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변호인, 후세 다츠지 - 해외편 <3> [일제 법정에 맞선 독립운동가·(14)]
독립 결기 지켜준 일본 변호사, 재판에서 이기고 판결선 졌다

도쿄 2·8 독립선언 유학생들 무료 변론
1923년 ‘관동대지진 학살’ 진상규명 나서
“애도할 말조차 찾지 못해…” 추모연설
유학생들이 주도한 도쿄 2·8 독립선언은 조선인들에게 독립을 향한 열망의 불씨를 키웠고, 한반도 전역에 만세운동을 촉발시켰다. 청년들의 용기를 보고 크게 감응한 이가 또 있었다. 일본인 중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이자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1880~1953)다. 그는 도쿄 2·8 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유학생들의 2심과 3심을 무료로 변론했다. 이후에도 조선인에게 불리하게 설정된 일제 사법 체계에 맞서 법정에서 박열(1902~1974)과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1903~1926) 등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법과 논리로 저항한 인물이다.

■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후세가 나고 자란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는 택시를 부르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조차 무용지물인 작은 마을이었다. 지난달 13일 경인일보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취재팀은 후세의 73주기(1953년 9월13일)를 맞아 ‘후세 다츠지를 현창하는 모임’이 개최한 기념식을 찾았다.

이날 오전 기념식이 열릴 예정이던 작은 공터에는 후세 다츠지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기념비에는 후세의 묘비명이자, 그가 평생을 걸고 지킨 신념인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예고 없이 내린 빗줄기에 기념식은 애초 예정된 장소가 아닌 인근의 주민 커뮤니티센터에서 열렸다.

커뮤니티센터 강당은 후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특히 후세와 인연이 있는 백발의 노인들이 많았다. 행사에는 사이토 마사요시 이시노마키 시장, 사카시타 켄 미야기현 의원, 후세의 후손 등이 참석했다. NHK 센다이 방송국 등 지역 언론사도 기념식을 취재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참가자들은 후세의 업적을 되돌아보며, 민중을 사랑하는 그의 정신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들은 후세에 대해 “일본 시민사회의 양심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이토 마사요시 이시노마키 시장은 “후세 다츠지는 이시노마키 출신의 위대한 대선배이자, 인권을 지키고 민중을 위해 한평생을 살아온 인물”이라며 “국경을 초월해 민중을 지키고자 노력한 인물이기에 시립박물관에 후세 다츠지 전시 공간을 별도로 마련하는 등 그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카시타 켄 미야기현 의원도 “후세는 평생을 약자를 위해 살아온 대단한 인물로, 그의 가치관과 신념은 미래 세대가 꼭 배워야 할 자세”라고 했다. 이들은 최근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걱정하면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지하며, 내국인과 외국인을 차별 없이 대하는 태도, 약자와 인권을 중요하게 여긴 ‘후세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 그대는 역사의 승리자요, 박열·가네코 후미코와의 만남
일제 ‘불령선인’ 수색 명문, 조선인 감시
체포된 박열·가네코 후미코에 누명 씌워
‘천황 암살 계획’ 대역죄로 무리한 기소
제국주의 억압 폭로 기회… 당당히 재판
열변 토한 후세, 판사 압도한 5시간 변론
그럼에도 사형… 박열 “재판장 수고했네”
가네코, 의문의 자살… 박열 1945년 출소
환영회 후세 “후미코씨 생환 못한 슬픔”
후세는 어떠한 업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이름을 올린 것일까. 2017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 후세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변호인으로 얼굴을 드러낸다. 후세는 일본 천황제와 제국주의의 만행을 드러낸 이들 부부와 인연을 쌓고 일제 법정에서 변호했다.
시작은 1923년 9월1일 ‘관동대지진’이었다. 이날 오전 11시 58분께 진도 7.9의 강력한 지진이 도쿄와 요코하마를 강타했다. 도시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1일에만 사망자 9만명, 부상자 10만명이 발생한 엄청난 재난이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의 대책 마련은 지지부진했고,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그러자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그 화살을 돌리기로 한다. ‘조선인들이 혼란을 틈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극물을 푼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재향 군인, 청년·소방단원 등으로 구성된 자경단은 무기를 들고 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일제는 이를 묵인했다.
후세는 조선인 학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앞장선 후세는 추모 연설을 통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서운 인생의 비극이었다”며 “조선에서 온 동포들의 최후를 생각하면 애도할 말조차 찾지 못했다”고 한탄했다.¹
지진이 발생한 지 이틀이 지난 9월3일, 일제는 선량한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수색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사실상 조선인들을 불시에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때 도쿄의 한 경찰서에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 그리고 이들이 조직한 ‘불령사’의 회원들이 붙잡혔다. 경찰은 애초 그들이 일정한 거주와 생업이 없이 배회했다는 이유로 한 달 동안 구금에 처했으나, 조사 과정에서 그들이 폭탄을 구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박열과 가네코 등 불령사 회원들은 천황과 황태자를 살해하기 위해 폭탄을 수차례에 걸쳐 구했다. 대지진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이들은 같은 해 10월 황태자 히로히토의 성혼식에서 폭탄을 던질 예정이었다. 조선인을 ‘악마화’하는 데 혈안이 된 일제는 충분한 증거와 진술도 없이 박열과 가네코에게 ‘대역죄’ 혐의를 씌워 무리하게 기소했다. 박열과 가네코는 오히려 이를 기회로 여겼다. 박열과 가네코는 자신들을 처단하려는 일제 법정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조선에 대한 일제의 억압을 폭로하기로 마음먹었다.
박열은 일본 대심원 특정법정 공판이 열리기 전 재판부에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자신은 피고로서 법정에 서는 것이 아니라 조선 민족을 대표해 법정에 서는 것이니 조선의 왕관을 쓰고 왕의 의복을 입게 할 것. 둘째, 자신은 일본이 조선을 강탈한 강도 행위를 탄핵하고자 법정에 서는 것이니 일본 천황을 대표해 재판관이 자신의 질문에 대답할 것. 셋째, 조선어로 말하게 할 것. 넷째, 재판관의 좌석과 동등한 높이에 앉게 할 것.
대심원 재판부는 고심 끝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을 수용한다. 세 번째 조건은 의사소통을 어렵게 한다는 이유로 거부됐고, 네 번째 조건은 ‘세간의 눈이 있으니 참아달라’는 재판장의 부탁을 박열이 수용해 철회했다.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조선인이 떳떳하게 일제 사법부에 요구 조건을 내건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일제 사법부가 얼마나 무리한 기소를 했는지는 박열과 가네코의 모습이 담긴 이른바 ‘괴사진’에 엮인 이야기에서도 살필 수 있다. 예심 제5호 조사실에서 박열의 무릎 위에 가네코가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다정한 모습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박열과 가네코가 대역죄를 지었다는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다테마츠 예심판사가 박열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가네코를 불러 두 사람의 모습을 촬영해준 것이다.²
뿐만 아니라 사법부는 자국민인 가네코를 전향시키기 위해 수차례 회유했다. 그들의 정신 감정을 의뢰해 그들이 법정에서 펼치는 주장과 사상을 정신이상자의 일탈 행위로 납작하게 일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일제의 시도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괴사진’이 세상에 드러난 뒤, 대역죄인을 우대했다는 우익 인사와 야당의 맹공에 이듬해 내각이 붕괴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 재판장을 압도한 후세의 기세, 5시간의 변론에도 ‘사형’
후세의 출생지 일본 미야기현 작은 도시
기념비 세워… 올해 서거 73주기 기념식
지역인사·언론 찾아 “시민사회 양심 대표”
1926년 2월26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첫 공판이 열렸다. 이들의 ‘대역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모았고, 이날 평소보다 추운 날씨에도 사람들은 박열과 가네코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새벽부터 대심원 재판소 앞에 모여들었다. 경찰과 헌병 등 100여명이 재판소를 둘러쌌다. 오전 7시가 되자마자 일반 방청권 150장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특별 방청자로 선정된 기자와 사진반 등 150명도 이른 아침부터 재판소에서 박열과 가네코를 기다렸다.
하지만 재판부는 ‘안녕 질서를 방해하는 사건’이라는 이유로 재판 공개를 금지했다. 재판부는 공판이 개정된 지 겨우 10분 만에 방청객을 퇴정시켰다. 이날 ‘자연인연맹’의 회원 5명이 “특별 방청을 허락하라”며 외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다음날 열린 2차 공판. 검사는 2시간 동안 논고를 펼친 뒤 박열과 가네코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이날 오후 후세의 변론 시간이 됐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오랜 친구였던 후세는 이들을 변호하며, 오직 형량이 ‘사형’뿐인 천황에 대한 대역죄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무죄를 주장했다. 선처를 부탁하거나 사정을 바라는 호소는 없었다.
후세의 변론은 정치와 사회 학설로 시작했다. 후세의 기세는 방청객은 물론 판사까지 압도했다. 그는 탁자를 마구 두드리며 불같은 열변을 토해냈다고 한다. 후세는 검사의 논거를 반박했고, 검사가 제시한 증거는 일제가 일부러 죄인을 만들기 위해 조작한 것들이라고 주장했다. 또 후세는 박열과 가네코가 중대 행위를 저질렀을지라도, 이는 사회의 결함에서 시작한 것이라며 장장 5시간이 넘는 변론을 펼쳤다.³
후세의 논리적이면서 열정적인 변론에도 박열과 가네코는 3월25일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박열은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지만, 정신이야 어찌할 수 있겠는가”하며 오히려 담담하게 자신의 기개를 펼쳤고, 가네코는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사법부는 은사(恩赦) 조치를 통해 이들을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박열과 가네코는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일제의 기만에 크게 분노하며 은사장을 찢어버리는 등 저항했다.
박열은 22년 2개월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1945년 10월27일이 되어서야 자유의 몸이 됐다. 그러나 가네코와 함께 형무소에서 나오지 못했다. 가네코는 사형이 선고된 지 4개월 뒤인 1926년 7월 23일 갑작스럽게 감옥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형무소 측은 가네코의 자살 방식 등도 알리지 않은 채 그를 가매장했다. 후세와 흑우회 회원들은 가네코의 시신을 찾아내 화장하고 수습했다.
박열의 환영회에서 후세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화려한 생환을 진심으로 기뻐하지만, 자네는 환영하는 감격의 폭풍이 강하게 불면 불수록, 기쁨의 목소리가 높게 오르면 오를수록, 내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내던지는 감격의 공허를 고하지 않을 수 없다네. 후미코씨가 이 환영회장에 함께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쓸쓸함, 섭섭함, 슬픔이네.”⁴
후세는 오랜 친구 박열과 가네코를 변호한 뒤에도 평생을 조선 독립과 민중의 인권 옹호를 위해 바친다. 다음 편에서는 후세의 일생과 그의 사상, 국경을 초월한 후세의 법정 활약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 위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출처]
1) ‘大同公論(대동공론)’ 2권 2호
2) ‘新民(신민)’ 1926년 10월호 제18호
3) ‘조선일보’ 1926년 3월 8일자 기사
4) 후세 다츠지, ‘운명의 승리자 박열’, 2017

이시노마키/정선아 기자 su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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