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지를 위해 기꺼이 나를 부술게 [비장의 무비]

김세윤 2025. 12. 10.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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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감독: 이상일
출연: 요시자와 료, 요코하마 류세이, 와타나베 켄

〈패왕별희〉(1993)에 사로잡힌 학생이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나도 이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라는 욕망이 작은 씨앗처럼 마음에 내려앉았다. 운 좋은 씨앗이었다. 많은 사람이 같은 씨앗을 품었지만 기어이 싹을 틔워낸 건 그의 비옥한 마음뿐이니까. 30년 동안 키우고 가꾸어 “미치도록 간절하고 아름다운(영화평론가 박평식)” 영화 〈국보〉를 피워냈으니까.

이상일 감독이 심어놓은 꿈에 〈악인〉과 〈분노〉의 원작자 요시다 슈이치가 물을 주었다. 3년 동안 가부키 무대를 직접 경험하며 쓴 소설 〈국보〉(2018)를 머금고 6년 동안 영화 〈국보〉의 이야기가 자랐다. 두 주인공 기쿠오(요시자와 료)와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를 연기한 젊은 배우들이 태양처럼 이글거리며 영화에 생기를 더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찍은 튀르키예 여성 촬영감독 소피안 엘 파니가 바람처럼 모든 장면을 흔들고,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 〈킬 빌〉의 미술감독 다네다 요헤이가 이끼처럼 매 순간을 감싼다.

〈패왕별희〉가 씨앗이지만 〈패왕별희〉와 전혀 다른 열매를 맺는 영화다. 경극을 닮은 가부키에서 장궈룽(장국영)의 우희를 떠올리게 하는 온나가타(가부키에서 여성 역할을 하는 남자 배우)를 만나는데도 이상하게 〈패왕별희〉 생각이 나질 않았다. ‘역사의 격랑에 휩쓸린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끝까지 몰아세워 인간의 야망과 허망을 피처럼 토해내는 주인공’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패왕별희〉를 보고 나서 내가 더 알고 싶은 건 경극과 중국의 역사였다. 〈국보〉를 보고 나서 지금 내가 더 알고 싶은 건 가부키의 세계가 아니다. 인간이다. 어떤 경지에 이를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거래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종(種)의 그 까마득한 마음이 자꾸 더 궁금해진다. 그러므로 이상일 감독이 만든 건 ‘또 하나의 〈패왕별희〉’가 아닐 것이다. 또 한 편의 “정말 아름다운 영화”일 뿐.

“제가 시골에서 학교 다닐 때 논길을 혼자 걷던 어느 날이었어요. 비가 갠 아침에 햇빛이 비치고 흙에서 김 같은 게 올라오고 공기에서 나는 냄새와 온도까지 이상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있었죠. 매일 보던 길인데 그날만은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져 그냥 멈춰 서서 울었던 기억이 있어요. 이성으로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그냥 마음을 세게 흔드는 풍경이었습니다. 기쿠오가 평생 찾아 헤매는 (궁극의 예술을 성취한 자만이 보게 될) 풍경도, 어쩌면 그런 종류의 감각에 가까운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나카무라 유키 인터뷰, 인터넷 커뮤니티 ‘익스트림 무비’에서 인용).”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오르는 마지막 장면의 조명을 그렇게 설계했노라고, 〈국보〉의 조명기사는 말했다. 그 엔딩에 담긴 마지막 대사가 극장을 나서며 내 입에서 나온 첫마디가 되었다. “참으로 아름답구나.” 얼핏 보면 별것 아닌 통속극의 이야기일지 몰라도, ‘그날만은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져 그냥 멈춰 서서 울었던 기억’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 ‘이성으로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그냥 마음을 세게 흔드는 풍경’을 만나러 가는 곳이 바로 극장이란 걸, 새삼 깨닫게 하는 영화였다. 오랜만에 만끽하는 시.네.마.의 정수였다.

상영 시간 175분. 어떤 이는 ‘장벽’으로 느끼겠지만 또 다른 이에겐 ‘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장벽을 타 넘는 건 고행이지만 다리를 건너는 건 여행이다. 감독의 말처럼 “반드시 시간을 견뎌야만 체험되는 충격”이란 게 있다. 적게 투자해서 많이 돌려받는 게 성공한 투자라면, 고작(!) 나의 세 시간을 투자해서 누군가의 평생이 담긴 이야기를 돌려받는 〈국보〉 앞에서 망설일 이유가 있을까.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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