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불이(不二)

1986년의 봄이었다. 조계종 총무원의 한 직원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셨다. 꿈속의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건봉사의 사리를 누가 훔쳐갔다. 꿈이었으나 생생했다. 꿈에서 깬 후에도 무언가가 그의 가슴을 눌렀다. 그는 휴전선 이남 모든 절의 명부를 꿰고 있는 이였다. 그는 다음날 곧장 고성 건봉사를 찾았다. 사리탑의 돌문이 열려 있었고 사리함은 없었다. 헛꿈이 아니었다. 그는 탑 주변을 수습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문화재 단속반을 찾아 이 사실을 전했다. 한 달이 지났다. 전화 한 통이 왔다. 건봉사의 사리가 봉천동 서울대 입구 어느 호텔에 있다. 신흥사의 스님이 맡긴 약봉지를 찾으러 왔다고 하면 줄 것이다. 제보였다. 의심했으나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호텔종업원이 누런 꾸러미를 내밀었다. 스님들은 불공으로 예를 올리고 포장을 풀었다. 사리함이 있었다. 그 후 도굴범들이 잡혔다. 넷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밤마다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꾸짖었다. 돌려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하셨다. 주범은 10년 형을 받고 복역 중 모범수로 5년을 살고 나왔다. 나와서는 마음잡고 식당을 하고 산다. 문화재청 사람들의 문화유산 이야기라는 책에 담긴 내용이다.
건봉사는 북쪽으로 누운 산줄기 위에 있다. 어떤 이는 그 줄기가 금강의 뼈라 했고 어떤 이는 설악의 맥이라 했다. 그러나 전란은 금강과 설악을 가리지 않았다. 절은 타고 돌만 남았다. 나무는 재가 되었고 재는 다시 흙이 되었다. 그 흙 위에 건봉사는 거듭 지어졌다. 그래서 터는 늙었고 절집은 젊다. 이 터에 처음 절을 지은 이는 신라의 승려 아도였다. 이름은 원각사였다. 이후 고려시대 나옹선사가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업 많던 조선의 세조가 다녀갔다. 어실각을 지었다. 왕들의 혼을 위로하는 전각이다. 그 후로 왕실의 원당이 되었다. 다시 대찰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의 본산이 된다. 팔도의 승려들이 모였다. 업보는 피할 수 없다. 살생의 업보를 지고 갈 자들만 남으라 했다. 모두 남았다. 해탈은 미뤄뒀다. 불교 앞에 다시 호국(護國)이 붙었다.
건봉사에는 일주문도 금강문도 없다. 산문은 오직 하나 불이문이다. 전쟁은 모든 걸 다 태우고 불이문만 남겼다. 불이(不二).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명과 해탈. 승과 속. 부처와 중생. 선과 교. 생과 사. 이 모든 분별이 사라진 자리. 바로 그 자리를 두고 조선의 승려들은 절을 가르는 계곡을 경계삼아 이판과 사판이 나눠 살았다고 해설사가 말했다. 아이러니다. 불이의 자리에 분별이 있었다. 이판사판은 흔히 갈 데까지 갔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말 절집에서 유래됐다. 조선 시대에는 승려들을 두 부류로 나눴다. 잡역에 종사하며 사찰의 살림을 보던 승려들이 사판승이고 승려 본분에 맞게 참선 수행하는 승려들이 이판승이다. 이 둘을 합친 말이 이판사판이다. 이판사판은 이판과 사판이 갈등이 생겼을 때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골이 깊어진 막다른 지경이다. 임진년의 건봉사에는 달랐다. 이판과 사판이 함께 싸웠다. 해설사가 그렇게 말했다. 그럼 또 말이 된다.
건봉사의 사리는 곡절이 많았다. 임진년에 왜놈들이 훔쳐간 통도사 진신사리를 사명대사가 일본 건너가 되찾아 건봉사에 봉안했다. 그 사리를 또 훔쳐갔던 것이다. 부처님의 사리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다. 수백 년의 믿음이다. 누군가는 그 앞에서 간절히 빌었고 누군가는 그것을 간간이 탐했다. 탐욕은 문을 열었고 깨달음은 문을 다시 닫았다. 부처님은 훔쳐간 자에게도 찾아야 하는 자에게도 나타나셨다. 악몽도 현몽도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길몽이 된다. 어둠과 깨달음은 경계가 없다. 불이다. 스스로 깨치려는 자에게는 뒷간도 선방이다. 결국 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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