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지지기반 뒤흔드는 ‘성착취범’ 엡스틴 유령…마가 분열 ‘내전’

정의길 기자 2025. 11. 14. 17:1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언급된 엡스틴 이메일 공개 뒤 균열 심화
마가 대표 의원 그린도 엡스틴 파일 공개 가담
지난 10월3일 미국 워싱턴 의회 앞 내셔널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제프리 엡스틴의 관계를 희화한 동상이 설치됐다. AP 연합뉴스

억만장자 미성년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틴의 유령이 다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흔들고 있다. 취임 뒤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진화했지만 꺼질 줄 모르는 엡스틴 사건의 불씨는 매번 트럼프 지지 기반인 마가(MAGA·미국의 다시 위대하게) 진영의 균열을 가속화하고 있다. 미국 의회에서 대표적 마가 인사로 꼽혔던 마조리 테일러 그린 하원의원(공화·조지아주)이 백악관의 반대와 회유에도 12일(현지시각) 엡스틴 사건의 수사 자료 공개를 강제하는 청원에 서명한 것이 상징적이다. 엡스틴 사건이 부른 마가 진영의 분열이 어느 때보다 도드라진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의회에서 가장 열렬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이고 마가 진영의 의제를 강력히 주장했던 그린으로서는 엡스틴 파일 공개 주장이 당연하다. 마가 진영은 미성년자를 성착취한 억만장자 엡스틴 사건은 민주당과 ‘딥스테이트’(정부 내 숨은 권력집단)들이 연루된 사건이라고 믿고 있다. 엡스틴이 2019년 교도소에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됐으며, 엡스틴의 고객들이었던 엘리트 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을 은폐하려는 음모이기에, 관련 자료 모두를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트럼프도 지난 대선 때 자료 공개를 주장했다. 그는 2020년 8월 폭스뉴스의 터커 칼슨 등과의 인터뷰에서 “엡스틴이 살해된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물론이다. 가능하다”면서도 “정말로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라며 타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2024년 6월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는 “엡스틴 파일을 공개하겠느냐”는 질문에 “공개하겠다”고 즉답했다. 석달 뒤 9월에도 그는 우파 인사의 팟캐스트에 출연해 엡스틴 파일 공개에 대해 “확실히 검토하겠다, 엡스틴 건에 대해서는 공개에 전혀 문제없다”고 단언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자, 그의 측근들은 한술 더 떴다. 법무장관에 임명된 팸 본디는 지난 2월21일 폭스뉴스와 회견에서 엡스틴 파일을 공개할 것이냐는 질문에 “검토하려고 지금 내 책상에 위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이다. 내가 검토 중이다”고 말했다. 5월27일에는 “엡스틴이 아동과 같이 있거나, 아동 포르노 수천건의 영상이 있고, 희생자가 수백명”이라고까지 말했다. 마가 진영은 기다렸다.

하지만, 법무부는 지난 7월7일 엡스틴이 자살로 죽었다는 것을 반박할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고, 엡스틴 사건과 관련해 다른 사람들을 기소할 ‘고객명부’는 없다고 밝히는 메모를 공지했다. 또 피해자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서 더 이상의 자료 공개는 없다고 덧붙였다. 트럼프도 엡스틴 관련 수사자료가 “지루하다”며 공개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법무부의 발표 뒤 트럼프는 “시간과 에너지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엡스틴에게 허비하지 말자”며 “우리 마가는 한 팀”이라고 강조했다. 마가 진영에서 반발이 일자 트럼프는 엡스틴 파일이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 전 대통령과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FBI) 국장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엡스틴의 타살과 파일의 존재를 믿은 마가 진영에서 불만과 반발이 터져 나왔고, 사그라지지 않았다. 지난 13일 민주당이 트럼프의 이름이 거론되며 그가 엡스틴의 사건에 연루됐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엡스틴의 이메일을 공개하자, 그 파장은 더욱 커지고 있다.

2020년 7월2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오드리 스트라우스 뉴욕 남부지방검찰청 검사가 손으로 제프리 엡스틴(왼쪽)과 그의 연인 길레인 맥스웰이 나온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AP 연합뉴스

그린 의원은 자신이 엡스틴 파일 공개을 요구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엡스틴의 성밀매단에 의한 희생자들인 미성년자들을 지원하려는 것이라며 “희생자들을 위해 하는 옳은 일”이라고 했다. 또 엡스틴 파일의 고객 명단을 주면 “그 이름들을 밝히는데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 “미국인들에게 투명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모든 자료는 고위 인사에 대해 “명예 손상, 정치적 민감성” 등이 있더라도 편집되지 않고 공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린은 수사자료 강제공개 청원에 가담하지 말라고 백악관으로부터 압력을 받자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지역구를 위해 일한다”고 압력을 일축했다.

그린의 이런 입장은 마가 진영 내에서 엡스틴 파일을 둘러싼 균열을 잘 보여준다. 엡스틴 파일 공개에 대해 트럼프가 입장을 바꾼 직후 마가 진영의 주요 인플루언서 등은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마가 진영의 이론가이자 백악관 수석 전략가를 지낸 스티브 배넌은 “마가 운동은 진실을 요구하는 운동”이라며 “트럼프가 엡스틴 문제를 회피하면 중간선거에서 40석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극우 인플루언서인 잭 포소비에크도 “엡스틴 리스트가 공개되지 않으면 우리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의 비공식적 측근이라는 극우 활동가 로라 루머도 “엡스틴 리스트를 공개하지 않는다면, 트럼프도 딥스테이트의 일부로 보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암살당한 극우활동가 찰리 커크가 주도한 청년 보수단체인 터닐유에스에이가 지난 7월 연 집회에서는 ‘엡스틴 사건에서 관심을 돌리자’는 트럼프에게 야유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엡스틴 파일 공개로 인한 마가 진영의 균열이 심각해지자, 로라 루머, 잭 포소비에크 등은 최근 트럼프를 옹호하며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그린 의원을 비롯해 폭스뉴스 진행자였던 터커 칼슨, 스티브 배넌, 팟캐스터 베니 존슨 등은 여전히 엡스틴 파일을 주요 의제로 다루며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12일 미국 워싱턴 의회 앞에서 한 시민이 제프리 엡스틴 파일을 공개하라며 ‘미국은 진실을 원한다’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앞서 폴리티코는 마가를 포함한 극우 음모론 진영에서는 이 사건을 놓고 입장이 여러 분파로 나뉜다는 보도를 했다. 보도에 따르면 우선 트럼프를 비롯해 본디 법무장관 등은 ‘엡스틴 음모론은 틀렸으니 이제 논란을 끝내자’는 입장이다. 둘째, 스티브 배넌 등은 ‘딥스테이트가 트럼프 쪽을 방해한다’고 주장해왔다. ‘엡스틴가의 일원인 딥스테이트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째, 터커 컬슨 등은 ‘엡스틴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작원’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며, 이른바 이스라엘 관련설을 주장한다. ‘이스라엘이 미국에서 로비를 하려고 엡스틴을 기용해 주요 인사드를 포섭해 약점을 잡았다’는 것이다. 넷째, 로라 루머 같은 극우 인플루언서들은 ‘트럼프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본디 장관 등을 축출해야 한다’는 충성파 부류가 있다. 다섯째, ‘트럼프가 사실을 덮고 있다’며 지지를 철회하는 극우 팟캐스터들이 있다. 여섯째, 제이디 밴스 부통령, 댄 번지노 연방수사국 부국장 등은 입장을 정하지 못한 침묵파들이 있다. 엡스틴 파일 공개를 요구했던 일론 머스크는 민주당의 이메일 공개 이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이때문에 엡스틴 사건은 마가 진영 내에서 내전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뉴리퍼블릭은 지적했다. 기존 주류 출신의 트럼프 충성파와 마가 운동을 트럼프의 이익에 종속하기를 거부하는 반주류 순수주의자에게 이번 엡스틴 사건은 트럼프 이후 마가 운동을 주도권을 둔 초기 시험이라고 뉴리퍼블릭은 평가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