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폴리스에서 코스모폴리스까지 [.txt]
크리스천돔·킹덤 거쳐 네이션의 명암
“21세기 한국도 유럽 정치 문법에 뿌리”

정치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다 . 불법계엄 1 년 , 한국인은 정치의 해악을 견뎌내야만 했다 . 트럼프의 미국 , 극우로 향하는 일부 유럽 국가들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정치 는 환멸 아닌 환멸의 대상이다 .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 당신의 일 , 우리 일 , 그들의 일은 모두 정치이다 ” 라고 했지만 , 사소한 삶까지 빼앗기는 정치는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 그런 점에서 조홍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정 치의 발명’은 사소한 것에까지 파고든 정치의 원형은 무엇인지 , 그 원형은 어떤 과정과 절차를 거쳐 우리 앞에 당도했는지 보여주는 진중한 책이다 .
흥미로운 점은 21 세기 한국의 정치 현실이 “ 유럽의 정치 문법 ” 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이다 . ‘ 문법 ’ 이란 자유 , 평등 , 민주주의 같은 추상적 개념과 선거처럼 정치의 밑바탕을 이루는 직접적인 개념들이 “ 어떻게 조합하고 작동하는지 원리와 구조 ” 를 의미한다 . 지은이는 적어도 정치 영역에서는 “ 우리가 아테네 시민의 후예이고 로마 시민의 자손 ” 임을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고대 로마의 레스 푸블리카 , 중세의 크리스천돔과 킹덤 , 근대의 네이션과 현대의 코스모폴리스 개념을 통해 찬찬히 설명한다 .

‘ 유럽의 정치 문법 ’ 의 근원인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 자유 ’ 가 핵심 가치다 .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정치란 “ 인간은 정치적 동물 ” 이라고 역설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 사회적 존재 ” 들의 모든 활동을 뜻한다 . 자율성을 지닌 모든 사회적 존재들의 활동이 바로 정치라는 것이다 . 이를 증명하는 여실한 사례가 그리스인들이 여러 광장에 세운 익명의 벌거벗은 보통 사람의 조각상인 쿠로스다 . 쿠로스는 조각상을 넘어 “ 자유를 찬미하고 , 시민 개개인의 힘을 상징 ” 하는 분명한 정치적 메시지다 . 폴리스는 강력한 시민 공동체 를 형성했다 . 부족 , 종족 등 혈통에 무게추가 기울지 않고 지리적 공동체를 지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 지은이는 “ 국가와 국제관계의 입체적 연결고리를 고민 ” 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가 “ 오늘날까지 지배력을 보여주는 기본적 국제관계의 문법을 제시했다 ” 고 평가한다 .
‘ 공적인 일 ( 公事)’ 을 뜻하는 고대 로마의 ‘레스 푸블리카 (Res Publica)’ 는 훗날 ‘ 공화국 (Republic)’ 으로 연결된다 . 로마는 “ 왕정과 같은 독점과 폭정 ” 을 미연에 방지했다 . 선출된 집정관이 권력의 정점에 있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는 없다 . “ 로마의 인구를 조사하거나 건물과 공중도덕을 관리 ” 하는 감찰관이 견제와 균형을 이뤘다 , 제도적으로 권력을 분산한 것이다 . 이민자를 차별하지 않고 노예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한 개방성과 통합성은 당대의 정치 문법이자 로마의 영토 확장에도 이바지했다 .

로마의 정치 문법은 도로와 건축에 잘 드러난다 . 로마의 도시들은 탄탄한 도로를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 로마의 레스 푸블리카는 그리스의 폴리스를 도로를 통해 확장했다는 점에서 , 한 단계 진일보한 문법이다 . 지은이는 로마의 모델이 로마 지배 아래 있던 프랑스와 영국에 이어 신대륙 미국 , 다시 19 세기에 이르는 아메리카 대륙의 수많은 신생국으로 전파되며 “ 전 지구적 영향을 확보 ” 했다고 평가한다 .
중세의 크리스천돔 (Christendom) 은 “ 고대와 중세를 연결하는 고리 ” 이자 “ 유럽의 역사를 현재까지도 뒤덮고 있는 거대한 지붕이자 구름 ” 이다 . 서유럽의 경우 종교와 정치의 기능적 분리와 그 분리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조직적 능력은 , 당대에는 엄청난 진통을 겪었지만 , 오늘에 이르러 “ 유럽 정치의 핵심적인 문법을 형성 ” 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 가톨릭교회는 법을 제정하고 해석하고 집행하는 독립적이고 전문화된 조직을 갖추었다 . 이는 “ 신도의 공동체를 넘어서 조직을 형성하고 규칙을 통해 운영되는 제도화 과정 ” 을 거침으로써 유럽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하나의 틀이 되었다 .
다만 사랑과 평화의 종교인 기독교가 십자군 원정처럼 맹목적인 전쟁을 고귀하게 여긴 것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 그 반성에서 비롯된 “ 계몽주의에서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진보적 역사관을 생산 ” 한 것만큼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 한편 반목을 거듭하면서도 “ 왕실 간 혈연으로 형성된 대륙적 네트워크 ” 에 기반을 둔 중세 유럽의 킹덤은 지배 계층의 횡적 동질성이 유독 강조되는 정치 문법이었다 . 킹덤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 다수의 문명에서 확인할 수 있는 “ 어느 정도 보편성을 띤 정치 문법 ” 이다 .

주민들이 정치의 주체로 나서는 , 즉 다수의 지배를 가능케 한 근대의 정치 문법은 ‘ 네이션 ’(nation) 이었다 . 지은이는 네이션을 “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강한 정치 공동체 ” 로 규정한다 . 다수의 자발적인 참여를 정치 공동체의 핵심 원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 이를 계승 , 발전시킨 것은 현대 유럽의 정치 문법인 ‘ 코스모폴리스 ’(Cosmopolis) 다 . 근대 유럽은 네이션들의 전성시대였다 . 하지만 “ 네이션의 경쟁과 충돌이 가져온 전쟁 ”, 즉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은 유럽에서 통합 운동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 영국에서 시장 중심 패러다임이 부상하고 , 프랑스에서는 국가 중심 패러다임이 실패하면서 경제적 통합의 중요성도 커졌다 . 1940 년대 후반 시작된 유럽 통합을 위한 노력은 철강과 석탄산업의 협력에 이어 군사적 통합으로까지 확대되었고 , 유럽연합 (EU) 이라는 “ 포괄적 통합체 ” 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

이 과정에서 탄생한 ‘ 유럽 시민 ’ 은 앞서 설명한 유럽의 정치 문법 , 즉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와 로마의 레스 푸블리카 , 중세의 크리스천돔과 킹덤 , 근대의 네이션과 현대의 코스모폴리스의 기본 이념을 고스란히 계승한 정치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다 . ‘ 정치의 발명’을 이해하는 핵심은 , 지은이가 제시한 여섯 가지 정치 문법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구현된 오늘의 세계를 조망하는 일이다 . 각각의 정치 문법들을 소개하면서도 , 요령 있게 그 가치들의 조응 과정을 소개하는 점이야말로 ‘정치의 발명’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
장동석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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