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있는 지리산 둘레길] 제8구간 운리~덕산(하)

knnews 2025. 12. 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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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직구 선비 남명, 지리산 기개를 품었구나 마근담계곡 끝자락 사리마을 덕산 산천재 조식 선생 12년간 머물며 사상·학문 완성

◇영원한 처사, 남명 조식(南冥 曺植)

지리산둘레길 제8구간의 날머리는 마근담계곡의 끝자락인 사리마을이다. 그곳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확고한 사상이 묻어있는 산천재가 있다. 조선 중기의 거유, 남명은 그곳에서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고 실천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했다.

남명 조식은 1501년 삼가현 토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부친을 따라 한양으로 이주해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다. 26세에 부친의 별세로 고향인 삼가에서 삼년상을 치르고 30세 되던 해 처가가 있는 김해로 이주했다. 45세에 모친의 별세로 다시 삼가에서 삼년상을 치른 후 아예 삼가에 자리 잡았다. 회갑인 61세에 이르러 지리산 깊숙한 곳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강학하게 되는데, 72세 사망할 때까지의 12년은 학문을 완성하고 실천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근담계곡의 끝자락인 사리마을에 있는 산천재. 그 뒤로 천왕봉이 보인다. 남명은 61세에 이르러 지리산 깊숙한 곳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72세 사망 때까지 학문을 완성하고 실천했다./사진작가 각로 박혜란/

마근담계곡의 끝자락인 사리마을에 있는 산천재. 그 뒤로 천왕봉이 보인다. 남명은 61세에 이르러 지리산 깊숙한 곳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72세 사망 때까지 학문을 완성하고 실천했다./사진작가 각로 박혜란/

38세 때 중종으로부터 벼슬에 제수됐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명종·선조 때까지 삼조에 걸쳐 10여 차례 제수받은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산림처사로 학문을 궁구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머물러 있는 이론적 학문이 아닌 실행에 중점을 두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의 사상을 집약하면 경(敬)과 의(義)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군자는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敬以直內), 의로써 행동을 반듯하게 해야 한다(義以方外).’ 주역의 문언전(文言傳)에 나오는 경구다. 이를 남명은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이 경이요(內明者敬),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外斷者義)’라고 하면서 평소 지니고 있던 칼자루에 이 글귀를 새기고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는 직설적이고 거침없었다. 죽음을 각오하며 저항하고, 구차하게 복종하지 않은 것이 평생의 장점이라 스스로를 평가하기도 했다.

그의 나이 55세 때 단성 현감으로 제수됐으나 고사하면서 올린 ‘단성소’에서 나라의 정사가 잘못됐다고 명종을 질책하면서 “자전께서 생각이 깊으시다고 해도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일 뿐이고, 전하께서는 나이 어린 선왕의 고아일 뿐입니다. 천 가지, 백 가지나 되는 천재, 억만 갈래의 인심을 대체 무엇으로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하시렵니까?”라고 하면서 문정왕후를 과부, 명종을 고아라고 무엄한 돌직구를 날렸다. 남명에게 있어서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임금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렇다. 그는 꼿꼿한 선비, 영원한 처사였다.
덕산 산천재.

덕산 산천재.

◇남명의 지리산-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

남명은 61세 때 자신의 마지막 거처인 지리산 자락 덕산에 자리 잡게 됐다.

덕산 산천재는 남명 사상의 본산지이지만 그가 이곳에 정주한 기간은 12년에 불과했다. 30세부터 45세까지 김해 산해정의 16년, 48세부터 61세까지 삼가 뇌룡정의 14년에 비하면 짧은 세월이었다. 그리고 인생의 황금기인 중장년을 산해정과 뇌룡정에서 보낸 후 황혼의 노년에 이르러서야 산천재에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산 산천재의 12년이 그의 인생과 사상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생애의 가장 중심적인 축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58세 때 12번째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쓴 ‘유두류록’에서 지리산 자락에 터 잡고 일생을 마칠 장소로 삼으려는 것이 평생 계획이었다고 하면서 “그러나 일이 마음과 어긋나서 머무를 수 없음을 알고 배회하고 돌아보며 눈물 흘리며 나오곤 하였으니, 이렇게 했던 것이 무려 열 번이나 되었다”라고 실토했다. 그 3년 후, 남명은 드디어 평생 염원이었던 지리산 자락에 터 잡게 됐다.

‘봄 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이 없겠는가마는/ 천왕봉이 상제 있는 곳에 가까운 것을 사랑하기 때문/ 맨손으로 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은하 같은 저 십 리 물 아무리 떠 마셔도 오히려 남으리.’

그는 ‘덕산복거(德山卜居)’라는 이 시에서 먹을 것을 걱정할 정도의 빈한한 형편이지만 평생을 갈구하던 염원을 이루었다는 자족감에 즐거이 안빈낙도를 노래했다.

그리고 또 다른 대표 시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에서 남명은 자신의 흉금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청컨대 천석종(千石鐘)을 보시오/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오/ 어찌하면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天鳴猶不鳴)?’

그렇다. 남명의 평생 소원은 단순히 지리산 자락에 터 잡고 사는 것에 안주했던 것이 아니었다. 진정 지리산을 닮고자 했다. 지리산을 ‘거대한 종(千石鐘)’으로 여기고 그 지리산이 되고자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완성한 곳이 덕산의 산천재였다.

그리하여 그의 인생과 사상이 이곳에서 결실을 보게 됐고, 그를 지리산과 분리해 평가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천석종 같은 지리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결코 울지 않는 지리산인으로 영원히 남게 된 것이다. 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
우암 송시열이 지은 남명 신도비.

우암 송시열이 지은 남명 신도비.

◇신도비(神道碑)의 수난

남명은 조선조 내내 그 사상과 행적이 폄하됐다. 수난의 세월이었다. 남명과 함께 영남학파의 쌍벽을 이루었던 퇴계 이황이 존숭을 받고 그의 문인들이 득세했던 것과 대비된다. 남명이 수난당한 것이 또 있다. 그것은 남명의 사적을 기리는 신도비였다.

신도비란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해 묘 입구에 세운 비석을 말하는데, 남명의 그것은 여느 인물과 달리 세 개나 존재한다. 내암 정인홍, 미수 허목,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가 그것이다. 첫 번째 신도비는 제자 정인홍이 세웠다. 인조반정으로 정인홍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자 죄인이 지은 신도비를 둘 수 없다고 해 즉시 없애버렸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다시 당대 명사들의 글을 구했다.

남인의 영수인 미수 허목과 서인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에게 청문했는데, 어쩌다 두 사람의 글을 동시에 받게 됐다. 남인과 노론의 영수가 지은 신도비를 함께 세울 수 없어 두 번째의 신도비는 미수가 지은 것을 세웠다. 다만 우암이 지은 신도비문은 남명의 고향인 삼가에 세우기로 했다.

이후 남인들이 득세하고 북인인 남명의 후학들이 더 심하게 배척을 당하게 되면서, 미수가 지은 신도비의 내용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남명의 후학과 후손들은 급기야 미수의 비를 넘겨 버렸다. 그리고 우암의 비를 덕산에 세우게 되는데 그것이 세 번째의 신도비였다.

이에 진주향교를 중심으로 한 남인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신도비를 훼철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므로 원상 복구하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덕산의 조씨 문중은 미수가 지은 비문의 내용에 남명 선생을 비하하는 내용이 들어있어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결과적으로 1차, 2차 소송에서는 남인이 이겼지만, 최종심에서는 조씨 문중이 이겼다. 결국 미수가 지은 신도비는 다시 서지 못했다. 현재 남명기념관 마당에 있는 신도비는 우암이 찬(撰)한 것이다.
황부호 작가

황부호 작가

글·사진= 황부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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