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넘게 원인 모를 발열과 복통, 장염으로 착각”…희귀병 정체 알고보니 [생활 속 건강 Talk]
감염 아닌데 고열·복통 반복되면
‘유전성 재발열 증후군’ 의심해야
콜키신 효과 입증…생물학적 제제도
전문가들 “조기 진단이 예후 좌우”

30대 남성 A씨는 10년 넘게 원인을 알 수 없는 발열과 복부 통증에 시달렸다. 감염이나 알레르기, 류머티즘 등 다양한 검사를 받았지만 뚜렷한 이상은 없었다. 해열제로 잠시 열이 내려가도 수개월 뒤 다시 고열이 찾아왔다. 복부 CT(컴퓨터단층촬영) 검사에서 복막 염증이 발견되자 의료진은 전장유전체분석(WGS)을 시행했고, 그 결과 MEFV(마레노스트린·피린) 유전자 병인성 변이가 확인됐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가족성 지중해열(FMF)의 발병 원인이 명확히 규명된 사례다.
FMF는 ‘유전성 재발열 증후군(HRFS)’의 가장 흔한 유형으로, 원인 불명의 고열과 통증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희귀질환이다. 감기나 장염으로 오인돼 치료가 늦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진단이 지연될수록 합병증 위험이 커진다. 의료계에서는 “반복되는 고열과 복통이 감염 소견 없이 지속된다면 조기 검사를 통해 원인을 확인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요즘처럼 낮과 밤의 기온 차가 큰 환절기에는 발열과 두통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가 늘지만, 원인 없이 유사한 증상이 되풀이된다면 FMF를 포함한 HRFS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간헐적인 발열과 복통이 반복됐다면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단순 감기로 넘기기 쉬운 증상이지만 적절한 진단 시기를 놓치면 신장 기능 손상 등 심각한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에서도 6건의 FMF 사례가 보고됐지만 MEFV 유전자 변이의 병인성이 명확히 규명된 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올해 전장유전체분석을 통해 병인성 변이가 실제 발병 원인으로 확인되면서 국내에서도 유전자 기반 조기 진단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되고 있다.
A씨 외에도 42세 남성 B씨는 25년 전부터 흉부와 복부 통증, 38~39도의 발열이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통증이 흉부에서 복부로 이동하며 3~5일간 지속됐고 때로는 격렬한 운동이 발작을 유발했다. 수차례 항생제 치료를 받았지만 근본적인 호전은 없었다. 이후 유전자 검사로 FMF 진단이 확정된 뒤 콜키신 투여를 시작하면서 증상 빈도가 눈에 띄게 줄었고 일상생활도 가능해졌다. 의료진은 “조기에 진단해 치료를 시작한 것이 예후를 결정한 가장 큰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FMF 환자들은 감염의 징후 없이 발열과 복통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흉통, 관절통, 피부 발진 등이 동반되기도 하며 감기나 복막염, 장염 등으로 오인되기 쉽다. 이 때문에 진단이 늦어지는 환자들이 많고 여러 의료기관을 전전하는 ‘진단 방랑’을 겪는 사례도 적지 않다. 조기 진단과 맞춤 치료를 통해 질환의 진행을 늦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FMF는 면역체계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해 염증 물질이 과도하게 생성되면서 전신에 염증 반응을 일으키는 자가염증질환이다. 본래 중동과 지중해 연안에서 흔히 발생했지만 최근에는 한국과 일본 등에서도 산발적인 발병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증상은 대체로 12~72시간 동안 지속되며 치료가 지연될 경우 신장 기능을 손상시키는 아밀로이드증 등 합병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희귀질환이라는 이유로 유전자 검사 접근성이 낮고 기존 진단 기준이 지중해 지역 중심으로 설정돼있어 비유병 지역인 한국에서는 과소진단되는 경우가 많다. 서울대·한양대·KAIST·워싱턴대·존스홉킨스대·이노크라스 등 국내외 6개 기관 공동 연구팀은 “전통적인 지중해 지역 중심의 진단 기준만으로는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FMF가 누락되거나 오진될 위험이 있다”며 임상 인지도 제고와 포괄적인 유전자 검사 확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FMF 치료의 목표는 염증 조절과 합병증 예방에 있다. 1차 치료제로는 콜키신이 사용되며 A씨 역시 복용 후 발작 빈도가 크게 줄고 6년 이상 안정적인 효과를 보였다. 그러나 일부 환자는 콜키신에 반응이 없거나 부작용이 나타나 IL-1 억제제(아나킨라·카나키누맙·릴로나셉트)나 IL-6 억제제(토실리주맙·사릴루맙) 등 새로운 생물학적 제제를 사용하기도 한다.
B씨의 경우도 콜키신 투여 후 초기 3년간 재발이 없었으나 이후 1~3개월 간격으로 발열과 복부 통증이 반복돼 의료진은 IL-1 억제제 투여를 고려했다. 이들 약제는 염증 유발 물질의 작용을 선택적으로 차단해 염증 반응을 억제하며 기존 치료의 한계를 보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생물학적 제제의 도입으로 치료의 선택 폭이 넓어졌지만 여전히 조기 진단과 맞춤 치료가 예후를 좌우한다고 강조한다. 이주하 서울성모병원 류마티스내과 교수는 “FMF는 진단이 쉽지 않지만 조기에 치료를 시작하면 예후가 매우 좋은 편”이라며 “진단 후 신속히 약물치료에 돌입하는 것이 권고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유전성 재발열 증후군 환자의 치료 환경은 나아지고 있지만 환자들이 보다 빠르게 진단받고 적절한 치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일선 의료진의 질환 인지도 제고와 유전자 검사 접근성 향상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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