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의 ‘잃어버린 기술’, 여기에 남아 있다

오전부터 이어진 밭일을 마치니 오후 4시께였다. 보건진료소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황인순씨(74)는 제 집처럼 믹스커피도 타 마시고, 사과도 깎아 먹고, 삶은 고구마도 찾아 먹었다. 진료실 앞 소파에 모로 누워 텔레비전을 보다가 깜빡 잠든 사이, 박도순 장안보건진료소장(59)이 방문 진료를 마치고 들어와 황씨를 보고 반색했다.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느냐는 질문에 황씨가 잠이 덜 깬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까 문자 했자녀. 온다고 했으니까.”
독감 예방접종을 마친 황씨는 ‘외상’을 달아놓고 돌아갔다. “아무 때나 들러서 주셔.” 자주 있는 일이다. “돈 못 받은 적은 없어요.” 매일 정산을 해서 보건소에 보고해야 하기 때문에 박 진료소장 돈으로 일단 메운다. 보건진료소에는 카드단말기가 없다. 카드 결제 수수료 때문이다. 대신 동전통이 있다. 보건진료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일반 진료를 받을 때 내는 본인부담금은 900원이다(65세 이상 무료). 1000원을 내면 동전통에서 100원을 꺼내 가게 한다. 독감 예방접종 막바지였던 11월13일은 유난히 외상이 많았다. “주사 무서워요”라는 말만은 정확하게 발음하며 비명을 질러 진료실을 웃음바다로 만든 네팔 출신 20대 이주노동자에게는 “사장님한테 (돈은) 내가 따로 받을게요”라며 돌려보냈다.

전북 무주군 부남면 노루재로 556에 위치한 장안보건진료소의 관할 세대는 223세대, 총 392명이다. 그중 60.5%인 237명이 65세 이상이다. 이곳 주민 모두 박 진료소장의 진료 대상이다. 제일 빈도수 높은 질환은 감기, 고혈압, 관절통 순이다. 모든 이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박 진료소장의 휴대전화에 빼곡하다. 장안보건진료소는 박도순 진료소장의 다섯 번째 부임지이자, 마지막 근무지다. 2023년 5월 발령받았고 2026년 6월 정년을 맞는다. 이전에는 늘 보건진료소 내 관사에 살다가, 이곳으로 오면서 40여 년 만에 처음 출퇴근을 하기 시작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어 진료소에서 약 13㎞ 떨어진 곳에 주택을 지었다. 처음으로 생긴 ‘집’에서 요즘 몰두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가드닝(생활 원예)이다. 언젠가 지역 내 환자들이 와서 쉴 수 있도록 정원을 개방하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 중이다. 퇴근 후 몸은 진료소 밖에 있어도 전화는 언제나 휴대전화로 받을 수 있도록 착신으로 돌려놓는다. 휴가 중 해외에 체류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르신들이 전화해서 제일 많이 묻는 말이 ‘문 열었냐’가 아니고 ‘거기 사람 있어요?’예요. 그 말이 이상하게 사무치더라고요. 그럼 나는 ‘여기 사람 있어요’라고 답하죠. 결국 내가 있을 곳이 여기구나 싶고요.”
의사를 대신한 간호사
보건진료소가 작다고 해서 작은 상처만 오지 않았다. 때로는 거의 응급실 수준의 상처가 들이닥치곤 했다. 박 진료소장의 첫 발령지는 1989년 구천보건진료소였다. 무주 덕유산리조트가 건설되던 때라 전기톱으로 인한 상처가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했다. “진료소 현관에 흙 마를 새가 없었어요.” 돼지고기 비계살을 사다가 꿰매는 연습을 하고 또 했지만 처치가 잘 됐는지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불안해서 아침이면 누가 시키지도 않은 방문 진료에 나섰다. “그게 이상하게 소문이 났어요. 우리 진료소장은 집에까지 찾아와 염려해준다고. 내 속도 모르고(웃음).”
사람이 아픈 것도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과 시간’에만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었다. 밤낮이 따로 없었다. 사실상 24시간 근무였다. 보건진료소에 딸린 관사에서 먹고 자며 1993년생, 1997년생 두 딸과 2003년생 아들 쌍둥이까지 넷을 키웠다. 진료하다가도 젖을 먹이곤 했다. 동네 할머니들이 업어주면서 같이 키웠다. 병원도 없고 약국도 없는 벽촌에 사교육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이들한테 제일 많이 한 말이 ‘나가 놀아라’예요.” 평생 김장을 해본 적도 없고, 각종 농산물을 사 먹은 적도 없다. 매일 아침이면 누가 갖다 놓았는지도 모를 농산물 꾸러미가 보건진료소 앞에 쌓였다.
간호사를 직업으로 삼은 건 “뻔한 레퍼토리”였다. 박 진료소장은 딸 다섯에 아들 하나 있는 집안의 장녀였다. 가난한 농부였던 부모는 시험을 잘 본 큰딸에게 대학 원서 쓰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고3 담임이 “보여줄 게 있다”라며 학교로 그를 불렀다. 공중보건 장학생을 선발하니 추천하라는 내용의 보사부(보건사회부) 공문이었다. “너 이거 아니면 대학 못 간다. 원서 사와라.” 국문과에 진학해 소설을 쓰고 싶었던 ‘문학소녀’는 그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1986년 간호학을 전공하게 됐다. 졸업 후 장학금을 받은 기간만큼 보건진료소에서 근무해야 했다. 3년 의무 기간이 끝난 후에야 간호사 자격증이 나왔다. ‘타의’로 보낸 3년이 끝난 뒤 고민이 깊었다. ‘자의’로 3년 더 있어보자 싶었다. 무주는 자신의 고향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농촌에 있어야 했다. 그 누군가가 자신이 아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1982년 공식 출범한 보건진료소는 1980년 12월 시행된 ‘농어촌등보건의료를위한특별조치법’에 의해 설치된 가장 작은 단위의 지역 보건의료기관이다. 병원은커녕 약국조차 없는 의료 취약 지역을 위한 정책적 대응이었다. 이른바 1차 의료를 담당하는 지역 보건의료기관은 모두 세 곳이다. 시군구 단위에 있는 보건소, 읍면 지역에 있는 보건지소, 그보다 더 작은 마을에 위치한 보건진료소로 나뉜다. 행정기관인 보건소를 제외하고 보건지소와 보건진료소는 의원에 준하는 진료기관 구실을 한다. 공중보건의사는 보건지소에 배치되는데, 그마저도 숫자가 계속 줄고 있어서 순환근무를 해야 하는 지경이다. 보건진료소는 예나 지금이나 그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한다. 전북 무주에는 보건소 1개소, 보건지소 5개소, 보건진료소 9개소가 있다. 보건진료소장은 간호사가 맡는데 ‘제한적이나마’ 의료 행위를 할 수 있다. 의사만이 독점적으로 의료 행위를 할 수 있게 정해진 의료법에서 유일한 예외인 간호사 진료 모델이다. 보건진료소는 간호사가 ‘조건부 의사’로 기능하는 공간인 셈이다.
매일 아침 첫 손님은 거의 정해져 있다. 보건진료소 관내 노인주간보호센터에서 아침마다 몸이 불편한 노인을 모시고 온다. 증상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진료 시간은 한 사람당 20분을 훌쩍 넘길 때가 부지기수다. “환자 한 사람을 보는 데 3분이 걸리든, 2시간이 걸리든 그걸 누가 알겠어요? 오늘 환자가 8명이잖아요? 그럼 위에서 숫자만 보는 사람들은 오늘 한가했겠네, 하겠죠.” 박 진료소장은 진료실에서 ‘몸의 역사’를 묻고 들었다. 증상과 상관없어 보이는 과거 수술 자국도 살피고, 먹고 있는 약을 따져보고, 일상을 두루 훑는다. “제가 가진 정보는 환자의 말뿐이잖아요. 여기에는 엑스레이도 초음파도 없기 때문에 가능하면 많은 말을 이끌어내야 해요.”

아침에 자식처럼 키우던 염소를 팔고 속상해서 한참 울다가 보건진료소에 들렀다는 최옥선씨(60)는 “소장님이 약을 진짜 잘 지어요. 여기가 잘 들어. 약 짓는 게 딴 데랑 다른 것 같아”라고 말했다. 최씨가 나간 후 박 진료소장에게 어떤 약을 짓느냐고 물었다. “타이레놀”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보건진료소에서 처방·조제할 수 있는 약의 수준이 그 정도다. 그런데도 약 잘 짓는다는 ‘소문’이 난 걸까. 관할 지역이 아닌 곳에서 환자가 찾아오기도 한다. 김정순씨(90)가 경기도 수원에 사는 딸을 불러 “병원에 가자”라며 나선 곳이 장안보건진료소였다. “큰 병원에 가자고 하는데도 엄마가 굳이 여기로 오고 싶어 하시네요.” 딸이 머쓱해했다. 김씨 집에서 더 가까운 곳에 공중보건의가 배치된 부남보건지소가 있는데, 굳이 더 먼 이곳으로 왔다. 그 이유를 묻자 김씨가 말했다. “내가 필요할 때 갈 수가 없어. 의사가 그나마 매일 있지도 않아.” 부남보건지소에선 공중보건의가 상주하지 않고 수·목 이틀만 오는 순환근무를 하고 있다.
‘관계’ 속에서 가능한 진료
의료기관이 매일 문을 여는 건 이용자에게 생각보다 중요하다. 공중보건의가 오는 날에 맞춰 아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엄청 아프다기보다는 ‘불편하다’는 느낌일 때가 더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문을 여는 장안보건진료소는 서울 빅5 병원 못지않은 의료기관이다. 김씨는 증상이 없는데도 약을 요청했다. “비타민 영양제 좀 챙겨 드릴게요. 집에 있는 약 마음대로 드시지 말고, 안 좋은 것 같으면 꼭 부남보건지소로 가보셔요. 근데 내가 혈압도 재보고 하니까 안심해도 돼. 아주 200살까지 살겠어.” 박 진료소장의 너스레에 김씨가 “그런 소리 하지 마!”라고 되받아치면서도 빙긋 웃었다.

치료만큼이나 중요한 게 감정적 돌봄이다. ‘하지 말라’는 말은 되도록 하지 않는다. 고령의 나이에도 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상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다. 박 진료소장에게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만짐’이다. 손도 만지고, 어깨도 주무르고, 눈도 마주쳐야 비로소 진료가 시작된다. 옻이 올라 쫓아왔다는 김영록씨(81)에게 연고를 내어주며 박 진료소장이 덧붙인다. “아부지, 너~무 가려우면 참지 말고 시원하게 긁고 약 많이 발라.” 진료실은 때로 심리상담소가 된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왔는데 가만히 얘기 들어보면 하고 싶은 얘기가 따로 있어요. 아들이 보증을 잘못 서서 논밭이 날아가게 생긴 거예요. 나 같아도 잠 못 자고 머리 아프지. 그럴 때면 지지하고 격려해주는 거예요. 저도 역으로 상담해요. 우리 쌍둥이들이 너무 공부를 안 한다고(웃음).”
유영화씨(82)가 감기 기운을 호소하며 진료실에 들어서자 당장 박 진료소장의 다정한 나무람이 돌아왔다. “추운데 밖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셨구먼.” 김장 준비하느라 세 시간 가까이 마당에서 알타리무 다듬은 걸 어찌 알았느냐며 대화가 또 한참 이어졌다. “따뜻한 데서 쉬면 좋아질 거예요. 생강차 따뜻하게 마시고··· 내가 만져보니까 괜찮아.” 유씨는 “젊은 사람(박도순 진료소장)이 만져주니 좋네”라며 기분 좋게 돌아섰다. 약이나 주사 대신 생활 처방을 내리는 경우가 훨씬 많다. ‘관계’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진료다. 약을 주지 않아도 환자가 불만을 갖지 않는다.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신뢰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신뢰는 함께 보낸 시간이 빚은 선물이다.
11월12일 오후 4시 즈음, 박 진료소장이 방문 진료에 나섰다. 일주일에 3~4일은 누가 부르지 않아도 나가려고 한다. 일종의 “착한 참견”이다. 거동이 힘들어 보건진료소에도 올 수 없는 노인들의 약을 챙기는 게 주요 임무다. 코로나19 기간에는 두부며 고등어 등 장을 봐다 나르기도 했다. 산소포화도, 혈당측정기, 1회용 소독 키트, 소독약, 포터블 혈압계, 밴드 따위가 왕진 가방에 함께 담긴다. “이렇게 다니면서 마을도 살펴야 어르신들이 요즘엔 왜 아픈지 알게 돼요. 타작하고 나락 터는 시기에는 접촉성 피부염이 많고, 감 따는 시기나 김장철에는 근육통이 많고요.” 계절과 삶의 맥락을 살피며 적절히 개입하는 것도 박 진료소장이 생각하는 ‘의료 기술’이다.
박 진료소장이 보건진료소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고창리 방골마을로 차를 몰았다. 내비게이션이 필요 없다. 올해 104세인 임순이씨가 홀로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섰다. 임씨는 왼쪽 손목이 부러졌는데 고령이라 마취 등에 문제가 있어서 부러진 채로 산다. “병을 고치는 게 아니라 아픈 채로도 잘 사는 게 중요해요.”

‘관리’만 잘 되면 굳이 병원이며 요양원으로 가지 않고도 살던 곳에서 본인 생활습관대로 지내는 게 가능하다. 병원이 생의 ‘마지막’ 집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박 진료소장이 청진기 혈압계를 꺼내 임씨의 혈압을 쟀다. 이내 큰 소리로 또박또박 임씨에게 일러준다. “혈. 압. 이. 굉. 장. 히. 좋. 아. 요.”
병원이 아니라 지역에서 늙어가도록
방문 진료에 동행한 김진환 서울대 보건환경연구소 연구조교수는 박 진료소장의 의료 행위를 ‘로스트 테크놀로지’라고 말했다. “요즘 젊은 간호사들은 청진기 혈압계를 예전처럼 많이 쓰지 않아요. 의사도 마찬가지고요. 자동에 익숙해져 있어서요. 비정상적인 심음을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하면, 이른바 ‘정상’을, 건강한 사람의 소리를 많이 들어보면 되거든요. 몸으로 익히는 거죠.” 의사 면허가 있는 김 교수는 “‘정상’을 판독하는 게 제일 어렵다”라고도 덧붙였다. “검사를 안 하기로 결정을 내리는 거잖아요. 의사들은 검사를 많이 하고 나서야 판단하는 데 익숙해져 있어요. ‘정상’이라는 의료인의 말에는 책임이 담겨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1차 의료라고 했을 때 엑스레이 같은 기계가 없어서 진료를 못 보는 게 아니라, 엑스레이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다르게 진료를 볼 것이냐를 생각해야 하잖아요.”
박 진료소장이 11월13일 퇴근을 앞두고 고순단씨(91) 집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인기척은 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한참 만에 열린 문으로 들어가며 박 진료소장이 고씨의 팔짱을 꼈다. “어머니 보고 싶어서 왔지.” 집에 들어가서 살펴보니 고씨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무음으로 돼 있었다. 불편했는데 마침 잘됐다며 고씨가 휴대전화를 내밀자 “내가 사람도 살리고 휴대전화도 살려”라며 박 진료소장이 웃었다.
고씨는 한 달 전부터 노인주간보호센터에 나가고 있다. “윷도 놀고 노래도 하고 재미는 있는데 시집살이 같애. 내가 다리가 불편해서 직접 못 가니까 센터에서 데리러 오는 시간에 맞춰야 하잖아. 이 나이 먹어서 아침에 내 맘대로 일어나지도 못한다(웃음).” 고씨의 하소연을 박 진료소장은 한참동안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는다. 문밖을 나서며 고씨가 깎아놓은 곶감이며 살뜰히 가꾼 텃밭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았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이미 2011년 보건진료소에 대해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공간에 생기게 될 새로운 복지·보건 체계의 가능성”으로 봤다(〈일차보건의료와 보건진료원 제도〉). 박 진료소장은 자신의 일이 단순히 진료에 머물지 않고 삶을 돌보는 것임을 보건진료소에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건 덕분에 알게 됐다. “제가 보건진료소에 오는 분들을 속속들이 잘 알지 못하면 제대로 돌볼 수 없잖아요. 서울 빅5 병원에 전국에서 환자가 몰린다고들 하는데, 서울까지 가는 게 말처럼 생각처럼 쉽지 않아요.”
무엇보다 노환처럼 치료 방법 없는 고통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자리를 지키면서 늙어갈 수 있을지 지역 주민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며 여전히 배워나간다. 그런 측면에서 보건진료소는 사실상 농어촌 지역에 존재하는 유일한 복지 혜택이나 다름없다. 정년을 앞두고 그에게는 요즘 새로운 걱정이 더해졌다. 자신이 해온 역할과 노력이 자신의 세대에서 끊어지는 것은 아닐까.
11월20일 국회입법조사처가 내놓은 연구 보고서(‘법·제도의 공백으로 사각지대에 놓인 지역 보건의료기관’)에 일말의 답이 있다. 한진옥 입법조사관은 농어촌 1차 의료를 총괄하는 중앙 전담 부서 부재를 짚으며 “보건지소·보건진료소 재구성을 통해 1차 의료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라고 제안한다. 보건진료소의 설치 및 운영 근거인 ‘농어촌등보건의료를위한특별조치법’은 1980년 시행되었으니 1987년 만들어진 헌법보다 나이가 많다. 군사독재 시절의 잔재가 40년 넘는 세월 동안 ‘임시조치’로 농어촌 의료를 겨우 지탱하고 있다. 이 오래된 임시조치를 끝내고 공공의료와 통합돌봄의 틀 안에서 보건진료소를 ‘재발견’해야 할 과제가 박 진료소장이 떠나는 자리에 남았다.
무주/ 글·장일호 기자, 사진·박미소 기자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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