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인물 재조명)서예 거목 소헌 김만호(12)…혼란한 시국의 괴로움 글로써 수습

최미화 기자 2025. 11. 2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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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시은거』(囂市隱居) 등 저술
해방 후 시국의 괴로움 담은 「병술술회운」 지어
미소공위와 이승만의 정읍발언, 북한의 사실상 단독정부 수립 해설 박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급박하고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도 소헌 선생은 마음을 닦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병술년(1946년) 정초에 3주일 간 은거하며 『중화1편』(中化一篇)을 저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시간이 선생에게는 세상의 번거로움을 피하여 혼자 자득(自得)의 덕을 쌓는 깨달음의 시간이 되었다. 그야말로 효시은거(囂市隱居, 소란스러운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덕德을 쌓음)였다.

또 한 번의 혼란 정국은 선생으로 하여금 서도(書道)에의 의욕과 사명감을 더욱 부채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집에는 묵향이 밤낮없이 풍겨 나왔고, 피어오르는 묵향 따라 서도의 정열도 점점 더 높게 타올랐다. 그러나 일제36년 동안의 너무나 혹독한 문화말살정책은 전통문화 경시 풍조로 이어졌고, 우리의 전통 문화는 진부하고 고루하다는 편견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졌다.
소헌 김만호 선생은 평생 써온 일기를 통해 서예계 후학들을 위한 체제 정비와 헌신 뿐 아니라 시대상황에 대한 마음도 과감없이 표현했다. 김용국 기자

일본에 의한 서양 문물의 이식과 일제의 잔재들이 우리 근대를 비정상적 왜곡으로 치닫게 했던 것이다. 그럴수록 선생은 "우리의 맥락과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온 서도를 결코 등한시 할 수 없다. 우리의 말과 글이 없어지지 않는 한 서도는 언제고 그 진정한 빛을 발할 때가 올 것이다"라는 확신과 신념을 더욱 굳히며 서도의 연구와 실습에 묵묵히 정진해 나갔다.

이 때의 소헌 선생은 소란스러운 저자 거리에서 은거하며 신선이 산다는 십주(十洲, 전설 속의 평화로운10개의 섬)를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은 해방 이듬 해인 1946년 6월25일 선생의 생각을 읊은 「병술술회운」(丙戌述懷韻)이다.

◆ 『제효시은거』(題囂市隱居, 복잡한 도시속에 숨어 삶에 대해 짓다)
數間容膝起斯樓(수간용슬기사루, 두어 칸 좁은 방 이 집을 지어)
近市索居歲月流(근시색거세월류, 도시의 삭막한 생활 세월만 흘러가네)
蜀路何行尋正路(촉로하행심정로, 험한 길 어디로 가야 바른길 찾겠는고)
四難可畏慎來頭(사난가외신래두, 네가지 앞날이 두려우니 다가올 앞날을 삼가고 조심하리)
交友嘗憎來日変(교우상증내일변, 친구를 사귈 때는 훗날 마음이 변할 까 항상 조심하고)
修身應有後期悠(수신응유후기유, 수신만 해두면 응당 뒷날에 쓰임이 있으리라)
隨時隱退收心計(수시은퇴수심계, 때에 따라 물러나 마음 닦음을 꾀하는데는)
案上生涯勝十洲(안상생애승십주, 독서생활로 살아감이 무엇보다 좋으리라)

해방이 되어 광복을 맞았지만 혼란 정국은 계속됐다. 해방 이듬 해인 1946년에도 국내 정국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신탁통치 반대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좌·우익의 갈등이 심각해지는 등 혼란 정국이 이어졌다. 우익 세력(한국민주당, 한민당)을 중심으로 한 반탁(反託)운동과 반탁에서 친탁(親託)으로 돌아선 좌익(조선공산당)의 대립 양상이 극심해 졌다. 특히 남쪽 지역에서 심각한 좌·우익의 대립이 있었다. 1946년 대구에서 발생한 10·1사건은 좌·우익 대립의 뇌관이 됐다. 참혹한 동족 살육이 자행됐다.

◆ 「병술해방기념일제」(丙戌解放記念日題, 병술년 해방기념일을 기념하여 짓다, 1946. 8. 15)는 이 시기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좌·우익 대립 양상의 정세 속에서 선생이 자필로 쓴 감상문이다. 해방1주년 병술(1946년) 8월15일 감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천지순환은 자연의 이치이다. 지난해와 금년의 2년은 역사의 화(華, 빛나고 화려함, 꽃 등의 뜻)이며 오늘은 실천에 옮길 때이다. 지난해 8월15일은 동포형제가 구속과 노예를 벗어나 해방된 날이요 금년 오늘은 1주년이 되는 기념일이다.

과거를 회상하면 연합국에서 자주 독립을 선사함에 해외 열사의 피나는 노력으로 무궁화 봄빛을 가져 왔지만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조 말엽의 폐습과 좋지 못한 관습이 유전(流轉)되고 왜정(倭政)의 가혹에 노예로 지내온 못난 민족이라. 화창한 봄 빛을 맞았으나 흥분만 넘쳤고 왜인의 혹독한 정치에 물들어 애국 지사의 민족 운동을 방해하는 모리배도 무수하다.

미소공위(美蘇共委, 미소공동위원회, 별도 박스 첨부)도 휴회되고 남북이 분열되어 문화의 발전이 중단되고 경제가 침체되어 도덕과 윤리를 상실한 채 감정만 악화되어 1년을 허송하고 도탄에 빠져 미래를 상상치 못하고 있다. 가슴 가득한 억울함을 밝은 정신으로 천지 신명에게 묵도하고 가슴에 쌓인 찢어진 감상은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힘으로 영원한 8·15를 빛내자.

오늘의 현실은 실로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천지 신명에게 사과할 일 밖에 없다. 요(堯, 요 임금)가 순(舜, 순 임금)에게 전하던 '윤집궐중'(允執厥中,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리거나 개인이 수양할 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며 올바른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과 순(舜)이 우(禹, 우 임금, 우 임금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를 세운 시조)에게 전하던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롭고(惟危, 유위) 도심(道心, 도심)은 오직 미약하니(惟微, 유미) 오직 정밀하고 순일(惟精惟, 유정유)함이라. 확실하게 중(中)을 잡으라는 윤집궐중의 정도(正道)를 찾아가자. 이 길만 찾으면 혁혁한 융화와 목목한 질서로 하(夏)나라 때의 정전(井田, 정전)제와 주(周)나라 때의 문화를 찾을 듯하다.

이로부터 굳은 각오로 진정한 중화(中化)의 우법(友法)을 숭상하자. 우(友, 벗)는 덕(德)이니 책선(責善, 이로운 충고를 아끼지 않는)하는 우를 찾도록 하자. 앞으로 같은 덕으로 신의를 지내는 동지의 길을 배워 나가자. 삼천리 안에 동감인 이웃 인형(隣兄)이 없을까? 있다면 성기상응(聲氣相應, 마음이 통하고 뜻이 서로 같음)할 줄로 자신하며 불원천리 찾아가서 앞 길을 밝혀 달라고 빌고자 하며 붓을 놓는다.
병술 8·15기념일 오후에 제(題)하다. 시은市隱 만호晩湖 야헌也軒

◆해방공간 좌우익 갈등

좌·우익의 갈등은 통일 정부 수립의 걸림돌이 되었다. 양 진영의 갈등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과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미소공동위원회에 의한 통일정부의 수립이라는 삼상회의 결정(1945. 12.)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서울(1946. 3.) 그리고 평양(1947. 5.)에서 2차의 협상을 벌렸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이로서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고 유엔은 한반도에 파견할 유엔감시위원단을 설치하여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는 독립 인정과 유엔 감시 하에 남북 총선거를 통한 통일 방안을 가결시켰다.

계속되는 혼란된 정국의 와중에서 1947년 선생이 40세 드는 해에 「정해 3월1일 기념 감상문」을 남겼다. 3·1만세운동은 선생이 소년기(12세, 1919)일 때 일어났다. 감상문을 쓴 정해년(1947)은 기미 3·1운동 28주년 되는 해이다. 정해 1947년은 필자가 소헌 선생의4남으로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형들도 그러했지만 필자 또한 참으로 어렵고 힘든 시절에 세상을 나왔다. 지금 필자의 나이 77세이니 그동안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환경은 급격하게 변하고 바뀌었지만 시국은 마치 현재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것은 비록 혼자만의 생각일런지 모르겠다. 그 당시 선생이 시국을 보는 감상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 건축가·화가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US-Soviet Joint Commission)는?

1945년, 나가사키와 히로시아에 핵폭탄을 맞은 일본의 항복선언으로 해외 등지에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쳐나가던 대한민국은 해방됐다. 대한민국의 일제 저항운동은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사와 함께 세계 양대 독립운동사로 기록될만큼 치열하고 지속적이었다.

그러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38선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게 됐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 회의(모스크바 3상 회의)에선 '최장 5년 동안 한반도를 신탁통치한다'는 결정을 해 한국인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이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됐다. 이 회의에서 미·영·소 3국은 △한국에 독립적인 민주 임시정부 수립 △이를 돕기 위해 남한의 미군 사령부 대표와 북한의 소련군 사령부 대표로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 △임시정부 수립 후 미·영·중·소 4개국이 최장 5년간 한반도를 신탁통치한다고 결정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20일부터 5월9일까지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렸다. 미국 측 수석대표는 아놀드(Arnold) 소장, 소련 측 수석대표 스티코프(Stykov) 중장이었다.

이날 쟁점은 임정 수립을 위한 협의 대상을 선정하는 문제였다. 이에 대해 소련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신탁통치 포함)을 지지하는 정당 및 사회단체하고만 협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탁 운동을 주도하던 우익 세력을 배제하려는 의도였다. 반면 미국의 입장은 모든 민주적인 정당과 단체에게 협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맞섰다. 이는 반탁 운동을 벌이던 우익 세력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무기한 휴회(결렬)되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역시 결렬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이듬해인 1947년 5월21일부터 10월21일까지 5개월간 계속됐다. 제1차 미소공동위 결렬 이후 해방공간의 한반도는 좌우익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좌우합작운동'마저 실패로 돌아가면서 다시 2차 회의가 소집되었다. 2차 미소공동위 역시 1차 때와 마찬가지로 임정 수립을 위한 협의 대상 단체 범위에 대한 팽팽한 이견으로 결국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고 최종 결렬됐다.

▲미소공동위 1,2차 결렬과 한반도 분단 고착화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은 한반도 분단 고착화로 연결된다. 미소 양국이 통일 정부 수립에 합의하지 못함으로써, 남북한에 주둔하던 미군정과 소련군정은 각자 독자 노선을 걷게 되었다.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UN)에 상정했고, 유엔은 1948년 5월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 실시를 결의했다. 1948년 5.10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어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은 한반도에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과는 정반대로 남북 분단을 공식화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펼쳐진 냉전이라는 국제 정세 속에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한반도의 통일 국가 수립 기회가 좌절된 비극적인 역사로 평가된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1945년 10월16일 귀국했다.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 즉 반탁(反託)을 주장하던 이승만은 1946년 4월부터 6월까지 삼남(충청·전라·경상도)을 순회하면서, 전북 정읍(6월3일)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南方, 남한을 일컬음)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휴전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

이승만의 정읍 선언의 핵심은 자유 민주주의 통일 국가를 한반도에 건설하기 위해 '선(先) 임시정부 수립, 후(後) 민족 통일 달성'이라는 단계적 통일 정부 수립론이다.

이 발언에 대해 일각에서는 남북 분단을 고착화한 발언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한다. 즉 '38선으로 나누어진 남북이 합심해 통일 정부를 수립해야 할 시점에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말해 결과적으로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한 발언'이라는 것이다.

▲정읍 발언 8개월여 전에 북한에 사실상 단독정부 수립

이에 대한 팩트체크를 해보자. 2차대전 종전 이후, 지중해와 태평양 방면 진출을 꾸준히 모색한 소련은 1945년 9월20일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 사령관 슈킨에게 "한반도 북부에 소련의 이익을 영구히 구축할 정권을 수립하라.". 이런 지령은 이승만이 10월16일에 귀국하기 약 한달(26일)전, 정읍 발언(1946년 6월3일) 보다는 8개월여 전(정확히 8개월 13일)에 일어났다.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평양에 들어섰다. 위원회는 김일성에게 권력을 집중하고 '조선 인민의 영웅'으로 부각하면서 김일성 우상화를 본격화했다. 이어 화폐를 발행하고 군대를 창설했으며, '인민 경제 계획'을 도입했다. 땅을 무상 몰수한 뒤 농민들에겐 소유권이 아니라 경작권만 준 토지개혁도 단행했다.

38선 이북에 사실상 정부(政府)가 들어섰다는 의미로, 분단과 연결되는 '단독정부'는 소련 지령으로 북한에 먼저 들어섰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이보다 4개월 더 늦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미·소·영·중 4개국 정상에게 '한반도에 하나가 된 통일 민주 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하고 서신을 보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은 인구 비례로 남북 지도자들이 모여 38선을 철폐하고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북한에 인민 정부를 세운 소련은 남한까지 사회주의 국가로 적화하려는 속셈을 감추고 있었다.

정읍 선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

최미화 기자 cklala@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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