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의 나라에서 ‘공간 소비’ 시대를 연 커피 혁명가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5. 11. 22.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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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방문화를 바꾼 브랜드
한국에서 커피는 오랫동안 음료보다 ‘자리’의 끼워팔기 상품이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1950~80년대 도심 한복판에는 크고 작은 다방들이 자리했고, 당시 다방은 단순한 휴식 공간을 넘어 사회 활동의 일종의 거점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다방에서 상담을 했고 거래를 논했고 소개팅도 잡았다. 신문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때로는 약속이 아니라 그냥 앉아 있기 위해 들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그만큼 다방은 도시인의 생활 반경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 도시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세대의 취향은 다양해졌으며, 새로운 소비문화가 요구되기 시작했다. 다방의 내부는 여전히 담배 연기와 묵은 장식들로 가득했지만 사람들의 감수성은 그 분위기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이 간극이 커지면서 다방은 자연스럽게 구식 공간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 한국에는 커피를 마실 곳은 있었지만, 작업을 하거나 조용히 쉬거나 시간을 머무를 만한 ‘도시형 카페’는 거의 없었다. 머물고 싶은데 마땅한 곳이 없어 편의점과 패스트푸드점으로 흘러가던 소비자들이 많았고, 그 가운데 생긴 공백은 도시인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쌓여가던 흐름이었다.

스타벅스 1호점
바로 그 시기에 서울 이화여대 앞에 한 커피 매장이 등장한다. 눈에 익지 않은 초록색 세이렌 로고는 당시 기준으로는 ‘낯선 외국 브랜드’일 뿐이었지만, 실제로는 한국 커피 시장의 구조 자체를 뒤흔드는 첫 신호였다. 이대 1호점의 등장은 다방에서 카페로 넘어가는 변곡점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고, 도시 소비문화의 새로운 패턴이 형성되기 시작한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 가게가 바로 스타벅스 1호점이다. 현재도 해당 매장은 운영중이다.
커피가 아닌 시간을 파는 가게
스타벅스 로고
스타벅스가 한국에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단순했다. ‘카페는 커피를 마시는 곳’이라는 기존 개념을 지우고, ‘카페는 시간을 사용하는 공간’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인에게는 다소 낯선 방식이었다. 하지만 스타벅스 매장 구조는 한국의 도시 환경과 매우 잘 맞았다. 대화를 하더라도 오래 앉아 있어도 부담이 없고, 혼자 와도 어색하지 않으며, 노트북을 꺼내고 책을 펼치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허용되는 공간이었다. 즉, 스타벅스는 커피 판매보다 먼저 ‘공간 임대업’에 가깝게 운영됐다.
스타벅스
이런 구조는 한국에서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받아들여졌다. 좁고 빠른 도시생활 속에서 잠시 쉬고 싶은 시민들, 약속과 약속 사이의 시간을 때워야 하는 직장인들, 조용한 공부 장소를 찾던 학생들 모두에게 스타벅스는 자연스러운 대안이 됐다. 단순히 소비자들이 원두의 맛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원한 것은 ‘비워둘 수 있는 시간’과 ‘머무를 만한 장소’였고, 스타벅스는 이것을 정교하게 제공했다.

그 결과 한국의 스타벅스는 다른 나라보다 훨씬 빠르게 스케일업을 이뤘다. 2025년 기준 매장 수는 2000개, 연 매출 3조 원. 단일 국가 기준으로 미국과 중국 다음인 세계 3위 시장이다. 이는 단순한 커피 수요로 설명되기 어렵다. 한국인의 강한 학습·업무·휴식 패턴이 ‘장소의 필요성’을 강화하고 있었고, 스타벅스는 가장 안정적으로 그 빈틈을 채웠다. 다방이 도시를 점령했던 시대가 사라진 대신, 초록색 로고가 도시 곳곳에서 동일한 UX를 제공하는 ‘표준 공간’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브루클린 소년이 쌓은 회사 철학
스타벅스의 철학은 실질적 창업자라 불리는 하워드 슐츠의 성장 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1953년 뉴욕 브루클린의 가난한 지역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 아버지가 부상당했지만 회사의 지원을 받지 못해 생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이 경험은 슐츠에게 ‘조직이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면 결국 사람은 회사를 떠난다’는 강한 기억으로 남았다.
하워드 슐츠
장학금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제록스에서 영업을 배우며 사람들의 필요를 읽는 법을 익혔다. 그 후 커피머신을 판매하는 작은 회사로 이직했는데, 그곳에서 유독 많은 주문을 낸 한 가게가 눈에 띄었다. 시애틀의 작은 커피가게, 스타벅스였다. 당시 스타벅스는 단순한 원두 판매점이었으나, 매장 자체가 보여주는 생활 방식의 힌트가 슐츠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향기와 현장을 보고 느낀 가능성
슐츠가 시애틀 파이크플레이스의 스타벅스를 처음 방문했을 때 원두 향과 매장의 분위기는 단순한 소매점 이상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는 1982년 스타벅스 마케팅 이사로 합류했지만 당시 스타벅스는 원두 판매 중심의 회사였다. 매장에서 커피를 추출해 제공하는 개념이 없었다.
시애틀 파이크플레이스 마켓
전환점은 1983년 이탈리아 출장이었다. 밀라노의 에스프레소 바에서 그는 사람들이 커피를 매개로 자연스럽게 머물며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관찰했다. 카페는 음료점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를 스타벅스에 적용하자는 그의 제안은 창립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회사를 나와 ‘일 지오날레’를 창업해 직접 자신의 모델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지오날레는 이탈리아어로 신문이란 뜻으로 매일 신문을 읽듯 매일 찾아오는 커피가게란 뜻을 담았다.
일 지오날레
2번째 기회, 커피 제국을 만들다
그러던 중 역으로 스타벅스 매각 제안이 온다. 1987년 스타벅스 창립자들이 회사를 매각하기로 하자 슐츠는 투자자를 모아 380만 달러에 회사를 인수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이후 스타벅스는 원두 판매업에서 공간 기반의 커피 회사로 전환했다. 브랜드의 중심을 매장으로 옮기고, 매장을 도시 속 생활 플랫폼으로 재구성했다. 이 전환은 미국 카페 시장 전반의 변화를 촉발했다.
스타벅스 로고 변천사
맥도날드와 닮은 스타벅스의 창업
스타벅스의 성장 과정은 맥도날드를 키운 레이 크록의 여정을 떠올리게 한다. 두 사람 모두 창립자가 아니었고, 기존의 작은 회사를 새로운 산업 단위로 확장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레이 크록은 햄버거의 표준화를 만들었고, 슐츠는 카페의 표준화를 만들었다. 둘 다 기존 창업자와 충돌했고, 결국 회사를 인수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정의했다.

맥도날드가 시간을 단축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면, 스타벅스는 시간을 머무르게 하는 공간구조를 만들었다. 즉, 두 브랜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다뤘다. 이 비교는 스타벅스가 단순한 커피 브랜드가 아니라 도시의 생활 방식을 재편한 기업임을 보여준다.

스타벅스와 맥도날드 로고
제3의 공간 개념을 현실에 적용하다
슐츠가 만든 스타벅스 모델의 핵심은 ‘제3의 공간’ 개념이다. 집과 직장 사이에서 사람들은 잠시 머무를 곳을 필요로 한다. 스타벅스는 그 빈 틈을 정확히 채웠다. 한국의 도시인에게 이 모델은 특히 잘 맞았다. 유동 인구가 많고 공간 비용이 비싼 한국에서 ‘기본적인 자리를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카페’는 새로운 인프라로 기능했다.

스타벅스는 커피를 중심에 놓되, 실제로는 공간을 상품처럼 제공했다. 좌석, 음악, 조명, 와이파이, 대화가 가능한 소음 수준까지 모두 일정한 기준을 갖도록 설계했다. 학계에서는 이를 ‘공간 소비’라 부르며, 스타벅스는 이 구조를 가장 체계적으로 만든 기업으로 평가받는다.

스타벅스 본사
대척점에선 블루보틀의 등장
스타벅스의 확장성과 시스템화된 구조에 대조되는 모델로 블루보틀이 떠올랐다. 블루보틀은 작고 느린 매장 운영, 드립 중심의 방식, 로스팅에 대한 강한 원칙을 내세워 스타벅스가 주도한 대량 경험 구조에 ‘정밀한 맛’을 앞세워 대응했다.

한국에서는 성수동에서 두 브랜드가 직접적으로 마주한다. 스타벅스 리저브의 확장성 있는 공간 구조와 블루보틀의 집중된 작은 공간은 서로 대비되며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냈다. 특히 한국 소비자는 두 브랜드를 상황에 따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하다. 공부·업무는 스타벅스, 여유 있는 커피는 블루보틀 식이다.

블루보틀 커피
슐츠가 남긴 영원한 커피제국
스타벅스는 카페는 음료를 파는 곳이라는 기존 개념을 바꿨다. 카페는 시간을 쓰고, 휴식을 하고, 작업을 하고, 약속을 기다리는 공간이라는 기준이 생겼다. 브랜드가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고, 공간 중심의 운영이 새로운 소비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스타벅스의 출발점은 커피 자체가 아니었다. 공간과 사람에 대한 관찰이었다. 슐츠가 어릴 적 경험에서 얻은 원칙—사람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기준—은 결국 도시 카페 문화를 바꾸는 형태로 확장됐다. 한국 사회는 이 구조를 가장 빠르게 받아들이며 스타벅스를 삶의 일부로 성장시켰다.

스타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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