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럽 왕국사’ 출간, 잊힌 체코 재발견

곽성일 기자 2025. 10. 23.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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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래디가 로마제국부터 현대까지 중앙유럽 2천년사를 담은 역사서
침략과 분열 속 형성된 정체성 조명…쿤데라가 외면한 체코 이름의 의미 되새김
▲ 중앙유럽 왕국사.연합

쿤데라가 외면한 '체코'의 이름, 그리고 래디가 복원한 '중앙유럽'의 기억

체코 출신 소설가 밀란 쿤데라(1929~2023)는 생전에 "소설 속에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말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대신 '보헤미아'라는 낡은 이름을 택했다. 짧은 국가의 역사보다 오래된 문명과 기억을 담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체코'는 인위적인 정치 단어였고, '보헤미아'는 수천 년의 상처를 품은 시적 공간이었다.

이 오래된 이름의 대륙을 탐사한 책이 나왔다.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의 슬라브·동유럽사 교수 마틴 래디가 쓴 '중앙유럽 왕국사'(까치)는 로마제국 시대부터 21세기 초까지 약 2천 년에 걸친 중앙유럽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한 방대한 역사서다.

그는 "중앙유럽의 역사는 침략과 분열, 재건과 타협이 끊임없이 반복된 이야기"라며 "이 반복 자체가 그들의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훈족에서 오스만까지, 아시아 기마민족의 그림자

중앙유럽은 서유럽과 동방의 경계이자, 대륙의 모든 침략로가 교차하는 지대였다.

로마가 몰락한 뒤 5세기에는 훈족의 족장 아틸라가 말을 몰아 이 땅을 점령했다.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은 그의 깃발 아래 로마군을 꺾었고, 훈족이 사라지자 아시아계 아바르족이 대평원을 차지했다.

뒤이어 헝가리를 지배한 마자르족, 13세기 몽골군, 그리고 15세기 오스만 튀르크까지 — 침입자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몽골군이 헝가리를 공략할 때는 군인과 농민, 부녀자 구분 없이 학살이 이어졌다.

헝가리 인구의 3분의 1이 이때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키이우(우크라이나)는 완전히 불타 "사람은 죽고 올빼미만 남았다"는 사료가 전해진다.

이처럼 아시아 초원의 기마민족들은 중부 유럽인들에게 '악몽의 존재'였다.

그래서 중앙유럽에는 '개 인간(犬人間)'이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사람의 몸에 개의 머리를 한 괴이한 종족.

그것은 단순한 인종적 비하가 아니라, 공포의 언어화였다.

루터 같은 종교개혁가조차 "오스만인은 개와 결혼해 잡종을 낳았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 공포는 신앙과 도덕의 언어로 치환되었다.

래디는 "기마민족에 대한 원색적 묘사는 그들의 폭력보다, 두려움의 반영이었다"고 해석한다.

그 두려움이야말로 중앙유럽인의 역사적 무의식이었다.

△끊임없이 분열된 왕국들, 합스부르크의 시대까지

이 책은 단순히 전쟁의 연대기가 아니다.

래디 교수는 침략의 파고 속에서 탄생하고 무너진 수많은 왕조들을 통해, '분열의 연속이 어떻게 하나의 문명으로 귀결되었는가'를 보여준다.

프랑크 왕국의 카를루스 마그누스(카를 대제)는 제국을 통합했지만, 그의 사후 유산 분할이 씨앗이 되어 왕국은 다시 쪼개졌다.

그 후신이 된 '신성로마제국'은 이름만 제국이었을 뿐, 수백 개의 공국과 봉건 영지로 흩어졌다.

이 분열의 무질서 속에서 결국 부상한 세력이 합스부르크가였다.

그들은 신성로마제국 황위를 세습하며 중앙유럽의 질서를 400년 넘게 지탱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의 물결이 동쪽으로 밀려오자, 제국은 균열을 피하지 못했다.

민족주의가 폭발하고, 1차·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합스부르크는 해체됐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민주주의의 이상이었지만, 냉전의 철의 장막은 곧 새로운 분열을 낳았다.

래디는 이 격동의 흐름을 "영원히 통합되지 않는 대륙의 운명"으로 요약한다.

△보헤미아의 시선으로 본 중앙유럽

'중앙유럽 왕국사'는 단순히 정치사나 왕조사를 다루지 않는다.

그 속에는 보헤미아·헝가리·폴란드·루마니아·슬로베니아 등 각 민족의 감정과 정체성의 층위가 촘촘히 깔려 있다.

학문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문체로, 래디는 중앙유럽의 역사를 하나의 거대한 '감정의 지도'로 재구성한다.

그가 그리는 중앙유럽은 한때 프랑스와 러시아, 오스만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변방이었지만,

동시에 유럽의 심장부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르네상스가 피었고, 종교개혁이 일었으며,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그만큼 중앙유럽의 역사는 유럽의 축약본이자 세계사의 실험실이었다.

그래서 쿤데라가 '체코' 대신 '보헤미아'라 부른 이유가 이제 선명해진다.

그 이름은 단순한 지역명이 아니라, 수많은 패배와 재건, 침묵과 고독의 시간을 견뎌낸 기억의 은유였다.

래디의 역사서는 그 기억을 다시 복원해낸다.

△분열로 존재하고, 기억으로 이어지는 대륙

'중앙유럽 왕국사'는 왕조의 흥망과 전쟁의 기록을 넘어,

한 대륙이 자기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싸워온 지난한 과정을 보여준다.

"중앙유럽은 국가보다 오래된 문명이며, 경계보다 오래된 감정이다."

이 말은 쿤데라의 문학에도, 래디의 역사에도 동시에 닿아 있다.

736쪽의 방대한 분량이지만, 각 장마다 인물의 생애와 사건의 감정선을 병치하며 서사의 흡인력을 잃지 않는다.

박수철 번역은 학술적 엄밀함을 유지하면서도 문체의 리듬을 살려냈다.

결국 이 책은 '왕국의 역사서'이자, 유럽이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문화사적 성찰이다.

그 길 끝에서, 우리는 보헤미아의 언덕 위에서 쿤데라의 문장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단단하지 못한 단어 위에 나라는 세울 수 있어도, 소설은 세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