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와 만드는 내일, 이정현

김지은 기자 2025. 12. 9.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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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멀티테이너인 이정현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열정적인 사람이다. 그녀는 딸 서아와 함께 있을 때 더욱 빛났다. 
사진 이대원, 이정현 슈트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서아 원피스 봉쁘앙

[우먼센스] 배우 이정현은 '원조 멀티테이너'라는 타이틀과 함께 대한민국 대중문화에 자신의 이름을 깊게 새겼다. 연기와 음악, 요리, 감독, 작가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삶은 늘 경계를 넘나들고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영화 <꽃잎>(1996)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으며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녀는 이후 '테크노 여전사'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와', '바꿔', '미쳐' 등의 히트곡을 만들었다. 남들과 다른 색과 메시지를 주는 이정현의 무대는 늘 새로운 시도와 창조적인 퍼포먼스의 장이었다. 가수로 확고한 입지를 다진 그녀는 다시 배우로 돌아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를 통해 제 36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가수로서 확고한 위치를 정립하고, 배우로서 끊임없이 새로운 캐릭터에 도전한 그녀는 결혼 후엔 또 다른 무대에 올랐다. KBS 예능 <편스토랑>에서 갖가지 건강 레시피를 공유하며 수준급 요리 실력을 드러냈고, 영화감독을 꿈꾸며 대학원에 진학해 창작 쪽으로 시야를 넓혔다. 최근엔 그림책 <몽글몽글 숲속 요리사>를 출간해 작가로 데뷔했다. 울창한 녹나무 숲 한가운데 강아지 '토리'와 사는 여자아이 '서아'가 아픈 고양이를 발견하고 따뜻한 밤 수프를 만들어 주며 돌보는 내용이다. 배우, 가수, 연출 감독, 요리사, 그림책 작가까지. 하고 싶은 일은 정성껏 해내는 사람 이정현을 만났다. 첫째 딸 서아와 함께 있는 그녀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촬영 현장에서 본 서아는 무대체질이에요. 엄마의 끼를 그대로 물려받은 걸까요?
집에서도 포즈를 제안하고 끼가 많아요. 이제 말을 하니까 대화를 자주 하는데 엄마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해요. 같이 현장에 가면 신기해하면서 엄마가 일하는 모습 보는 걸 좋아해요. KBS2 예능 <편스토랑> 녹화 날 방송국에 구경 가는 걸 좋아하고, 작가 이모들이 예뻐해 주면 더 신나해요.

자녀랑 대화가 되면 또 새로운 세계가 열리죠. 대화하는 재미도 있고요. 
서아와 대화가 통하니까 알콩달콩 대화하는 시간이 늘었어요. 제가 위로받기도 하고요. 제 꿈 중 하나가 딸과 함께 가는 여행이었어요. 최근에 출장으로 홍콩에 갔는데, 서아와 단 둘이 이틀을 보냈어요. 남편은 주말에 합류했고요. 처음엔 걱정했는데 정말 좋았어요. 서아도 좋았다며 또 출장을 가고 싶대요. 

둘째 서우 이야기도 해주세요. '막내 마력'이 대단하다고요.
정말 귀여워요.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어도 둘째를 보면 다 풀려요. 서아는 잘 먹는 타입이 아니라 이유식을 먹이면 1시간씩 걸렸는데 서우는 잘 먹는 타입이라 10분이면 다 먹어요. 그래서 육아 템포도 달라지더라고요. 성장도 빠르고요. 하루 컨디션이 아이들 밥 먹는데 달려 있잖아요. "오늘은 밥을 잘 먹었나?"가 아침 체크리스트예요.(웃음)

그래서 요리에 더 관심이 깊어졌나요? 서우를 더 잘 먹이려고요.
요리는 원래 좋아했는데 아이를 키우며 재료에 더 신경 쓰게 됐죠. 될 수 있으면 유기농 재료를 더 사용하려고 하고요. 이제 서아는 많이 커서 밥을 먹어요. 서우는 언니랑 똑같은 밥을 달라고 하는데, 경쟁하는 모습이 귀여워요. 

집에서는 어떤 놀이를 즐겨요?
우리 집은 '댄스 타임'이 있어요.(웃음) 매일 1시간~1시간 30분 정도 음악을 틀어 놓고 첫째, 둘째가 함께 춤춰요.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하더라고요. 서아가 걷기 전부터 책을 펴서 봐서 책을 많이 읽어줬어요. 전통 동화 같은 것도 좋아하고요. 저는 아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경험하게 하는 편이에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하면 스케치북 대신에 전지를 깔아두고 "그리고 싶은 걸 다 그려"라고 하죠.

서아가 연예인이 된다고 하면 어떨 거 같아요?
처음엔 반대했는데 부모가 제지한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서아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걸 찾도록 도와야죠. 춤·음악이 좋다면 그 길을, 공부가 좋다면 그 길을. 엄마와 아빠의 역할은 아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다양한 경험을 열어주고, 지지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직접 각본과 연출을 맡은 단편영화 <꽃놀이 간다>를 선보였습니다.
팬데믹 때 영화 촬영 일정이 밀리며 시간이 생겼어요. 학부 전공이 연출이라 다시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적절한 시기였죠. 영상대학원에 들어가서 쓴 첫 작품이 <꽃놀이 간다>예요. 

기획의 시작이 '창신동 모자 고독사 사건'이라고요.
복지 사각지대의 비극에 저의 경험을 녹였어요. 저희 어머니가 암 투병으로 치료를 받을 때 꽃놀이를 가고 싶어 하셨는데. 저는 엄마의 치료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병원에 데려갔었거든요. 어머니가 더 오래 사시길 바랐던 건데 그때 엄마는 많이 속상해하셨던 것 같아요. 저의 경험을 더해서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 꽃놀이를 보내주고 싶어 하는 자식의 마음을 영화에 담았어요.

연출자로서 제작해보니까 어땠나요?
예산이 아주 적어서 제작·연출·주연·막내 일까지 '1인 다역'을 했어요. 현장에선 NG를 낼 여유도 없어서 한 번에 'OK'를 받아야 했어요. 그래서 아쉬움이 있지만 졸업 작품을 마무리했다는 보람도 커요. 다음엔 조금 더 풍족한 환경에서 상업영화도 해보고 싶어요. 스릴러·공포처럼 장르적 쾌감이 있는 작품에 도전하고 싶고요.
 

"기대하지 말고 과정을 즐기자"

사진 이대원, 원피스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슈즈 컨버스

지난 10월 <불후의 명곡>에서 보여준 무대가 화제를 모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출연 제안이 있었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요. 둘째를 낳고 나서야 준비가 됐다는 느낌이 들어서 용기를 냈죠. 

출연을 결심하고 심경은 어땠어요?
걱정했죠. "과연 팬분들이 찾아와 주실까? 관객석이 비면 어떡하지?"라는 생각했는데 관객석이 모자랐다는 얘기를 듣고 울컥했어요. 중·고등학생 때 저를 좋아했던 분들이 어른이 되어 와주셨다는 게 너무 뭉클했고 더 열심히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직접 보여주신 무대는 감탄 그 자체였습니다.
직접 동대문에 가서 의상이나 소품을 찾고 노래와 안무를 연습하고 노력했어요. 방송이 된 후 예전에 함께 일했던 스태프들이 "너무 잘 봤어요"라면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연기와 무대가 모두 가능한 멀티 엔터테이너입니다. 두 세계는 어떻게 달라요?
연기는 촬영·편집을 거쳐 1년쯤 후에 관객의 반응이 나오니까 차분하고 여운이 길어요. 반면 무대는 즉각적인 환호가 주는 시원함이 있어요. 다만 감정의 지속 시간이 짧아 허무할 때도 있고요. 둘 다 장점과 단점이 뚜렷해요. 그래서 저에겐 두 세계가 서로 환기이자 보완재예요.

배우에서 가수로, 다시 배우로 활동했어요. 당시 어떤 마음으로 전환점을 맞이했나요?
고민하지 않았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하자고 생각했죠. 제 생각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웃음) 그래서 결과는 기대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즐겁게 하자는 마인드를 갖고 살았어요. 좋아하니까 오래 버티며 할 수 있고, 버티다 보면 행운의 타이밍이 와요. 

"과정을 즐기자"는 마인드를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대 초반에 가수로 늘 1위를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제 노래가 순위권에도 못 들었어요. 굉장히 좌절했고 슬럼프가 왔죠. 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마음으로 "기대하지 말자"고 생각하는 연습을 했어요. 열심히 해서 잘 되면 고맙고 안되면 다른 걸 찾자고 생각했죠. 내가 열심히 해서 좋으면 그만이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니까 상처를 덜 받아요.

그러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로 청룡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배우로 전향하고 급하게 움직였어요. 스스로 작품을 찾으려고 독립영화부터 두드렸어요. 사실 개봉도 장담되지 않는 작품이었는데 영화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운이 좋게 배급사가 생긴 거예요. 행운이었죠. 계속 움직였던 제 노력에 타이밍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어요. 저는 청룡영화상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제 이름이 호명되니까 너무 놀라서 숨고 싶었어요. 수상자로 제 이름을 듣고 "제가 상을 받아도 돼요? 일어나도 돼요?"라고 생각했죠. 

그 과정에서 가장 힘이 됐던 존재는 누구인가요?
박찬욱 감독님이요. 감독님의 단편영화 <파란만장>에서 인연을 맺었어요. 당시 영화 촬영에 급히 투입됐던 저를 믿어주신 분이 감독님이었고, 영화가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은 뒤에 데뷔작인 <꽃잎> DVD를 직접 구워서 10장이나 주시면서 "넌 좋은 배우다. 계속 배우를 하라"며 자신감을 채워주시고 응원해주셨어요. 매니지먼트에서 커트됐던 독립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시나리오를 제게 보낸 것도 감독님이었어요. 그렇게 꾸준히 힘이 되어 주신 게 저에겐 큰 원동력이었죠. 
 

"좋은 엄마, 좋아하는 일하는 사람 되고파"

사진 이대원 원피스 봉쁘앙

엄마 이정현의 훈육 철학이 궁금합니다.
혼내는 대신 공감하게 해요. "네가 이렇게 하면 상대는 이런 마음이 될 거야"라면서 제가 상대가 되어 연기를 하죠. 아이들은 상황을 이해하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더라고요. 아이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엄마가 되려고 해요. 엄마가 되고 엄마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어요. 모유수유를 하면서 잠을 못 자고 하니까 우울감이 스쳤는데 그때 우리 엄마가 떠올랐어요. 엄마는 딸들을 모두 모유를 먹였고 집안일을 하면서 살림까지 했잖아요. 너무 대단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저의 가장 큰 소망은 좋은 엄마가 되는 거예요. 얼굴은 조금만 늙고 싶고요.(웃음)

남편 이야기도 살짝 들려주세요.
남편은 공부하며 자란 사람이라 공부밖에 몰라요.(웃음) 그래서 서아에게 책을 보여주려고 하는데 저는 반대죠. 만약에 서아가 춤을 추고 싶다고 하면 하루 종일 음악 틀어 춤추게 하는 스타일이라 가끔 부딪히죠. 또 남편이 서아의 양치를 안해놓고 했다고 거짓말할 때는 투닥거리기도 하고요. 평범한 부부예요. 

부모가 되고서 달라진 점도 있나요?
예전보다 시각이 넓어지고 이해심도 깊어진 것 같아요. 예전엔 안맞는 사람을 바꾸려 애썼다면 이제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입장이 됐어요. 그래도 많이 안 맞으면 피하고요.(웃음) 또 예전엔 인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사람 관계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지나고보니 인맥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건 인맥 덕이 아니더라고요. 노력하는 운의 합이었죠.

요즘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이에요?
일이 안 풀리면 아이한테 집중해요. 같이 간식 만들고 책 읽으면 그 하루가 보람으로 꽉 차요. 그게 다음 날을 견디게 해주는 에너지예요.

요리 책도 곧 출간된다고요. 서아와 함께하는 '요리 그림책'이라던데요.
서아가 요리를 너무 좋아해요. 특히 고구마 파이요. 예를 들어 전자레인지로 만드는 과자처럼 아이들이 집에서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레시피를 넣었어요. 예쁜 교훈도 살짝 넣었고요. 책 인세 전액은 어린이 병원에 기부할 예정이에요. 서아에게도 보여주니 토끼 머리띠를 쓰고 "또 보여달라"고 할 정도로 좋아하더라고요. 

10년 뒤, 어떤 사람이고 싶나요?
좋은 엄마. 그리고 여전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요. 배우·가수·감독 어느 옷을 입고 있든 스스로 즐겁게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스스로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CREDIT INFO

포토 이대원

헤어 소라(순수)

메이크업 최수경(순수)

스타일링 김이주

김지은 기자 a051903@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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