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죄인이라 불렀으나, 우리는 영웅으로 기록한다 [일제 법정에 맞선 독립운동가·(18·끝)]
기억의 끝에서 돌아온 기록… 역사의 법정은 시효가 없다
재판장 꾸짖은 소년 상인·수탈 구조에 반기 든 농민들
일제가 저항 탄압 활용한 판결, 오히려 헌정 이념 구체화
민주주의 사회의 법·권력에 대한 감시 역사적 기준으로

올해 경인일보가 광복·창간 80주년을 맞아 들어가 본 장소는 ‘식민지 법정’이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법정은 독립운동가를 처벌하기 위한 통치기구였다. 그러나 어떤 독립운동가에게 그 재판정은 단순히 탄압의 공간이 아니라 식민지 권력의 부당함을 공개적으로 고발하고, 나아가 새로운 국가의 논리를 구축하고자 한 ‘투쟁의 현장’이었다.
경인일보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취재팀은 3·1운동과 만세시위, 비밀결사 활동, 의병 항쟁, 해외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법정에 서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재판 기록을 통해 조선총독부 사법 체계가 어떻게 항일운동을 범죄로 규정했는지 추적했다. 동시에 그 법정 안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어떤 논리로 저항했고, 끝내 그 과정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헌정 이념으로 이어졌는지를 찾아 엮어냈다.
그들은 법정에서 오히려 ‘누가 이 땅의 주권자인가’라고 끊임없이 식민지 권력에 되물었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때때로 법정에선 독립운동가들의 반격도 있었다. 조선총독부 사법 당국은 3·1운동 지도자들에 대해 ‘내란죄’로 규정하려다 실패했으며, 오히려 허술한 법 적용으로 1심 재판이 무효로 마무리되기도 했다.
인천의 소년 상인들은 ‘민족자결주의’로 당당히 재판장을 꾸짖었다. 이화학당에 모인 여성 독립운동가들, 수탈 구조에 반기를 든 농민들은 ‘그들의 언어’로 독립을 이야기했으나,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취재팀은 이들의 기록을 다시 살피고 고증해 ‘법정 드라마’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렇게 잊힌 이들의 목소리를 널리 알리고자 했다.
법정이나 법조계를 다룬 TV 드라마가 쏟아지고 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탄핵된 대통령의 내란죄 재판 현장이 신문 지상이나 TV,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등으로 중계되고 있다. 자의든 타의든 온 국민의 시선이 법정으로 쏠리는 시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어느 때보다 개헌 논의가 활발한 때다.
일제 법정에서 주장된 자유, 평등, 민주, 인권의 가치는 임시정부의 헌정 이념으로 구체화됐다. 일제 법정은 독립운동을 처벌하려 했지만, 역설적으로 그 안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기본 원리가 다져졌다. 일제 법정은 과거의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벌어진 논쟁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독립운동가들의 법정 투쟁은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과 권력을 어떻게 감시하고 지켜야 하는지를 되묻는 역사적 기준으로 남아 있다.
이번 기획 시리즈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 소개하고, 시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는 점이다.

1919년 8월21일 용산 일본군 육군군법회의 법정에서 제암리 학살을 지휘했던 아리타 도시오 중위에게 내려진 판결은 ‘무죄’였다. 스물세 명의 주민을 교회당에 가두고 총을 쏘아 불태운 만행 앞에서도, 일제의 법은 “폭민에 대한 진압이자, 상관 명령의 오해에서 비롯된 과실”이라며 그에게 면죄부를 쥐어주었다. 그렇게 가해자의 법정은 문을 닫았다. 학살은 있었으나 책임자는 없는 기만적인 역사의 한 페이지였다.
그러나 판결봉이 두드려진 그 순간에도 진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식민지 법정이 죄를 덮으려 할 때 역사의 법정에서는 끊임없이 증언과 기록이 이어졌다. 취재팀이 마주한 것은 바로 그 치열한 ‘기억의 투쟁’이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한 세기의 시간을 넘어 마침내 제자리를 찾은 두 개의 결정적 증거와 마주했다.

취재과정서 발굴한 ‘화성 제암리 학살’ 새로운 사료들
우리 민족의 자발적 분노·기억투쟁 순간 다시금 확인
일본인 목사의 ‘사죄 편지’… 진정한 화해 가능성 증거
취재팀은 취재 과정에서 해방 직후인 1945년 우리 민족이 스스로 제암리의 비극을 기록하고 추모했음을 증명하는 문건을 단독으로 발굴(4월16일자 1면 보도)했다. ‘발안 제암동 대학살 사건을 회상하자’는 제목의 1945년 10월20일자 추도회 안내장이다.
그동안 미군정의 기록이나 외신 보도에 의존했던 제암리의 역사가 해방 공간에서 우리 민족의 자발적인 분노와 기억 투쟁으로 가장 먼저 소환됐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화염 속에 학살당한 동포를 회상하자”는 문건 속 절규는 26년 전 일본 법정이 지워버린 진실을 다시금 법대 위에 올려놓는 민초들의 고발장이었다. 이로써 1945년 추도회, 1946년 독립운동기념비, 1959년 순국기념탑으로 이어지는 제암리 추모의 역사가 비로소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됐다.

이와 함께 취재팀은 또 하나의 특별한 기록을 세상에 내놓았다. 1968년 일본인 목사 오야마 레이지가 경인일보(당시 경기연합일보) 앞으로 보내온 ‘사죄의 편지’(8월14일자 1면 보도)다. 일본 정부가 침묵과 은폐로 일관할 때 오야마 목사는 “일본인의 죄악을 용서해달라”며 펜을 들었다. 당시 학살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유족들은 가해자의 돈과 사과를 거부했으나, 그의 거듭된 참회는 결국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었다.
제암교회 재건의 초석이 됐던 그 편지 원본을 57년 만에 다시 찾아 조명한 일은 일본 정부가 외면한 사죄가 시민사회의 참회와 양심을 통해 진정한 화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일제 법정에 맞선 독립운동가’ 기획 시리즈는 단순한 보도에 그치지 않았다. 취재팀은 이 기록들이 신문 지면 속에만 머무르기를 원치 않았다. 경인일보 관련 보도 이후 1945년 추도회 문건을 소장했던 수집가 박현철씨와 1968년 오야마 목사의 편지를 보관해 온 이창식씨는 기꺼이 이 자료들을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에 기증·대여했다.

개인 서재와 오래된 문서 꾸러미 속에 잠들어 있던 이 사료들은 이제 공적인 역사 기록물이 돼 기념관 전시실에서 시민들을 만나고 있다. 하나는 일제의 학살을 기억하려는 피해자의 주체적인 목소리, 다른 하나는 국가의 범죄를 대신 참회한 가해국 시민의 양심으로 기념관에 전달됐다. 이는 1919년 일제 법정이 내린 ‘무죄’ 판결이 얼마나 허구였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반박문이자, 영구히 보존돼야 할 역사의 판결문이다.
제암리의 비극은 1919년에 끝난 과거형이 아니다. 왜곡된 군법회의 판결 속에서 ‘책임자는 없었다’고 선언된 왜곡, 생존자의 증언으로 다시 드러난 진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사료들…. 취재팀이 지나간 과거를 좇는 내내 선명하게 남은 것은 ‘기록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진다’는 명제였다. 반대로 말하면, 기록을 찾아 되돌려놓는 순간 역사는 새로 쓰인다.
일제의 법정은 그들을 죄인이라 불렀으나, 역사의 법정은 이제 그들의 희생과 남겨진 이들의 기억을 잇기 위해 나섰던 투쟁을 ‘진정한 승리’라고 기록한다.

/유혜연·박경호 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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