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CEO는 정리업무役” 학설 깨부순 ‘월가 퀸’[더 비저너리- 제인 프레이저 씨티그룹 회장·CEO]

도현정 2025. 11. 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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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사 父 밑에서 용돈 관리법 배운 소녀
맥킨지 등 거쳐 월街 은행 첫 여성CEO로
출산직후 승진에도 육아 위해 시간제 근무
씨티그룹 임원 발탁땐 남편 ‘전업주부’ 외조
소매금융 부진 등 씨티 위기마다 ‘구원투수’
워런 버핏 ‘30억달러 주식 매수’ 힘 보태
구조조정·체질개선…올해 주가 37% 상승
APEC서 “회복력·혁신·포용적 성장” 강조
천문학적인 돈을 주무르는 기업인, 말 한 마디에 주가가 출렁이는 금융인, 미래를 바꾸는 창업가, 국제정세를 쥐락펴락하는 지도자. [더 비저너리]는 세상의 흐름을 주도하는 파워 리더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무엇이 현재의 그들을 만들었으며, 어떤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의 생생한 스토리를 전해 드립니다.
제인 프레이저 씨티그룹 이사회 의장 겸 최고경영자가 지난달 31일 경북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에서 ‘세계 경제의 다음 로드맵’을 주제로 연설하고 있다. [연합]

글로벌 금융의 중심지인 미국 뉴욕의 월가(街)는 공공연한 백인 남성들의 격전지였다. 석사 이상의 학위를 달고 나와 고급 정장과 명품 서류가방으로 무장한 백인 남성들은 천문학적인 돈이 투입된 거래를 주무르며 고액연봉을 전리품으로 챙겨왔다. 여성, 혹은 유색인종은 끼어들 틈이 없었던 백인 남성들의 아성을 2020년 9월 한 여성이 깼다. 미국 3위의 금융그룹 씨티를 이끌 새로운 수장으로 제인 프레이저(58)가 지명된 것이다. 미 유력 경제매체 포춘은 이를 “가장 높고 가장 단단한 월가의 유리천장이 깨진 순간”이라 명명했다.

제인은 이후 유연한 대응으로 회사의 성장을 이끌면서도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왔다. 지난달 31일에는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최고경영자 서밋에서 ‘세계 경제의 다음 로드맵(The next Roadmap for the Global Economy)’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했다. 제인은 이날 APEC의 성장을 이끄는 세 가지 축으로 회복력과 혁신, 포용적 성장을 들었다. 이는 그가 컨설팅 기업과 금융그룹에 근무하는 동안 아시아와 남미 등 세계 시장을 직접 경험하며 얻은 혜안을 토대로 한 것이다.

캐디 아르바이트 하던 소녀, 경제학도로

제인 프레이저의 뿌리는 투박하고 단단한 스코틀랜드다. 회계사였던 제인 프레이저의 아버지는 그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면모가 있었다. 1967년 얻은 소중한 외동딸이었지만 하고 싶다는 것을 마냥 다 들어주지 않고 ‘원칙대로’ 키웠다. 프레이저는 “스코틀랜드인 회계사 아버지 밑에서 정해진 기준 이상의 용돈을 얻으려면 스스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었다”며 “집 근처 골프장에서 캐디로 일하며 용돈을 충당했다”고 말했다.

제인이 12살 되던 해, 태어나고 자란 세인트 앤드루스를 떠나 호주로 이민을 갔다. 케임브리지 거튼 칼리지에 진학해 경제학을 배운 그는 “공부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장소였고, 영감을 주는 곳이었다”며 “그곳에 다닐 수 있다는게 얼마나 큰 특권이었는지 모른다”고 회상하곤 했다.

졸업후 그는 런던에 있는 골드만삭스에서 인수합병(M&A) 분야 애널리스트로 금융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제인은 1992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미국에서 금융인으로 성공하기 위한 ‘법칙’과도 같은 코스다. 제인이 선택한 이 엘리트 코스는 이후 그의 경력과 가정을 모두 단단히 다지는 시작이 됐다. 하버드에서 제인은 현재의 남편 알베트로 피에드라를 만났다. 쿠바 출신 금융인인 알베트로도 제인과 비슷한 선택으로 하버드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었다.

MBA 과정을 마친 제인이 향한 곳은 컨설팅 그룹인 맥킨지&컴퍼니였다. 금융사가 아닌 컨설팅사를 택한 것에 대해 제인은 “당시 금융계에는 여성이 많지 않았고, (금융계 여성들은) 남자들보다 더 무서워야 했다”며 협업(파트너십)을 선호하는 자신의 성향에 컨설팅사가 더 적합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맥킨지로 눈을 돌린 이유 중 하나는 가정이었다.

젊은 시절 제인 프레이저와 그의 아들 카메론의 모습. 제인은 씨티그룹 CEO가 된 이후에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외에 딱히 취미라 할만한게 없다고 전했다. [로이터]

’승진기, 임신금지’ 불문율 깨고 출산…그래도 승진

제인은 맥킨지에서 금융서비스와 글로벌 전략 분야를 담당하며 근 10년을 일했다. 1996년에는 알베트로와 결혼을 했고, 연달아 두 아들을 출산했다. 90년대 일과 가정을 모두 손에 쥐고 경력을 이어나가려던 여성들 사이에서는 “승진 여부가 결정되는 해에는 임신을 피하라”는 조언이 불문율처럼 자리잡았다.

그러나 제인은 승진 대상자였던 시기에 첫 아이를 임신했고, 2000년 출산 2주 후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다 전화로 파트너 승진을 통보받았다. 컨설팅 기업에서 파트너는 사업 개발 등을 총괄하는 임원진이다. 제인은 승진 이후에도 아직 어린 두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파트타임(시간제)으로 근무했다. 여기에는 맥킨지의 포용적인 정책도 한 몫 했다는게 제인의 전언이다. 그는 “파트너가 되던 시기에 엄마가 됐고, 파트너십 기간 내내 파트타임으로 일했다”며 “맥킨지는 그 점에 대해 정말 대단했다. 덕분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전까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전했다.

제인은 엄마가 되기 직전인 1999년 맥킨지에서 다른 직원 3명과 함께 ‘세계를 향한 경쟁:위대한 글로벌 기업을 만들기 위한 전략(Race for the World: Strategies to Build a Great Global Firm)’이라는 책을 공동 집필한다. 여기에서 씨티그룹으로 이어지는 연(緣)이 시작된다. 씨티그룹의 투자임원 마이클 클라인이 그녀를 눈여겨봤다. 클라인은 몇 년 동안 제인에게 씨티로 옮길 것을 제안했고, 2004년 제인은 이 제안을 수락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날벼락’…씨티그룹 ‘구원투수’로

씨티그룹 내에서는 그의 주전공이라 할만한 투자 및 글로벌 뱅킹 부문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2007년 10월에는 그룹의 글로벌 전략 및 인수합병 책임자로 승진했다. 순조로웠던 경력은 여기까지다. 날벼락처럼 20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 등 금융위기가 닥쳐왔다.

씨티그룹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파생상품에 투자한터라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거대 금융그룹의 파산이 불러올 파장을 우려한 미국 정부가 450억달러(약 64조6000억원)의 구제금융을 지원한 덕에 파산 위기를 넘겼다. 제인은 당시 그룹의 구조조정과 재구축, 사업부 매각 및 신규 자본조달을 담당하는 팀에 임원으로 들어갔다. 그룹의 사활을 결정하는 팀이었다. 격무가 불보듯 뻔한 상황. 이전처럼 일과 가정의 양립을 요구할 수 없었다. 결국 남편 알베트로가 ‘전업 아빠(stay at home dad)’로 전환했다.

금융 위기 극복을 위해 발버둥을 치던 2009년 6월에는 씨티 프라이빗 뱅크(PB)의 최고경영자(CEO)로 부임했고, 이어 2013년에는 씨티 모기지에 CEO로 부임했다. 씨티 모기지의 경우에는 직원 1000명을 해고하고 지점을 줄이는 등 구조조정의 고통이 뒤따랐다.

제인은 2015년 남미로 향했다. 씨티그룹 라틴아메리카의 CEO로 부임한 것이다. 라틴아메리카는 당시 씨티그룹의 매출 14%를 책임지는 주요 시장이었고, 제인은 24개국 본부의 운영을 책임지게 됐다.

남미에는 씨티그룹에서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숙제가 있었다. 멕시코에서 인수한 은행 바나멕스가 2014년 4억달러(약 5700억원) 규모의 불법대출을 승인, 내막을 들여다보니 임직원들의 리베이트 수수와 회계부정까지 나왔던 것이다. 이로 인해 씨티그룹은 연방수사국(FBI)과 증권거래위원회(SEC) 조사를 받고, 2015년에 9740만달러(약 1400억원)의 벌금까지 내야 했다.

지난 2022년 9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 청문회에서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체이스 & 컴퍼니 회장 겸 CEO(왼쪽부터), 제인 프레이저, 브라이언 모이니한 뱅크 오브 아메리카 회장 겸 CEO, 윌리엄 로저스 주니어 트루이스트 파이낸셜 코퍼레이션 회장 겸 CEO가 증언하고 있다. 제인이 2021년 씨티그룹 회장으로 공식 취임한 이후에도 월가에서는 금융그룹 여성 CEO가 나오지 않다 올해 들어서야 새 여성 CEO가 추가됐다. [게티이미지]

‘월가의 문제아’가 된 씨티그룹의 CEO 자리에

바나멕스의 손실을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제인 임기 동안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자산관리, 모기지 비즈니스가 뚜렷한 성장세를 보였다. 제인은 이즈음 웰스파고 은행의 CEO 후보군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깜짝 인선은 씨티의 몫이었다. 2020년 9월 마이클 코뱃 씨티그룹 CEO는 자신의 후임으로 제인을 지목했다.

제인의 그룹 CEO 발탁을 두고 유리천장이 깨졌다는 희망적인 의미부여만 있지는 않았다. 최고위직 여성에게 주어지는 것은 ‘정리업무(clean-up)’라는 비판적인 평도 있었다. 이는 조지타운 대학교 맥도너 경영대학원의 캐서린 틴슬리 경영학 교수의 연구에서 나온 말이다. 기업 이사회는 회사가 어려움을 겪을 경우 여성을 고위직에 임명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게 연구의 내용이다. 그만큼 씨티그룹의 상황도 암울했다. 2020년만 봐도 매출액은 전년과 거의 비슷한 743억달러(약 107조원)였는데, 순이익은 40%나 떨어진 114억(16조4000억원)달러였다. 씨티는 ‘월가의 문제아’로 불렸다.

여기에 CEO로 취임 하자마자 코로나19가 덮쳤다.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 제인은 특유의 유연함으로 위기에 하나 하나 대응해갔다. 씨티그룹은 재택근무를 적극 도입했고, 유연근무를 확대했다. 그는 여러 가지로 확장해놓은 사업구조를 단순화하는 작업부터 들어갔다.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인 취임 이후 1년만에 2만여명의 직원을 감축했다. 경쟁력 없는 사업 부문은 과감히 철수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과 브라질 등 여러 곳에서 소비자 금융을 매각했다.

제인의 노력은 뜻밖의 우군을 맞는다. 구조조정 계획 발표 몇 주 후에 워런 버핏의 버크셔 헤서웨이가 당시 30억달러(약 4조3000억원)에 가까운 씨티그룹 주식을 매입한 것이다. 버크셔 해서웨이는 올해초까지 3년여간 씨티그룹의 4대 주주였다. 올해 1분기에 씨티그룹 보유 지분을 전량 처분했지만, 이는 금융주 비중을 축소하고 소비재 기업 지분을 늘리는 것으로 전략을 전환했기 때문이다.

가시화된 ‘월가 퀸’의 마법...회장직까지 확보

제인이 진두지휘한 씨티의 구조조정안은 점차 그 효과가 가시화되고 있다. 씨티그룹은 올해 주가가 연초 대비 약 37% 가량 상승했다. 올해 매출은 전년보다 3.5% 성장한 수치인 840억달러(약 120조8000억원)를 돌파할 전망이다. 블룸버그, 월스트리트저널 등 경제 매체들은 “체질개선 성과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오펜하이머와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주요 애널리스트들은 씨티그룹 주식을 ‘매수(outperform)’ 또는 ‘강세(bullish)’ 의견으로 유지하고 있다. 목표주가를 100~110달러 수준으로 상향 조정하기도 했다.

제인 프레이저는 성과에 힘입어 이달부터 씨티그룹 CEO에 이사회 의장(회장)직까지 겸임하게 됐다. 블룸버그는 누구도 성공할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씨티그룹의 구조조정이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을 들어 “프레이저는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할 만한 자격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며 “씨티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프레이저를 앞으로 몇 년 더 자리에 묶어두는 것이야말로 그 일들을 완수하기 위한 현명한 방법으로 평가된다”고 일컫기도 했다.

그룹의 체질개선 효과가 가시화되면서 제인에게 돌아가는 보상도 넉넉해졌다. 제인은 그룹 CEO로 취임한 첫 해인 2021년에는 총 기본급 150만달러(약 21억6000만원) 2250만달러(약 333억7000만원)를 받았다. 이후 기본급은 줄곧 150만달러였고, 해마다 보너스나 주식보상 규모만 달라졌다. 2024년 연봉은 월가의 CEO들 중에서도 최고의 인상률이었다. 순이익을 전년 대비 37%나 끌어올린 실적을 인정받은 결과였다. 올해는 회장직까지 겸하게 되면서 2500만달러(약 359억7000만원) 상당의 제한적 주식과 100만주의 스톡옵션까지 추가됐다.

월가에선 올해 4월이 되어서야 유리천장을 깬 후임자가 나왔다. 자산규모 순위로 미국 내 5위인 U.S. 뱅코프에서 건전 케디아가 CEO로 취임했다. 그만큼 월가의 유리천장은 여전히 견고하다. 회장 겸 CEO로 새로운 장을 연 제인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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