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편지

한겨레 2025. 12. 1. 17:06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연재 ㅣ 우리 아이 고전 읽기
민음사 제공

박균호 | 교사 ‘나의 첫 고전 읽기 수업’ 저자

많은 독자들이 고전 읽기를 쉽게 나서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분량에 대한 부담감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레 미제라블’이나 ‘전쟁과 평화’만 봐도 번역본 기준 2천쪽 안팎의 대작이다. 여기에 낯선 문화와 사회, 정치적 배경까지 더해지면 고전은 더욱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세상에는 얇은 분량으로도 깊은 감동과 생각거리를 남기는 고전이 있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이 그 대표적인 예다.

1949년 연극으로 초연된 이 작품은 평범한 세일즈맨 윌리 로먼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며 서서히 무너져 가는 과정을 그린 비극이다. 윌리는 평생 아메리칸 드림을 믿으며 영업사원으로 일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빚만 늘고 결국 직장에서 쫓겨난다. 두 아들 비프와 해피 역시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인생의 방향을 잃고 방황한다. 170쪽 남짓한 이 짧은 희곡 안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함, 가족 간의 갈등과 애정, 그리고 평범한 인간의 존엄성이 모두 녹아 있다.

읽는 데 3~4시간이면 충분하지만, 책을 덮고 나면 오랫동안 잔상이 남는다. 짧지만 밀도 높은 대사 속에서 한 인간의 꿈과 좌절, 그리고 가족의 사랑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많은 사람들은 이 희곡을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비극으로만 보지만, 사실 이 작품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가족애다. 늙고 인정받지 못해 직장에서 쫓겨난 평범한 가장 윌리 로먼의 아내 린다가 남편을 향해 말한다.

“난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말 안 해. 윌리 로먼은 돈을 많이 번 적도 없고, 신문에 이름이 난 적도 없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도 아니야. 하지만 그는 사람이야. 지금 그 사람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는 반드시 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해. 그는 늙은 개처럼 버려져선 안 돼. 이런 사람에게는, 이제 정말로 관심이 필요해.”(필자 번역)

이 짧은 대사에는 남편에 대한 연민과 세상에 대한 항의가 함께 담겨 있다. 비록 윌리는 월급도 받지 못해 친구에게 빌린 돈을 월급이라 속이며 아내에게 건네지만, 린다는 그 사실을 알고도 남편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 그녀는 세상이 외면한 남편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주는 인물이다. 이 장면은 ‘세일즈맨의 죽음’을 단순한 사회비판극이 아니라 따뜻한 인간미가 살아 있는 작품으로 만든다. 또한 작가는 이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을 전한다.

아들 비프 역시 아버지와 갈등을 겪지만, 결국 사회적 성공이 아닌 아버지 그 자체를 인정하며 화해한다. 이 장면은 아버지의 실패를 넘어 사람으로서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순간이며, 가족 간 진심이 드러나는 가장 인간적인 장면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결국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사랑받을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다. 윌리 로먼은 회사에서도, 세상에서도 버려진 사람처럼 느끼지만, 가족은 끝까지 그를 붙잡는다. 아내 린다는 “그도 인간이다”라는 한마디로 남편의 마음을 감싸고, 아들 비프는 끝내 눈물로 아버지를 이해한다. 이 작품은 돈이나 성공이 아니라,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보듬는 사랑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지금의 청소년들에게도 이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성적과 스펙, 경쟁이 중요한 세상에서 결국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과 따뜻한 말 한마디라는 것을 이 희곡은 조용히 일깨워준다. 읽고 나면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고, 누군가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진다. 그래서 ‘세일즈맨의 죽음’은 비극적인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평범한 사람들에게 건네는 위로의 편지 같은 고전이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