 카페와 식당, 작은 슈퍼가 있지만, 대부분 마지막 관광객을 태우는 오후 4시10분 배와 함께 하루 영업을 마감한다. ‘가파도에 가서 사 먹으면 되겠지’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다가는 자칫 저녁 내내 배를 곯을 수도 있다.
이번 여정은 9살 아들 서진이와 4살 딸 서하가 함께하는 네 식구 백패킹이다. 침낭, 여벌 옷, 간식거리 등 가벼운 짐은 아내와 아들의 가방에 나눠 담고, 텐트와 취사도구 등 묵직한 장비는 내 배낭에 넣었다. 마트에서 사 온 회 한 접시와 구이용 흑돼지가 담긴 보랭 백은 배낭의 맨 위에 올렸다. 캠핑 장비 점검을 마친 우리는 한결 든든한 발걸음으로 선착장으로 향했다.

“드디어 출발이다!” 오후 2시, 아이들의 환호와 함께 가파도행 블루레이호가 운진항을 떠났다. 내가 사는 세종시부터 제주까지는 육로와 해로를 넘나드는 먼 길이었지만, 제주에서 가파도까지는 뱃길로 10분 남짓이었다. 멀고도 가까운 섬, 가파도였다. “캠핑장 예약한 가족이죠? 여기다 짐 실으세요.” 가파도 유일의 캠핑장이자 그의 이름을 딴 ‘태봉왓’을 운영하는 이태봉(62)씨가 검은색 경차 트렁크를 열며 우리를 맞았다. ‘어린이 동반 가족이기에 일부러 나왔다’는 그의 말투는 투박했지만, 목소리에선 따뜻함이 묻어났다.

배낭을 실어 보낸 우리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전거를 타고 섬을 누비는 여행자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우리도 자전거 타볼까?” 자전거 대여소를 찾았지만, 아쉽게도 둘째에게 맞는 자전거는 없었다. 키가 120㎝는 넘어야 탈 수 있다고 했다. 아쉬움을 뒤로한 우리는 선착장 앞 카페로 향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청보리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에 아이들의 얼굴엔 금세 웃음이 돌아왔다. 살랑이는 바다 내음을 느끼며 해안을 따라 걸었다. 지난봄, 청보리가 초록 물결을 일렁였을 들판에는 활짝 핀 코스모스가 가득했다. 아이의 작은 걸음으로 30분쯤, 보릿대를 동그랗게 엮어 만든 ‘차이문’을 통과하며 캠핑장에 들어섰다. ‘차이문’은 태봉왓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태봉왓 캠핑장에는 노지 사이트와 데크 사이트가 있다. 잔디와 파쇄석으로 이루어진 노지 사이트는 바다 건너 한라산을 조망하는 뷰 맛집이고, 가파도의 남쪽 바다를 조망하는 데크 사이트는 화장실과 샤워실 등 편의시설에 가까웠다. 나와 아들은 노지 사이트가 마음에 들었지만, 아내와 딸은 화장실이 가까운 데크 사이트를 선호했다. “그럼, 오늘은 데크로 하자, 아빠!” 아들의 목소리는 ‘아쉽지만 괜찮다’는 마음과, ‘데크도 좋아’ 하는 여유를 함께 품고 있었다.


텐트와 타프를 설치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노을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랜턴을 켜고 준비해 온 저녁거리를 펼쳤다. “서하야, 저기 날아다니는 불빛 봐봐! 반딧불이야, 반딧불이!” 서진이의 손끝이 가리킨 풀숲 사이로 옅은 노란빛이 반짝였다. “와! 나 태어나서 반딧불이 처음 봐!” “나도 처음 봐, 오빠!”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클레어와 올리버가 제주에서 반딧불이를 만난 순간이 마치 이와 같지 않았을까.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빛나는 반딧불이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점차 상기되었다. 훗날 가파도에서의 풍경은 언젠가 아이들의 기억에서 멀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딧불이를 처음 보던 순간의 설렘만큼은 오래도록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은은한 빛으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괜스레 가슴 한편이 따뜻해졌다.
글·사진 박준형 ‘오늘도 아이와 산으로 갑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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