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담벼락에 '스페인 가면 쓴 호랑이'… K컬처, 양국 청년예술가를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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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사절단이 거창한 게 아니더라고요.
그라포스 멤버 레이레 마틴(20)은 "스페인의 젊은 세대가 음악, 패션, 음식,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한국에 열광하고 있다"며 "혁신도시 서울에서 한국 청년들과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설렜다"고 말했다.
도시벽화단 홍진기(18)군은 "아이디어 스케치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그동안 작업했던 국보 벽화에 대해 설명하고 조선 민화 등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며 "스페인 친구들이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흥미롭게 받아들이고 배우려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그라포스는 "젊은 층에 익숙한 '종이의 집' 가면을 통해 반항과 자유를 상징하는 한편으로 한국 문화에서 강하고 영적인 존재인 호랑이를 가면과 결합해 서로 다른 정체성이 같은 에너지를 공유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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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의집·케데헌… 각국 상징 캐릭터들 벽화에 융합
"서로 문화 달라도 연결되고픈 바람은 모두 공통적"
문화 사절단이 거창한 게 아니더라고요. '같은 꿈을 향해 문화를 나누고 있는 우리도 사절단이 될 수 있구나' 깨달았죠. 자라온 환경도, 언어도 다른 우리가 넓고 낡은 벽을 캔버스 삼아 예술로 이어지는 순간을 경험했어요.

K컬처 신드롬이 1만㎞ 떨어진 두 나라 청년들을 서울의 널따란 담벼락 앞에 불러 세웠다. 한국 문화에 매료된 스페인 대학생들이 한국의 고등학생들과 함께 양국의 상징을 뒤섞은 벽화를 그리며 한바탕 난장을 펼친 것. 지난 12일 강남구에서 진행된 'K-스페인 도시 벽화 프로젝트' 얘기다.
한국·스페인 청년들, 도시예술 의기투합

강남 대표 랜드마크 코엑스에서 멀지 않은 구석진 폐건물에 활기를 입힌 한국의 '도시벽화단'과 스페인의 '그라포스(Grafos)'. 각각 벽화와 그라피티를 주무기로 이른바 '도시예술' 내지 '거리예술'을 추구하는 청년 단체다.
도시벽화단은 학교도 진로도 다른 고교생 8명이 미술적 재능을 살려 낙후 지역을 벽화로 되살린다. 지난해 여름 결성 이래 △서울 자양전통시장 벽화 △온양 온천 주차장 벽화 △서울남부터미널 컨테이너 리모델링 △공중전화부스 리모델링 등의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단체의 7번째 작업이자 외부단체와 첫 협업이다.
그라포스는 스페인 몬드라곤대에 다니는 스무 살 동갑내기 4명으로 이뤄졌다. 기업가정신을 함양하는 교육과정으로 유명한 레인(LEINN) 학과 소속으로 그라피티 중심의 도시예술 행사를 기획한다. 리더십(Leadership),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혁신(Innovation)의 앞글자를 딴 이 학과는 전공생에게 팀 단위로 회사를 설립해 사업을 기획·실행하게 한다. 그라포스 멤버들도 예술을 통해 사회문제를 탐구한다는 목표로 누라(Nura)라는 회사를 설립, 그라피티 아티스트를 고용한 라이브 전시와 참여형 워크숍에 주력하고 있다. 해외 프로젝트는 미국 뉴욕에 이어 서울이 두 번째이고 직접 창작에 나선 건 처음이다.
"스페인에서 K컬처 인기 실감해"

동서양의 생면부지 청년들을 연결해 준 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였다. 학내 해외 유학 프로그램을 통해 7주간 한국에 머물 기회를 잡은 그라포스가 지난달 말 방한을 앞두고 함께 작업할 팀을 온라인에서 수소문한 것. 도시벽화단은 반가사유상, 청동기 유물 등 국보를 재해석한 팝아트 벽화 작업을 인스타그램에 꾸준히 소개하고 있었고, 이를 발견한 그라포스는 도시벽화단에 연락했다.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 두 팀을 묶어준 건 한국 문화였다. 최근 몇 년 사이 K팝을 비롯한 K컬처에 열병을 앓고 있기로는 스페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라포스 멤버 레이레 마틴(20)은 "스페인의 젊은 세대가 음악, 패션, 음식,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한국에 열광하고 있다"며 "혁신도시 서울에서 한국 청년들과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설렜다"고 말했다.
두 팀은 우선 화상회의로 작업을 기획했다. 의사소통은 영어로 했다. 확실히 공유한 협업 메시지는 '연결'이었다. 문화의 힘으로 지리적 거리를 이었으니 이제 넓은 벽을 캔버스 삼아 공동 창작을 하면서 소통과 공감을 보다 깊게 하자고 했다. 그라포스가 한국에 도착한 뒤엔 마주 앉아 벽화 디자인과 장소를 본격적으로 의논했다.
도시벽화단 홍진기(18)군은 "아이디어 스케치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그동안 작업했던 국보 벽화에 대해 설명하고 조선 민화 등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며 "스페인 친구들이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흥미롭게 받아들이고 배우려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이어 "(그라포스 멤버들이) K팝과 K드라마에도 비상한 반응을 보여 K컬처의 영향력을 실감했다"고 했다.
서울에 양국 상징 캐릭터 결합한 벽화

한 달 만에 벽화 주요 디자인이 확정됐다.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의 아이콘 '달리 가면'과 스페인 배경 애니메이션 '장화 신은 고양이'에다가, K팝 소재 애니메이션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속 호랑이 '더피'를 각각 결합했다. 양국을 상징하는 캐릭터를 하나로 엮어 문화적 연결을 도모하자는 뜻이었다.
한국은 왜 더피였을까. 도시벽화단은 "처음부터 우리 세대에 익숙한 팝적 요소를 작품에 넣자는 공감이 있었다"며 "우리나라는 전통적 상징 동물인 호랑이로 하되 세계적 대중성이 확보된 케데헌 호랑이 이미지를 쓰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스페인을 상징할 캐릭터도 글로벌 인기 콘텐츠에서 찾았다. '종이의 집'은 2017년 5월 스페인에서, 그해 말부터는 넷플릭스에서 방영되면서 넷플릭스 시청시간 1위에 수차례 오른 범죄스릴러. 주인공 일당은 스페인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치솟은 콧수염을 본뜬 가면을 쓰고 금고를 턴다. 한국에선 하회탈 가면을 쓴 리메이크 작품이 나왔다. '장화 신은 고양이'는 메가히트 애니메이션 '슈렉'에 카메오로 등장했던 스페인풍 협객 고양이 '푸스'를 내세운 스핀오프작이다.
그라포스는 "젊은 층에 익숙한 '종이의 집' 가면을 통해 반항과 자유를 상징하는 한편으로 한국 문화에서 강하고 영적인 존재인 호랑이를 가면과 결합해 서로 다른 정체성이 같은 에너지를 공유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푸스와 더피, 고양이와 호랑이를 만나게 한 이유에 대해선 "힘과 지혜, 용기와 상상력 사이의 균형을 작품에서 드러내는 동시에, 예상치 못한 두 요소를 결합해 대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했다.

자유로움 속 하나 된 벽화 작업
벽 앞에서 붓과 스프레이만 들면 되게끔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작업 직전 변수가 발생했다. 평일에는 학교에 가야 하는 학생들이라 지난 주말인 11일과 12일 이틀 동안 벽화를 제작할 계획이었는데 하필 비가 내린 것. 조마조마 일기예보를 거듭 확인하며 조율한 날짜였지만 결국 11일 토요일 작업은 무산됐다.


벽체에 흰색 칠을 하는 밑작업, 밑그림을 그리는 스케치 그리고 채색까지, 일요일 하루에 끝내보자면서 두 팀은 12일 오전 9시 작업장인 지하철 2호선 삼성역 인근 골목 건물 앞에서 뭉쳤다. 간간이 비가 내려 잠시 쉬어갔지만, 낡은 벽은 어느새 우중충한 날씨를 뚫고 강렬한 원색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기둥과 몰딩으로 자연스레 넷으로 나뉜 담벼락 캔버스의 중앙엔 '장화 신은 호랑이'와 '달리-더피 가면'의 융합 이미지가 자리 잡았다.
유쾌함과 진지함을 넘나드는 작업 현장에서 두 팀의 작업 스타일도 융화됐다. 그라피티는 스프레이, 벽화는 물감과 페인트를 주로 쓰지만 이날은 도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서로의 페인팅을 도왔다. 한 멤버는 작업 도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일로 "비를 피하려 페인트를 안고 뛰면서 함께 웃었던 순간"을 꼽았다.

벽화 완성은 결국 다음 주말(18, 19일)로 미뤄졌다. 도시벽화단 지상현(18)군은 이날 작업을 마무리하며 "사람들이 이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벽 앞에 멈춰 서서 벽화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즐기다가 갈 수 있는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라포스 리더 에고이츠 두아르테(20)는 첫 해외 프로젝트 장소였던 뉴욕과 서울을 비교했다. "거리예술 프로젝트 관점에서 보자면 서울은 도시문화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에 있는 곳"이라며 "(뉴욕과는) 완전히 다른 창작 환경에서 배우고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는 값진 기회였다"고 말했다. 이어 "작품에 접근하는 방식이나 스타일은 모두 달라도, 예술을 만들고 사람을 연결하려는 열정은 모두 같다"며 "한국 청년들의 표현 방식이나 작업에 임하는 태도에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고 협업 소감을 밝혔다.
벽화, 잊힌 공간을 놀라운 캔버스로

두 팀에게 '벽'은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실내에 조성돼 입장객만 향유할 수 있는 박물관이나 갤러리와 달리, 걸어 다니는 누구나 관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벽화는 거리를 거니는 모두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예술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벽화의 의미를 물었다. "벽화는 단순한 벽을 공동체의 목소리로 바꾸는 힘이 있다. 때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를 전한다. 익숙한 공간을 새롭게 바꿔 감정적인 연결을 시도하는 예술이라는 점에 특별함을 느낀다."(그라포스) "한정된 공간에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펼칠 수 있다는 것이 벽화가 지닌 큰 강점이다. 공공의 공간이 모두의 기억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도시의 낡은 벽을 새로운 이야기의 무대로 만들고 싶다."(도시벽화단)
다시 협업하게 된다면 도전하고픈 과제로 도시벽화단은 "한반도 전통문화와 지중해 문화를 결합하는 '바다와 섬'을 주제로 한 작업물"을, 그라포스는 "젊은 세대가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받아들이도록 돕는 참여형 프로젝트"를 각각 꼽았다.
도시벽화단은 앞으로도 다른 문화권 작가들과 공동 작업을 이어갈 계획이다. 쿠바와 나이지리아를 우선 교류 대상으로 염두에 뒀다. 그라포스는 한국에 있는 동안 '불완전함'을 주제로 행사를 열고 싶다고 밝혔다. "누구나 자유롭게 스프레이를 들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열린 워크숍을 생각하고 있어요. '잘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에 거리예술을 망설이는 사람에게 그런 두려움을 창의력으로 바꾸는 경험을 제공하고 싶습니다."
도시벽화단 총무 이소윤씨는 "두 팀의 공동 벽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젊은 친구들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아이디어와 시너지가 있다"며 "아름다운 도시를 만드는 데 열정을 가진 청년들에게 주도적으로 벽화를 기획하고 완성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 사진= 황은서 인턴 기자 hes0803@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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