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기독교 입문, 평생 굽힘 없이 항일 광복운동 벌여
45) 서천출신 김인전, 청주출신 신석구 목사
김인전, 상하이 임시의정원 의장 역임
신석구,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서명



기독교계는 일제강점기 매우 다양하고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16명이 기독교계 인물이다. 전국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도 기독교계 학교의 학생과 교사, 교회 신도들이 대거 참여했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투쟁을 벌인 애국지사나 해외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탠 사람 중에도 기독교도가 많다. 수많은 기독교도가 학교와 언론계에서 교육계몽과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충남 서천 출신의 김인전 목사와 충북 충주 출신의 신석구 목사도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이다.



경재 김인전은 1876년 10월 충남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에서 수원 군수를 지낸 부친 김규배와 모친 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문물을 받아들인 지식인으로 서천 출신 월남 이상재와 서울에 황성기독청년회를 만들어 계몽운동을 펼쳤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1903년 27세 때 기독교도가 됐으며, 1906년에는 재산을 출연해 고향에 한영학교를 설립했다. 학교에서는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고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길러줬다.
1910년 경술국치(한일합병)으로 나라가 망하자 한영학교를 숙부에게 맡기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신학교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이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학교였다. 방학 때는 전북 군산의 영명학교의 임시교원으로 근무하고, 서천군 화양면 완포리에 교회를 세워 장로로 일했다.



191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목사안수를 받고, 1915년 전북 전주의 서문 밖 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경재는 1919년 군산과 전주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3월 5일 시작된 군산 영명학교 만세운동은 전북 최초의 만세운동으로 5월까지 28차례 3만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전주 만세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계가 합세하여 벌였다. 3월 13일 전주 남문 밖 장터에서 시작된 시위는 4월초까지 계속됐다. 경재는 교회 목사로 시무하며 미션학교인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참여를 이끌었다. 경재는 군산과 전주의 만세운동으로 일제의 표적이 되자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경재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 독립운동을 계속한다. 동제사 단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한청년당에 가입, 재무부장을 맡았다. 임시정부에 참여, 재무부 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을 맡아 독립운동자금 마련에 힘썼다. 1920년에는 임시의정원(국회) 의원으로 재무위와 예산위, 정무조사특별위에서 활동했다. 이듬해 4월 임시의정원 부의장, 5월에는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맡았다.
상하이 교민 자녀 교육을 위한 교과서를 편찬하고, 초등교육기관인 인성학교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유지회장, 1922년 9월에는 교장을 담당했다.
1921년 11월-22년 2월 미국 워싱턴회의에 참가하는 대표단(전권대사 이승만)을 돕기 위한 후원회의 재무서기를 맡아 모금운동을 벌였다.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외교후원회의 대(對)태평양회의 선언서와 한국독립 청원서에 서명했다. 목사 출신 손정도 송병조 등과 대한야소교(예수교)진정회를 조직, 각국의 정부와 기독교계에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보냈다.





태평양회의가 성과 없이 끝나자 외교를 통한 독립에 매달렸던 항일운동가들은 무장 독립투쟁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경재는 김구 여운형 양기하 박은식 손정도 등과 일하면서 군인이 되는 노병일치를 내세우며 한국노병회를 창립했다. 노병회는 10년 이내 1만 명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기 위해 100만원 이상의 자금 조성을 추진했다. 경재는 노병회 이사 겸 경리부원을 맡아 일했다.
1922년 2월 제10회 임시의정원의 전원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4월에는 의정원의 제4대 의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임시정부는 태평양회의에서 아무 성과를 못 거두자 이승만에 대한 불신이 고조되고 기능이 마비되면서 내분에 휩싸인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국내외 다양한 세력과 지역·단체 대표를 담도록 조직을 개편하고 운동노선도 새롭게 설정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결과 1923년 1월 국민대표회가 출범했고 김인전은 전북 대표로 참가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는 극심한 분열상을 보였고, 경재는 여러 세력의 단합과 새로운 투쟁 방향을 모색하는 데 힘쓰다 갑자기 쓰러지고 만다.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5월 12일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임시정부가 장례를 주관,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외인묘지에 안장했다.
충북 청주 출신의 은재 선석구 목사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일장기 게양을 반대하여 투옥되는 등 평생 항일의 길을 걸었다.



은재는 1875년 충북 청주시 미원면에서 태어났다. 15살 때 아버지와 할머니의 죽음으로 방랑 생활을 했으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고향에 서당을 차려 동네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1901년 고향 친구 김진우의 부탁으로 전당포 사업에 참여했지만 5년 만에 파산했다. 은재는 횡령 혐의로 구속 위기에 처한 친구를 대신하여 3개월간 옥살이를 한 뒤 1906년 말 고향을 떠났다.

상경하여 종5품 벼슬을 지낸 윤자정의 자제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던 중 기족교로 개종한 친구 김진우를 다시 만났다. 은재는 김진우와의 인연으로 기독교에 입문한다. 김진우의 초청으로 경기도 연천의 고랑포에 갔다가 고랑포교회 교인들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청주 회인 출신의 동갑내기 전도사 정춘수를 만나 개성으로 거처를 옮긴다. 은재는 1908년 3월 개성남부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909년 2월 개성 북부교회 권사가 되어 강원도 홍천읍교회, 가평구역 담임, 춘천지방 순행 전도사로 일하다 1917년 9월에는 집사목사를 안수받기에 이른다.


은재는 1918년 10월 감리교 연회에서 서울 수표교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되면서 인생의 중대한 전기를 맞는다. 오화영 목사로부터 3.1 만세운동의 민족대표로 참여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은재는 기독교 목사로서 천도교와 연대하고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게 합당한지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2월 27일 새벽에 참여하기로 결단했다.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28인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가진 뒤 일경에 연행됐다. 뒤늦게 만세운동에 서명했지만 의지는 누구보다 강했다. 일제가 심문에서 "조선이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고 묻자 "그렇다. 될 줄로 생각한다."고 답했고, "장래에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는 질문에 "그렇다. 나는 한일합방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 할 생각이다."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은재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뒤 원산 중앙교회를 담임했으며 1922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연회에서 장로목사 안수를 받기에 이른다. 고성과 가평 철원 이천 천안의 교회에서 담임했다.
은재는 기독교계 비밀 항일결사단체 흥업구락부에 가입, 활동하다 다시 한번 고초를 겪는다. 1938년 일제가 54명을 체포했는데 은재도 천안경찰서에 2개월 구금돼 조사를 받았다. 1945년에는 교회에 전승을 기원하는 일장기 게양을 거부했다가 용강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은재는 광복으로 감옥을 나온 뒤 북한에 남아 목회를 계속했다. 그러나 공산당정권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1946년 3·1절 기념방송 사건과 서부연회 재건, 기독교민주당 및 기독교자유당 사건 등을 이유로 수차례 조사를 벌였다. 1949년에는 '진남포 4.19사건'으로 불리는 반공 비밀결사운동의 배후로 지목, 10년형을 선고했다. 은재는 평양인민교화소에 갇혔다가 1950년 10월, UN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직전, 퇴각하는 공산군에 의해 처형당한다. 엄혹한 시대 민족주의자와 종교인으로서 일제와 공산정권에 전혀 굽히지 않는, 꼿꼿한 삶으로 일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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