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실수가 신뢰로 변하는 달력
‘火요일→小자’ 표기로 업체 사과
SNS선 불평보다 위로·응원보내
실수 때 ‘슬기로운 대처법’ 훈훈
어릴 적 연말만 되면 집에 달력이 하나둘 쌓였다. ‘달력 인심’이 후하던 시절이라 공짜로 들어오는 달력이 방과 거실을 합친 수를 늘 넘어섰다. 집안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엄마는 음력 날짜도 큼지막하게 적힌 달력을 선호했고, 아빠는 ‘걸어 두면 돈이 들어온다’는 은행 달력을 1순위로 골랐고, 오빠와 나는 디자인이 예쁜 달력을 골라 방에 걸어두었다. 거실 벽을 차지하는 달력엔 가족 구성원 각자의 생일 등 잊지 말아야 할 공통 스케줄이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되곤 했다. 스케줄 매니저 역할을 해주는 달력을 확인하며 우린 한 해를 살았다.

2026년 판 달력은 이제껏 구매해 온 달력과 디자인이 달랐다. 영문으로 쓰였던 요일이 한자로 바뀌었고, 서체도 변형됐다. 아, 새로운 시도를 하셨구나. 변화에 적응이 늦은 인간이라 어색하긴 했지만, 믿고 구매해 온 곳인지라, 곧 익숙해지겠지 하며 주문했다. 그렇게 달력을 받고 열흘쯤 지났을까. 장문의 문자가 왔다. 발신인은 구매처. 내용인 즉, 화요일의 ‘화(火)’자가 ‘소(小)’자로 표기되는 하자가 발생했음을 뒤늦게 발견해서 연락했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그렇다. 정말로 월‘소’수목금토일이네?
디자인 업체는 ‘반품’을 포함한 3가지 옵션을 제안하며 불편드려 죄송하다고 양해를 연신 구했는데, 전혀 불편하거나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어쩌나’ 싶었다. 아마도 달력은 이 업체의 1년 농사에서 중요한 수익을 담당하는 주력 상품일 텐데, 오기 하나로 큰 피해를 보게 된 셈이니 어쩌나. 위로의 말과 함께 오랜 시간 팬이었음을 커밍하웃하며 응원을 보냈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나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아니, 대부분이 이런 반응이었던 것 같다. “비록 26년 달력은 이렇게 보내야 하지만, 힘 나는 말들과 응원 덕에 마음은 넘 행복하다”는 말을 SNS로 전한 걸 보면 말이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러나 실수로 인한 대가는 사람마다 크게 갈린다. 여기엔 크게 두 가지가 결부되는 것 같다. 하나는 실수가 일어났을 때의 대처 법이다. 이번 사건에서 해당 업체는 사과 타이밍이든, 상대와 소통하려는 의지든, 재발 방지에 대한 약속이든 뭐 하나 어긋나는 게 없었다. ‘실수’를 통해 오히려 ‘신뢰’를 쌓은 셈이다. 또 하나가 어쩌면 핵심인데, 그건 실수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 사람이 걸어온 행보다. 한 사람의 인생은 어느 한 가지 실수만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여러 가지가 지뢰처럼 숨어 있다가 결정타가 터졌을 때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역도 가능하다. 그 사람에 대한 신뢰가 알게 모르게 쌓여 있는 경우라면, 그것이 실수에 대한 방어막이 되어 주기도 한다.
여러 구매자가 이번 사건에 보낸 반응을 보면, 해당 업체는 후자로 잘살아온 듯하다. 큰 브랜드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꾸준히, 묵묵히, 실력으로 걸어온 행보가 이번 실수에서 구원투수로 기능했다. 오기가 있는 제품이라고 구매하고 싶다는 의견에 해당 업체는 이 달력에 [하자제품]이라는 안내를 달아 반값으로 판매되고 있는데, ‘하자’가 그 하자가 아닌, ‘뭐든 (열심히) 하자’로 읽힌다. 월‘소’수목금토일 달력이 내게 준 큰 깨달음이다.
정시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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