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퇴한 서남동 인쇄거리, '예술'로 활기 되찾는다

박찬 기자 2025. 11. 1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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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예술 프로젝트 '서남예술살이' 결과전
오는 20일까지 광주 동구 스페이스 빈틀서
'내려앉아, 치훑어라' 주제…작품 5점 선봬
참여작가 5인, 회화·사운드·조각·사진 등
"각자의 시선 통해 장소성을 예술로 재발굴"
11일 광주광역시 동구 스페이스 빈틀에서 공공예술 프로젝트 '서남예술살이' 결과보고전 '내려앉아, 치훑어라'가 개막한 가운데 권려원 작가가 작품 '굴려지는 것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찬 기자

기계 진동음, 철판 긁히는 소리, 잉크 향이 뒤섞인 공간에서 다섯 명의 청년 예술가들이 지난 3개월간의 '예술살이'를 풀어놓는다. 공공예술 프로젝트 '서남예술살이' 결과보고전 '내려앉아, 치훑어라'가 오는 20일까지 광주광역시 동구 스페이스 빈틀에서 열린다.

11일 찾은 광주 동구 서남동 인쇄 거리 골목. 잉크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좁은 골목 끝에 자리한 '스페이스 빈틀'은 낯선 활기로 들썩였다. 광주시 최초로 행정안전부 '청년마을 사업'에 선정된 1995Hz 서남예술촌의 첫 결과물 전시가 개막했기 때문이다. 서남동에 체류하며 마을의 기억과 장소성을 탐구한 김은택, 권려원, 안진선, 이호진, 여송주 작가가 회화, 사운드, 조각, 오브제 등 각자의 언어로 '서남동에 남겨진 시간'을 더듬는다.

"죽은 마을을 되살리는 게 아니라, 사라지는 결을 감각하는 일이죠."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것은 인쇄 폐기물을 이용해 완성된 알루미늄 구조물이다. 권려원 작가의 작품 '굴려지는 것들'은 인쇄소의 리듬을 포착한 듯한 화면이 인상적이다. 잉크가 번지는 질감과 손의 움직임이 생생히 살아 있다. 권 작가는 "50년 넘게 인쇄소를 지켜온 사장님의 손에는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감각이 배어 있었다"고 말했다. 얇은 종이를 지탱하는 사소한 구조물들이 이 도심을 버텨온 힘이었다는 걸 새삼 체감한 셈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기계 소리, 잉크 향, 손의 리듬이 하나의 감각적 체험으로 이어진다.

서울 기반의 안진선 작가는 녹슨 철판과 덧댄 테이프 조각을 접어 만든 '접고 펼치는 흔적'을 선보였다. 관객이 직접 넘길 수 있도록 세로로 설치된 작품은 도시의 질감을 한 장씩 넘기는 '시간의 책장'처럼 작동한다. 그는 "서남동 거리를 걷는 행위 자체가 작업이었다. 시민들이 이곳의 흔적을 손으로 넘기며 시간의 결을 느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호진 작가가 작품 '서남동 의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찬 기자

폐기물로 만든 가구, 사운드로 재구성된 거리도 전시 공간을 채우는 결과물들이다.

목포 출신의 이호진 작가는 인쇄소에서 수거한 잉크통과 크라프트지, 벨트 조각을 모듈형 가구로 재구성했다. 의자 옆에 세워진 스탠딩 조명은 스스로 빛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그는 "보통 의자는 '앉는 가구'로만 생각하지만, 이 작품은 지역의 이야기와 공공성을 품고 있다. 인쇄소의 공정이 한 권의 책을 완성하듯 공동체도 서로 다른 조각들이 모여 완성된다고 믿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여송주 작가는 전시장에 '서남동의 소리'를 불러왔다. 그는 입주 기간 인쇄 거리 일대를 10~30m 간격으로 걸으며 시간대별 소리를 채집했다. 하수관의 물소리, 주차장 차단봉의 덜컹임, 기계의 진동음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입체적 사운드는 관객을 '소리의 거리 산책'으로 초대한다. "듣기만 했을 때 처음으로 거리가 낯설지 않았어요. 소리만으로 장소를 감각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여 작가는 관객이 자유롭게 움직이며 사운드와 인터랙션할 수 있는 공간을 구현했다.

김은택 작가는 서남동의 폐가에 빛을 비췄다. 회화와 영상 설치를 병치한 그의 공간은 시간의 단절을 '빛'으로 매개한다. 그는 "사람의 입장에선 쇠퇴한 공간이지만, 빛의 입장에서는 더 넓은 기회의 공간"이라며 "과거의 부흥, 현재의 정지, 미래의 가능성을 빛으로 잇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공공예술 프로젝트 '서남예술살이'에 참여한 작가 5명이 동구 스페이스 빈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여송주, 김은택, 이호진, 안진선, 권려원. 박찬 기자

이번 전시는 단지 지역 재생 프로젝트의 결과가 아닌, 사라져가는 거리와 함께 호흡하며 예술로 마을의 살아남은 역사성을 추적한 흔적이다. 작가들이 세 달간 머물며 주민들과 식사하고 대화한 경험이 작품 곳곳에 묻어 있다.

"서남동은 상냥한 사람들이 많은 동네예요. 사람 냄새가 납니다. 관객들이 전시를 관람한 후 골목 구석구석을 함께 걸어주면 좋겠어요." 작가들의 이러한 바람처럼, 전시 제목 '내려앉아, 치훑어라'는 오래된 마을에 천천히 내려앉아, 그 결을 손끝으로 쓸어보라는 초대로 다가온다.

한편 '서남예술촌' 사업은 청년 예술가들이 서남동에 머물며 지역과 예술의 접점을 실험하는 플랫폼이다. '서남예술살이'는 이 사업의 일환으로 공공디자이너 양성 프로그램이다. 이 사업의 1호 갤러리인 스페이스 빈틀은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청년 예술가들의 실험을 꾸준히 이어갈 예정이다.

정현우 1995Hz(헤르츠) 팀장은 "서남예술살이는 지역을 소재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장소성을 예술로 재발굴하는 과정"이라며 "이번 전시가 서남동을 알아가는 첫걸음이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