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생 출신 3세대 독립운동가 "철혈로 왜적 무찔러야"
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25〉 나창헌
![의열투쟁 선두에 서서 임정을 지켜나간 의학도이자 철혈 독립운동가였던 나창헌 선생. [사진 네이버 지식백과]](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22/joongangsunday/20251222113805693lhqq.jpg)
50여 년의 독립운동사를 보면 1세대(1850~1870년경 출생)는 개화기의 계몽운동과 의병활동에 나섰고 2세대(1870~1890년대 출생)는 을사늑약 후 망명과 무장투쟁, 외교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3세대(1900년 전후 출생)는 3·1운동 후 대중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는데 나창헌(羅昌憲) 선생은 3세대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의친왕 이강 국외 망명 시도했다가 실패
선생은 1896년 평북 희천에서 지방유지인 부친 나지홍의 5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1905년부터 고향에서 일신학교를 다녔고 1909년 영변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3년 평양고등학교와 경성교원 양성소를 수료한 후 교원생활을 했다. 1914년 일본 유학을 떠나 정신과 관련 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해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후에 서울대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일본의 통신과정 수업을 받던 선생은 1918년 말 다시 동경으로 가서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이를 국내로 전파했다.
3·1 운동 당시 경성의전 2학년 학생이던 선생은 학생 대표로 선출되어 만세운동 참여를 주도했다. 선생은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과 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또 다른 만세운동을 준비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대문 감옥에서 3개월 여 동안 갖은 고문을 받던 선생은 병 보석으로 출옥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나 병원을 탈출했고 그 해 7월 궐석재판에서 징역 7개월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3·1 운동 후 전협·김가진 등이 결성한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했는데 이 단체는 전 민족과 전 계층을 아우르는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되었고 선생은 대동신보 발행과 국내 각지의 연통부설치 등 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대동단 주요 인사를 체포하면서 활동이 위축되자 본부를 상해로 옮기기로 하고 선생은 김가진 총재가 국외로 탈출하도록 도왔다. 이어 선생은 고종 황제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의 국외 망명 계획도 추진하였으나 일경에 적발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선생은 국내에서 대동단을 이끌고 상해 임정의 지원을 받아 제2회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면서 독립선언서 집필과 민족대표 인선을 맡았다. 선생을 비롯한 대동단, 불교계 등 33인의 명의로 1919년 11월 발표한 독립선언서는 소극적인 비폭력 저항에서 한걸음 나아가 적극적 무장투쟁까지 예고하는 것이었다. 일제 경찰은 이를 미리 알아내어 주요 인사들에 대한 체포에 나섰으나 선생은 11월 28일 안국동에서 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 직후 선생은 상해로 망명했고 일제는 궐석재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했다.
1920년 선생은 상해 망명 후 김가진과 함께 대동단 재건에 앞장섰다. 대동단은 그 해에 상해 임정이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한 것과 발 맞추어 군사계획을 세우고 혈전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선생은 상무부장을 맡아 실무를 총괄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다.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방법론과 독립운동가들의 지역·종교·단체 등을 배경으로 분열과 대립이 격화되고 대동단 활동도 어려워지자 선생은 청년들을 결속해 ‘철혈단’을 조직해 활동에 나섰다. 일제의 농간 등으로 철혈단과 임정은 상호 적대적인 갈등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나 선생은 안창호와 가까이 지내며 철혈단 활동을 끝내고 이후 약 6년간은 임정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3·1 운동 직후 세워진 상해 임시정부의 권위가 약화되고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다원화 되면서 임정에 대한 전면 개편 요구가 제기되자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게 되었고 선생도 이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임정 개조파·창조파 등의 대립으로 회의는 결렬되고 독립운동 노선은 다원화의 길을 가게 된다.
![흥사단 원동위원부 명단. [사진 독립기념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22/joongangsunday/20251222113806048akto.jpg)
1925년 선생은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탄핵심판위원장을 맡아 직무지 미복귀와 구미위원회의 재정 문제 등을 들어 이승만 임시대통령을 면직하는 탄핵심판을 의결했다. 이후 상해는 찬반세력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선생은 임정과 교포들의 안전을 지키는 경찰실무 책임을 맡은 내무차장 겸 경무국장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경무국 외곽조직으로 ‘정위단(正衛團)’을 조직해 단장을 맡았다. 당시 정위단원이 임정 간의 갈등 끝에 ‘여운형 구타사건’을 일으킨 데 대하여 선생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범죄가 있을 경우 임정이 법적 판결을 내려야 하며 자신이 이끄는 정위단에 대해서도 엄격히 법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선생은 정위단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일제와의 의열투쟁에 나서기 위해 1926년 60여 명의 대원들로 ‘병인의용대’를 조직했다. 임정 경무국장인 선생이 의용대의 고문과 대장 등을 맡아 상해에서 일제의 밀정을 처단하는 한편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하여 국내의 일제 기관을 폭파하는 등 반일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1926년 선생은 순종 인산일(장례일)에 일어난 6·10 만세 운동을 위해 의용 대원을 국내에 파견하고 국내의 천도교 세력과도 협력했다. 6·10 만세 운동을 전후해 선생은 상해에서 의용단을 지휘하여 일제 총영사관에 수차례 폭탄을 투척했고 국내에서도 조선총독부 공격 등을 계획했다. 이러한 의열투쟁은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년 남짓 의열투쟁을 전개해 온 병인의용단은 재정이 어려워지고 대장인 선생이 1926년 일제의 체포를 피해 항주로 피신하면서 활동이 크게 약화되었다.
5형제 모두 독립운동 참여 ‘의로운 가문’
이즈음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해 단일한 정치 조직과 전략을 갖춘 민족정당을 창설하려는 민족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고 선생은 이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1927년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참여하여 ‘대독립당 상해촉성회’를 발족시켰고 선생은 24인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북경·무한·남경 등지에서도 촉성회가 결성되었으나 좌우 세력의 주도권 다툼 등으로 촉성회는 해체되었고 임정과 흥사단의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1930년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게 된다.
선생은 1926년 상해에서 항주로 옮긴 이래 구강·중경·사천 등지로 옮겨 다니면서도 병원 운영과 독립운동을 계속 했다. 1933년 사천성 만현으로 가서 병원을 설립해 운영하면서 흥사단 활동을 이어갔으며 상해에 잠시 체류하면서 병인의용대를 재건하고 고문을 맡아 의열투쟁을 지휘했다. 1936년 만현에서 위암으로 투병하다 40세를 일기로 서거해 양자강변 묘지에 안장되었고 임정 인사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참배했다.
![나창헌 선생 어록비. [사진 독립기념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12/22/joongangsunday/20251222113806333joqu.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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