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래미다

2025. 11. 29. 00: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임희윤의 뮤직 SCENE ‘최후의 고지’ 남은 K팝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이런 날이…? 한반도에 사는 음악 팬이라면, 최근 15년 사이 저 말을 몇 번은 되뇌었으리라. ‘푸른 눈의’ 유럽인들이 ‘소녀시대 공연을 보여달라’며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플래시몹 시위를 벌이고(2011년 ‘SM타운 프랑스 파리 콘서트’), 싸이의 말춤과 ‘갱넘!(강남)’을 지구촌이 따라 하며(2012년 ‘강남스타일’ 빌보드 싱글차트 2위), 한국 그룹 노래가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오르는(2020년 방탄소년단 ‘Dynamite’), 감히 꿈꿔본 적 없는 일들이 현실로 잇따라 펼쳐졌다. 이제, 그래미다.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APT.’가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를 포함한 3개 부문 후보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Golden’이 ‘올해의 노래’ 등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한·미 합작 걸그룹 캣츠아이는 심지어 ‘최우수 신인상’ 후보, 토니상 수상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최우수 뮤지컬 시어터 앨범’ 후보다. 운명의 시간은 두 달 뒤다. 내년 2월 1일(현지시간) 미국 LA에서 열릴 시상식에서 ‘#korea’ 해시태그를 단 누군가 트로피를 들어 올릴, 어쩌면 해피엔딩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세계 최고 권위의 대중음악 시상식’이라 불리는 그래미는 1959년 탄생했다. 세칭 미국 3대 대중음악 시상식이 있다. 그래미 어워즈,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 빌보드 뮤직 어워즈다. 사실상 판매량·화제성·팬투표 등으로 수상자를 정하는 뒤의 둘과 달리, 그래미가 ‘권위’란 수식어를 얻게 된 것은 ‘전문가 투표’라는 시스템 덕분이다. 미국의 ‘리코딩 아카데미’가 주체다. ‘리코딩 아카데미’는 말 그대로 녹음되는 음악을 진흥하는 협회다. 가수·프로듀서· 엔지니어·작곡가·제작자 등 음악 만드는 데 관여하는 다양한 이들이 아카데미 회원이다.

“선거 캠페인 살벌, 서로 찍어주자 거래도”
그래미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태생부터 알아야 한다. 지금과 비슷한 음반 중심의 대중음악 시장은 20세기 들어 개화했다. 1920년대 미국에서 라디오가 대중화되고 1940년대 레코드가 상용화되며 음반 시장이 대두됐다. 미국 문화계 큰 손으로 떠오른 음반사 임원들은 1950년대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 대로에 모였다. ‘스타의 거리’에 별과 이름을 새길 음악계 스타를 선정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은막과 브라운관의 별들과 ‘스타’를 나누다 보니 음악인 몫이 현저히 적어질 판이었다. ‘영화계엔 오스카, TV 쪽엔 에미가 있잖아? 그럼 우리도 우리만의 상을 만들어 우리끼리 수여하자!’ 서로를 북돋우고 치하 하자는 아이디어가 그래미 어워즈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래미를 받을 수 있고, 왜 한국 가수는 그래미와 인연이 멀었을까. 최근 필자는 복수의 그래미 투표 위원을 만나 내부자만 아는 투표 뒷이야기를 취재했다. 그들은 “ 주요 부문으로 갈수록 자본과 인맥의 힘이 상당 부분 작용할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캠페인’이 살벌하게 이뤄져요. ‘내가 너희 음반 찍어줄게, 너도 우리 음반 찍어줘’ 하는 거래 제안도 오가죠. 한국에 있는 저한테까지 미국의 음반 관계자가 달콤한 제안의 인스타 DM(다이렉트 메시지)을 보낼 정도이니, 미국 현지에선 오죽 많은 일이 벌어지겠습니까.”(그래미 투표 위원 A씨)

여기서 말하는 캠페인(campaign)은 일종의 홍보를 말한다. 그래미나 오스카, 토니상 같은 대중문화 시상식 매커니즘의 중심에 캠페인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2020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받을 때도 막후에서 CJ그룹의 막대한 자본력과 홍보가 힘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 따르면, 캠페인에도 일종의 ‘가격표’가 있다. 캠페인 관련 대행사들도 난입해, 투표 위원들에게 이메일 발송, 네트워킹 파티 주관, 선셋 스트립이나 LA 지하철 내 광고판 광고 게재, 빌보드지에 전면 광고 게재 등을 횟수로 묶어 패키지 상품처럼 판매하기도 한다. 한 투표 위원은 “5만 달러(약 7300만원) 패키지 구매 제안을 받은 적 있다”면서 “그런데 이는 기본이자 싼 축에 속하며 대형 음반사들의 자체적 캠페인까지 합치면 특히 주요 부문의 경우 천문학적 로비 예산이 쓰이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래미 투표 위원이 누구인지 암암리에 조사해 명단과 연락처를 (음반사들에) 돈 받고 파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SNS 시대에 이 정보는 사실상 공개됐다. 그래미 투표 위원을 식별할 수 있는 SNS 해시태그도 존재한다. 일부 음반사들은 이 해시태그를 추적해 투표 위원 명단을 만들고, 이들을 연중 지속적으로 ‘관리’한다. 새 앨범 감상회나 콘서트에 초대하며 ‘내 사람’으로 포섭하려 노력한다. 특히 투표 기간이 다가오면 각 음반사들의 ‘FYC(for your consideration·후보로 고려해주십사)’ 메일이 투표 위원들의 편지함에 쇄도한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그래미 투표 위원들에게 콘서트 VIP석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뉴욕타임스의 공식 음악 팟캐스트 ‘팝캐스트’에서 2026 그래미 후보 특집을 진행한 현지 음악평론가 존 캐러매니커는 “그래미를 여러 번 받았던 로드(Lorde·뉴질랜드 팝스타)가 올해 훌륭한 앨범을 냈음에도 후보에 전혀 지명되지 못한 것은 그가 근년에 인디 아티스트로서 정체성을 강화함에 따라 이번에 캠페인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설했다.

그럼 투표 위원은 누가 될까. 리코딩 아카데미에서 정한다. ‘미국의’ 아카데미가 여는 ‘미국의’ 시상식이니까 당연히 ‘미국의’ 음반 관계자들이 중심이다. 당초 1만 명 선이었는데 최근 대폭 늘려 올해는 1만5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올해 아카데미가 전략적으로 풀을 넓힌 이유는 ‘그래미가 너무 하얗다/늙었다(grammy so white/old)’는 비판 여론, 한때 30~40%대를 오가던 중계방송의 TV 시청 점유율이 20%대(시청률은 2%대)까지 내려간 현실, SNS 시대 트렌드 반영 필요성 등이다. 투표 위원을 확대하며 인종·국가·젠더 다양성에 신경 썼다. 리코딩 아카데미는 올해만 각국 음악 관계자 3800명을 신규 회원으로 받았는데 추가 인원 중 40세 미만이 절반을 차지했고 58%는 유색인종, 35%는 여성에 할당했다.

그래미 후보에 수차례 올랐던 BTS. [중앙포토]
한국에도 그래미 투표 위원 수가 두 자릿수로 늘었다. 방시혁 하이브 의장, 방탄소년단 멤버 7명 전원, 프로듀서 피독·지코·범주 등, 세븐틴 멤버 2명,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멤버 1명, 캣츠아이 멤버 6명 전원도 그래미 투표 위원이다. “한·미 합작 걸그룹 캣츠아이가 그 어렵다는 신인상 후보에 오른 데는 높은 인기 외에도 게펜레코드라는 현지 레거시 합작 회사의 힘, 멤버 전원이 미국 현지에 상주하는 투표 위원이어서 네트워킹에 유리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겁니다.”(그래미 투표 위원 B씨)
하이브의 다국적 걸그룹 캣츠아이. [중앙포토]
문턱은 여전히 높다. 미국 음악 업계 활성화를 위한 시상식이니 자국 음악 시장의 발전이나 활성화에 얼마나 기여했는지가 중요하다. 아르헨티나·세네갈·스위스 등지에 제 아무리 위대한 음악 거장이 버텨도 그래미는 관심이 없을 만하다. 더구나 최종 후보로 뽑힐 모수(母數)가 되는 예비 후보, 즉 ‘엔트리(entry)’에 어떤 가수의 음반이나 노래를 올리려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한 그래미 투표 위원은 “투표 위원에게만 곡·앨범 등 엔트리를 등록할 자격이 부여된다. A4 용지 여러 장에 걸쳐 각종 메타 데이터를 직접 입력해야 하는 난이도 높은 작업”이라면서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는 투표 위원은 (엔트리 추천 없이) 투표만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선지 예비 후보가 최종 후보의 10배수에도 못 미치는 부문도 많다”고 귀띔했다.
비영어권 본상 수상 역대 딱 한 번뿐
내년 그래미상 후보에 오른 로제. [중앙포토]
그렇다면 내년 ‘우리의’ 수상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1만5000명의 결정을 섣불리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수상 가능성은 적지 않다. 본상 후보에 오른 ‘APT.’, ‘Golden’, 캣츠아이의 음원은 미국에서 각각 애틀랜틱·리퍼블릭·게펜 레코드의 상표를 달고 발매됐다. 수십 년 역사의 현지 굴지 레이블들이다. 더욱이 이들 곡은 차트 최상위권을 휘저으며 장기간의 실질적 현지 히트를 기록했다. 음악도 아메리칸 팝 스타일에 가깝고, 가사도 (반복 횟수 제외) 두세 줄의 한국어를 빼면 영어 위주로 구성돼 있다. 다수인 미국인 투표 위원들에게 ‘미국 시장의 노래’로 인정받기 좋은 모양새다. ‘팝캐스트’ 그래미 특집이 ‘APT.’를 소개할 때 로제를 잠시 언급하면서도 “레이디 가가, 브루노 마스 같은 그래미의 총아들이 이번 후보 지명에서도 선전했다”고 부연한 것도 마스의 영향력을 말해 준다.
로제와 ‘APT.’를 함께 부른 브루노 마스(왼쪽). [중앙포토]
‘APT.’와 ‘Golden’이 최소 한두 개 이상의 트로피 수상 가능성이 높다면, 캣츠아이 앞에는 안갯속 싸움이 기다린다. 애디슨 레이, 리온 토머스, 롤라 영 등 영미권 SNS에서 돌풍을 일으킨 뜨거운 스타들과 맞서야 한다.
수상 가능성이 가장 유력한 케데헌. [중앙포토]
그래미가 본상에서 영미권 이외의 가수에게 문을 연 일은 극히 드물긴 하다. 비영어권 노래의 본상(주요 4개 부문) 수상은 단 한 번 뿐. 1959년 제1회 때 이탈리아 가수 도메니코 모두뇨의 ‘Nel blu, dipinto di blu(Volare)’가 ‘올해의 레코드’와 ‘올해의 노래’를 석권한 뒤 재현되지 않은 일이다. 2018년 세계를 강타한 푸에르토리코 가수 루이스 폰시, 대디 양키의 라틴 팝 ‘Despacito’도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후보에 올랐으나 끝내 고배를 마셨다.

다음달 12일, 그래미 투표 위원들의 최종 투표가 시작된다. 주사위는 곧 던져진다. 후보 지명 단계에서 예열된 막후 캠페인전(戰)의 열기 역시 끓는점을 향해갈 것이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다.

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 뮤직 컨설턴트. 하이브,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에서 강연 했고 BBC, 아사히에 한국 문화에 관한 도움말을 줬다. 한국대 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