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2040년엔 잠재성장률 '제로'…혁신 창업 외에 대안 없다"

김채연/황정수/강해령 2025. 12. 2.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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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공계
(4) 경계현 삼성전자 고문
하나의 혁신엔 수많은 실패 따른다
대기업, 혁신 1개 이뤄내려면
50개~100개의 새로운 부서 필요
스타트업 가치 올리는 M&A 힘써야
韓 공대 커리큘럼·VC 모두 문제
美스탠퍼드대처럼 창업 교육 시급
韓VC, 기업성장보다 '이익회수' 초점
테마섹처럼 길게 보고 투자해야
내 인생을 바꾼 '진대제와의 1시간'
반도체 전공 아니지만 D램개발 맡아
연구소 쫓아다니며 업무 영역 확장
열망 갖고 노력하면 '자격' 이길 것

삼성전자 반도체(DS)부문을 작년까지 총괄한 경계현 고문의 대학·대학원 시절 전공은 제어계측공학이다. 경 고문은 “1988년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반도체 설계와 관련한 일을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했다. 우연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초년생 시절 진대제 삼성전자 이사와 나눈 한 시간가량의 대화가 계기였다. 그날 이후로 경 고문은 세계 최초 다이렉트 램버스 D램 개발(1997년), 3차원(3D) V낸드플래시 개발(2013년), 128단 3D 낸드 적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출시(2019년) 등에서 주역으로 활약했다. 경 고문은 “입사할 땐 누구나 (학력 등) 자격으로 시작하지만, 사회에서 성공하는 이들은 과거의 성취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한 열망을 가지고 실현하는 사람”이라며 “자격은 열망을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반도체(DS)부문을 작년까지 총괄한 경계현 삼성전자 고문이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경 고문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을 높일 방법은 창업이 유일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솔 기자

▷삼성에 입사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살다 보면 많은 우연이 필연을 만듭니다. 박사 1년 차 때인 1988년 강진구 삼성반도체통신 당시 사장이 연구실을 방문했어요. 그 자리에서 삼성과 서울대 간에 산학협력이 체결됐어요. 저도 그때 입사했습니다.”

▷반도체 전공이 아니었는데요.

“맞아요. 제어계측공학을 전공했지요. 공대로 입학하면 2학년 때 학과를 지망할 수 있었는데 제어계측학과가 신입생을 유치하려고 마련한 미로찾기 대회가 끌리더라고요. 전자 기기를 직접 만드는 실험 프로젝트도 꽤 했죠. 창업하는 선배도 많았고요.”

▷공학이 꿈이었나요.

“어릴 적 에디슨, 카네기 등 과학자와 관련된 위인전을 많이 읽었어요. 수많은 발명을 통해 사회를 이롭게 발전시킨 에디슨을 가장 좋아했어요. 자연스럽게 과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습니다.”

▷입사 후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D램 설계 팀장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당시 DDR 램보다 훨씬 빠른 차세대 고성능 전용 메모리인) 램버스 D램 개발 업무를 맡았지요. 전에 없던 걸 하는 거라 트랜지스터부터 새로 만들어야 했어요. 회사 내부에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 연구소를 찾아다니며 일을 맡기고, 테스트·품질·패키징 전 부서를 쫓아다녔습니다. 업무 분장과 역할이 불분명한 ‘그레이’ 영역이 참 많았어요. 그때마다 나서서 했어요.”

▷주변 불만이 만만치 않았겠네요.

“‘오지랖이 넓다’는 얘기를 듣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일이 있으면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덕분에 회사와 개발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습니다.”

▷조직 경영은 또 다른 얘기죠.

“D램 설계를 맡으면서 임원을 달았고, 전무 승진 때 플래시개발실로 발령이 났습니다. 조직문화를 바꾸라는 특명을 받았죠.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어요. 그때부터 조직문화와 관련한 책을 많이 읽고, 다면평가를 시도하는 등 다양한 일을 했습니다.”

▷열정의 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박사 시절 로봇 연구를 비롯해 입사 후 D램 설계에 뛰어든 일, 조직문화를 바꿔보려고 한 것들이 언뜻 겉보기엔 무관해 보이죠?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모든 경험이 연결돼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영역을 계속 넓혀가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예요.”

▷적응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는 업무나 사람을 판단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성실성·진정성(integrity)입니다. 내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라도 나한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해요. 그렇게 반복해서 성과를 내면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이고, 언젠가는 기회가 옵니다.”

▷‘공대 출신 경영인’으로서 장점은 무엇인가요.

“기술회사에서 경영인은 기술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는 밑바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게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다만 이공계 출신은 경영 전문성이 없다는 것이 약점인데 임원 때부터 조직문화에 대해 배워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간 창업 생태계에 대해 자주 강조했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2040년쯤엔 0%에 근접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미국에서는 2000년대 들어 구글, 메타, 애플 등 혁신 기업이 나왔어요. 하지만 우리는 1970년대 이후 새로 등장한 대기업이 거의 없습니다. 경제성장률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창업뿐입니다.”

▷창업 외에는 성장 돌파구가 없나요.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인간 1경 명이 사는 은하제국에 혼란기가 오는데, 수학자가 계산을 해봤더니 혼란기 극복에 걸리는 시간이 1만 년이었어요. 1만 년을 1000년으로 줄이는 프로젝트를 한다는 게 소설의 주요 내용이에요. 우리 경제의 혼란기가 자칫 잘못하면 오래 갈 수도 있는데, 창업 생태계를 잘 만들어놓으면 이 시간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 창업 생태계는 어떤가요.

“국내 벤처캐피털(VC)은 대부업체나 다름없어요. 투자는 많이 하는데, 기본 8년(4년 투자, 4년 회수)에 불과한 투자 사이클은 너무 짧습니다. 스타트업의 경영, 인맥 등에 실질적 도움을 주기 어려워요. 이스라엘도 창업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20년 이상 걸렸고, 중국만 해도 투자 기간이 최소 10년이에요.”

▷해외와 어떻게 다릅니까.

“실리콘밸리엔 10대, 20대 젊은 창업가가 수두룩합니다. 이들이 성공적인 엑시트를 하고 창업 생태계로 다시 들어갑니다. 여기서 VC들은 투자는 기본이고 경영 조언, 인맥 소개 등 스타트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스케일업에 상당한 공을 들여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금방 되는 건 아니고 시간이 걸릴 겁니다. 20년 이상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창업 문화를 만들어야 해요. VC가 투자뿐만 아니라 기업이 잘 되도록 지원해 성공적인 엑시트 모델을 만들고, 또 새로운 기업이 나올 수 있도록 선순환 구조를 구축해야 합니다.”

▷참고할 만한 모델이 있습니까.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을 꼽고 싶어요. 테마섹은 국부펀드지만 정부 간섭 없이 독립적으로 운영됩니다. 이사회에도 글로벌 리더들이 참여하죠. 보상체계도 민간 회사와 차이가 없고요. 이스라엘 요즈마펀드는 정부가 글로벌 VC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독특한 유인책을 씁니다. 정부가 스타트업 초기에 투자한 지분을 인수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죠. 우리도 참고할 필요가 있어요.”

▷대기업 안에서 혁신할 방안은 없을까요.

“혁신의 확률은 매우 낮아요. 대기업에서 하나의 혁신을 이루기 위해 50~100개 혁신 부서를 만들 수 있을까요. 구조적으로 어렵습니다. 대기업은 인수합병(M&A)을 통해 혁신 기업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는 방식으로 생태계에 기여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국내 공학교육 시스템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교육 방식이 1980년대와 본질적으로 바뀐 게 없어요. 공대에 왜 안가냐고 하는데 재미가 없어서일 거예요.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실용적으로 할 수 있는 창업을 배워야 하는데 그런 시스템이 아니에요. 미국 스탠퍼드대, 중국 칭화대만 가봐도 우리랑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가요.

“스탠퍼드대에는 9개월 동안 창업을 목표로 하는 교육과정이 있어요. 졸업 최종 과제가 실리콘밸리 VC 심사역 앞에서 5분간 스피치하고, 질문에 답하면 즉석에서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겁니다. 교육도 학생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걸 합니다.”

▷대학이 바뀌어야 할까요.

“교육철학자 존 듀이의 ‘어제 가르친 것처럼 오늘의 학생들을 가르치면 학생들의 내일을 강탈하는 것’이라는 말처럼 대학부터 혁신해야 합니다. 창업 여건을 만들어주는 교육이어야 해요.”

▷지금 같은 이공계 기피 현상이 바뀔 수 있을까요.

“창업을 통해 국내에 억만장자 1만 명만 나오면 됩니다. 이공계에서 성공한 사람이 늘어나면 문화도 서서히 바뀔 것입니다.”

▷청년 공학도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입사할 때는 자격(퀄리피케이션)으로 시작하는데, 자격은 이제 과거입니다.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열망을 가지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드라이브를 거는 사람입니다. 열망을 가진 사람에게 자격은 질 수밖에 없어요. 열망을 갖고 노력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경계현 고문은 …

△1963년 강원 춘천 출생
△1982년 강원고 졸업
△1986년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졸업
△삼성전자 입사
△2020년 삼성전기 대표이사 사장
△2022년 삼성전자 DS부문장 대표이사 사장
△2023년 삼성전자 DS부문장 대표이사 사장 겸 SAIT 원장
△2024년 삼성전자 미래사업기획 단장·고문

김채연/황정수/강해령 기자 why2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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