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고려시대 재테크 - 전당과 부동산
지금 현실과 뭐가 다른가
정은정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
핀테크(Financial Technique), 동학개미·서학개미·중학개미, 갭 투자와 다주택 논쟁까지…. 결국 크든 작든, 옳든 그르든 부동산 소유는 모두 재테크의 한 갈래다. 한국 사회에서 재화 축적의 으뜸이 집이라는 사실은 더 이상 부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집값 안정화는 언제나 어렵고 까다로운 과제다. 대통령조차 “수도권 집값 때문에 욕을 많이 먹는데, 보니 뾰족한 대책이 없다”고 토로했을 정도다. 지역 균형 발전을 통한 장기적 해결이라는 맥락이었겠지만, 그만큼 이 문제가 쉽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한국의 부동산, 전월세 문제가 21세기의 새로운 현상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는 훨씬 깊다. 전세는 오직 한국에만 존재하는 특유의 제도다. 본격적인 형태는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과 인구 급증이 맞물리면서 만들어졌다. 부산·인천·원산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고 농촌 인구가 서울로 대거 이동하자 주택은 부족해졌다. 이때 집값의 50%, 많게는 70~80%를 내고 거주하는 임대차 형태가 자리 잡았다.
전세의 기원을 고려의 전당(典當) 제도에서 찾기도 한다. 전당은 ‘고려사’ 식화지 차대조에서 처음 보이는데, 민간 소액 금융이자 고려 사람들의 주거 이동, 가계 빚, 사회경제적 변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저당 잡히는 물건은 옷과 생활용품 같은 사소한 것부터, 때로는 노비나 심지어 자녀까지 포함됐다.
집안에 당장 쌀이 떨어지면 옷 한 벌을 맡기고, 자녀의 학비가 부족하면 다시 생활품을 전당 잡히는 식이었다. 1206년 고려 관료 이규보는 갖옷을 맡기고 좁쌀 한 말을 얻었고, 전당업자는 “여름에 갖옷이 무슨 소용이냐”고 핀잔을 주었다. 친구 전이지가 찾아왔을 때도 이규보는 ‘남루한 옷을 맡기고 술 한 병으로 바꿔왔다’고 읊조렸다. 제안 군부인 황보 씨는 아들의 공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의복을 전당 잡혔다. 남편이 여러 고을의 지방관을 지낸 중급 관료였음에도 필요할 때는 사금융에 의존해야 했던 것이다. 고려의 전당은 바로 이런 일상의 틈새에서 민중과 관인을 지탱하는 금융망이었다.
고려 전기까지 전당은 민간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원 간섭기에 접어들며 액수가 커지고 이자가 높아지자 국가는 이 경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충숙왕 때 의주에 설치된 해전고는 사실상의 ‘국가 전당포’로, 담보 대출뿐만 아니라 왕실 사찰 운영을 위한 식리 기관 역할까지 겸했다. 공판도감과 보원고 역시 비슷한 기능을 했다. 고려 후기에는 국가 재정이 민간 금융 구조에 깊숙이 얽혔었다.
전당 제도는 주택 매매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고려에서 토지는 국가 소유였지만 가옥은 사유재산이었다. 사람들은 집을 사고팔며, 정치·경제 사정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사하거나 매각했다. 상업 중심지인 십자가·남대가 일대의 시전 행랑, 수공업 지역인 영통동·면주동 등은 전당과 가옥 거래가 활발했다. 시장 인근 주거는 경제적 이익을 보장했기에 관료들 역시 그 주변 거주를 선호했다. 자연히 그곳은 높은 가격대가 형성되었고, 조용한 자하동이나 권력 핵심부와 가까운 ‘정승동’은 고급 택지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의 ‘강남 프리미엄’이나 핵심 역세권과 다르지 않다.
물론 고려시대 주택 거래가 공정했던 것은 아니다. 권력층은 거래의 외양을 유지하면서도 사실상 저가 판매를 강요했다. 정존실이 붉은 가죽띠를 만드는 기술자 언광의 집을 계약가의 60%만 지급하고 차지하기도 했다.
전당의 비중이 커질수록 담보는 무거워졌다. 후기에는 전당 자녀, 전당 노비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노비 저당 행위는 ‘고려사’ 형법지의 ‘노비 편목’으로 별도 규정될 만큼 광범위했고, 국가는 자모정식에 따라 원금과 이자가 같아지면 추가 이자 수취를 금지했지만, 실제 이율은 훨씬 높았다. 공양왕 때 공판도감의 이식은 무려 10배였다.
전당과 주택 매매는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실은 고려 민중의 생존을 떠받친 두 축이었다. 전당은 일상의 급전을 해결하는 금융망이었고, 가옥 매매는 신분·경제·정치가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전당과 가옥 매매는 고려인의 생존과 욕망, 일상의 경제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창이었다.
문제는 시장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얹힌 국가 정책의 실패가 불평등을 키웠다는 데 있다. 오늘날의 젠트리피케이션처럼, 권력층이 ‘목 좋은 곳’을 차지하자 민중은 외곽으로 밀려났다. 공·사 금융의 불균형 속에서 가난한 자는 원금의 절반 이상을 이자로 내야 했고, 심지어는 신체나 자식을 저당 잡히는 위험까지 감수했다.

정책 실패가 누적되면 시장은 스스로 생존 방식을 택한다. 부동산 편중, 이주 경쟁, 자산 불평등…. 천 년 전 고려와 오늘의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고려의 경제 정책 실패를 되풀이하고 있지 않은가. 그 소박한 질문을 조심스레 다시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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