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의 명목을 찾아서(30)아버지의 자식 사랑 품은 성주 한개마을 교리댁 파초(芭蕉)와 탱자나무

경북 성주군 월항면 한개2길 23-12(대산리 420) 속칭 한개마을에는 경상북도 민속 문화유산 '교리댁'이 있다.
안채는 중앙에 대청이 있고 대청 양쪽에 방이 있으며, 동쪽에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왼쪽 대청은 문을 달아서 자유롭게 여닫을 수 있게 하였다. 동쪽에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으며 뒷간, 다락 등이 있어 구성이 특이하다. 중문간은 중문과 사랑채 사이 공간에 담을 쌓아 내·외 담을 만든 것이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각 건물이 독립해 있는 것은 경상북도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출처, 국가유산청 일부 첨삭)

그러나 앞서 동계가 교리이기 때문에 교리댁이라 했다는 국가유산청의 해석은 잘못되었다. 동계가 교리를 지낸 것이 아니라, 현손 포석(蒲石) 이귀상(李龜相 1829~1890)이 홍문관 교리를 지냈기 때문에 교리댁으로 불린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국학자료목록집』 68호, 2020년)
처음 집을 지은 동계는 벼슬이 종3품 집의다. 그런데도 굳이 정5품인 교리댁(校理宅)을 고집하는 이유는 교리가 비록 벼슬이 낮아도 국왕을 가깝게 보좌하는 자리이자 많은 관리 중에서도 학문과 인품이 훌륭하고, 당색(黨色)이 엷은 사람이 선발되는 명예로운 자리라는 데서 긍지를 느끼기 때문으로 보인다.
포석 이귀상은 본관이 성산으로 조선 후기 공조판서를 지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2)의 맏이 이정상(李鼎相), 둘째 이기상(李驥相)에 이어 3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응와의 10촌 아우 포와(浦窩) 이원규(1800~1833)가 후사를 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포와의 아내 순천박씨가 간청하고, 생모 풍양조씨도 동의하여 예조(禮曹)의 승인을 받아서 양자로 보냈다. 이 예조의 허락 문서 입안(立案)은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이후 생부의 후원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1882년(고종 1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했다.

한개마을은 세종조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李友)가 터를 잡은 후 문과 급제자 10명, 무과 2명, 생원·진사 30등 무려 42명의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이다.
포석은 성균관 전적, 교리, 부수찬 등을 거쳐 1885년(고종 22)에 동학 교수가 되었고, 1890년(고종 27)에 장령(掌令)에 제수되었으나 지병으로 사망하였으며 유고(遺稿) 1권을 남겼다.
교리댁 정원은 여느 양반집과 달리 소박하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한 풀과 나무가 있으니, 파초와 탱자나무다.
사랑채 앞에는 파초가 무성하여 고풍스러운 집과 잘 아울린다. 파초는 풀 중에서 잎이 가장 커서 초왕(草王)으로도 불린다. 특히, 호학(好學) 군주 정조(正祖, 1752~1800)가 좋아해서 그가 그린 파초도(芭蕉圖)는 현재 보물로 지정되었다. 따라서 당시 사대부들은 파초 키우기를 즐겼다.
조선의 최고 교육 기관 성균관에도 있었다. 이때 포석의 조부 이희진(李禧鎭, 1768~1825)이 1807년(순조 7)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유학할 때 가져와서 심은 것이라고 한다(구시와, 한국국학진흥원, 2020).
또한, 탱자나무는 생부 이원조가 제주 목사(1841~1843)로 근무할 때 귤나무 3그루를 가져와 아들 3 형제에게 각기 한 그루씩 선물로 주었다. 육지에서 볼 수 없는 신기한 나무이고 새콤달콤한 귤 맛이 아들들이 좋아할 것 같아 선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열대 지방인 제주도와 온대 남부 지방인 성주는 기후가 다르다. 특히 겨울엔 더 차이가 난다. 결국 맏이와 둘째 아들 나무는 죽고 막내 포석의 귤나무도 줄기는 죽되 대목(臺木)으로 쓴 탱자나무만 살아남아 지금까지 교리댁을 지키며 해마다 많은 열매가 열린다. 사과나무를 잘 키우기 위해 아그배나무를 대목으로 쓰듯이 귤나무는 탱자나무를 쓴다. 즉 교리 댁의 탱자나무는 귤나무 대목이 자란 것이다.

이정웅 사)대구생명의숲 이사장, 전 대구시 녹지과장
Copyright © 대구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