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익는 계절’…가을에 만나는 와인 11선
‘남산애’ 압착 않고 전 과정 수작업
단맛·신맛 적당, 육류·생선 다 어울려
국내 최초 교배 육종 청포도 ‘청수’
새콤·달콤 화이트와인에 안성맞춤
충주 사과, 제주 한라봉·감귤 등
지역특산물 활용…색다른 맛 자랑
탱글탱글 알알이 달콤함이 가득한 포도. 아쉽게도 포도의 계절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하지만 한국 와인을 통해서라면 우리 땅에서 나는 포도는 물론 다른 과일의 맛과 향을 오래도록 맛볼 수 있다. 25년 경력을 지닌 최정욱 소믈리에(최정욱와인연구소장, 전 광명동굴 와인연구소장)가 지역과 품종을 고려해 추천한 한국 와인 11종을 함께 맛봤다.

◆ 강렬한 붉은색의 유혹, 레드 계열 와인=“대부분의 한국 레드와인은 ‘캠벨얼리’나 ‘머스캣베일리에이(MBA)’ 포도, 아니면 토종 머루로 만들어요. 경북 경주 예인화원의 ‘남산애 내추럴’은 이 세가지 포도로 각각 와인을 빚고 나서 블렌딩한 것입니다.”
‘남산애’라는 이름은 와이너리가 경주 남산 아래 있어서다. 이곳에선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하며, 포도를 압착하지 않고 포도 더미 무게 때문에 저절로 흘러나오는 즙으로 와인을 만든다. 와인을 거를 때도 필터나 침전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익숙한 포도향이 나며 단맛이나 신맛이 강하지 않아 육류·생선 요리와 모두 잘 어울린다.
달콤한 와인을 맛보고 싶다는 말에 최 소믈리에는 경북 영천 대향와이너리의 ‘머루 아이스와인’을 꺼냈다. 짙은 자주색을 띤 이 와인은 ‘MBA’와 ‘샤인머스캣’으로 빚은 와인을 혼합해 완성한다. 시럽처럼 진득한 식감과 진한 달콤한 맛이 특징이다. 독일에서 유래한 아이스와인은 기온이 영하 7℃ 아래로 내려갈 때까지 기다린 뒤 얼어서 당분이 응축된 포도를 수확해 빚는 와인이다. 최 소믈리에는 “영천에선 포도가 얼 때까지 기다리기 어려워 포도즙을 얼린 뒤 살얼음만 걷어내는 방식으로 농도를 높였다”고 말했다.
충북 영동 갈기산포엠와이너리의 ‘포엠 로제’는 분홍빛 로제 와인이다. 색이 옅은 ‘킹델라웨어’ 품종을 사용하기 때문에 분홍빛을 띠는데, 국내에서 이 포도로 빚는 유일한 와인이다. 체리·자몽·레몬 등 다채로운 과일향이 나며 적절한 단맛과 신맛이 조화를 이룬다.

◆ 투명함 속 산뜻함, 화이트와인=“한국 화이트와인을 논할 때 ‘청수’ 품종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죠. 영동 시나브로와이너리는 국내 최초로 청수 와인을 생산한 곳입니다.”
‘청수’는 1993년 탄생한 국내 최초의 교배 육종 청포도다. 포도가 익으면서 알이 잘 떨어지는 문제가 발견됐지만, 와인을 빚으면 산미와 과일향이 풍부하고 황금빛 술색을 만들어내 양조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시나브로와이너리의 ‘청수 화이트’는 침샘을 자극하는 새콤함이 먼저 느껴지고, 이어 은은한 달콤함이 따라온다.
포도시장의 판도를 바꾼 샤인머스캣은 와인으로도 그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최 소믈리에는 경북 상주 원더풀월드와이너리의 ‘비에호 아미고 화이트’와 상주 젤코바와인의 ‘파밀리아 세미드라이’를 추천했다.
“샤인머스캣 와인은 끝에서 날카로운 알코올향이 나는 게 특징이에요. ‘비에호 아미고’는 유기농 인증을 받은 샤인머스캣을 15℃ 이하에서 저온 숙성시켜 만들어요. ‘파밀리아’는 적당한 단맛과 신맛의 조화가 좋습니다.”
같은 지역에서 같은 품종의 포도로 만들었지만 ‘비에호 아미고’는 11도, ‘파밀리아’는 12.5도다. 빛깔은 ‘비에호 아미고’가, 단맛은 ‘파밀리아’가 더 진하다.
마지막 주인공은 영동 여포와인농장의 ‘여포의 꿈’. ‘머스캣 오브 알렉산드리아’라는 품종을 사용하는데 국내에선 보기 어렵지만 유럽에선 와인을 만드는 데 많이 사용한다.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딸 이방카 백악관 보좌관이 방한했을 때 청와대 만찬주로 선정되기도 했다. 청와대에 ‘여포의 꿈’을 추천했던 최 소믈리에는 “서양인에게 익숙한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면서 만찬 메뉴인 비빔밥과 잘 어울린다”고 설명했다.

◆ 취향 따라 다채롭게, 비포도 와인=“프랑스에선 포도주만 와인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색다른 비포도 와인이 다른 나라에선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맛을 자랑하죠.”
최 소믈리에가 가장 먼저 꺼낸 건 돌배를 사용한 강원 삼척 너와마을영농조합의 ‘끌로너와 도레’다. 한국 토종 배인 돌배는 시고 떫어서 주로 술이나 식초를 담가 먹는다. ‘끌로너와 도레’에선 일반적인 배의 맛과 향은 전혀 나지 않는다. 은은한 산미와 묵직한 향이 낯설면서도 매력적이다.
다음은 충북 충주 작은알자스의 ‘레돔 시드르’. 프랑스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가 충주 사과를 이용해 프랑스 농가의 전통 기법으로 빚은 스파클링 와인이다. 사과 껍질에 붙은 천연 효모로 발효하며 설탕도 넣지 않는다. 도수가 6도로 낮고 달지 않지만 강한 탄산 덕에 심심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전북 부안 내변산양조장의 ‘멀베리 누보’는 오디로 빚은 와인이다. 오디주와는 어떻게 다를까? 오디주는 오디를 소주나 증류주에 담가 만드는 반면, 오디 와인은 오디 속 당분을 발효시켜 알코올로 만든다. 맛과 향에서 진하고 달큼한 오디의 풍미가 느껴진다.
제주 서귀포 시트러스의 ‘마셔블랑’은 한라봉과 감귤, 감귤꽃꿀을 사용했다. 기분 좋은 상큼한 귤향이 나며 달지 않으면서 새콤한 맛이 입안에 산뜻하게 퍼진다.
시음을 마치고도 의문이 맴돈다. 막걸리가 우리술이듯 와인 하면 역시 프랑스 아닐까. 최 소믈리에에게 물었다. 왜 한국 와인을 마셔야 할까.
“술은 그 나라 음식에 맞게 발전해왔어요. 한국 음식에는 한국 와인이 가장 잘 맞죠. 역사도 오래됐고요. 고조선 시대부터 과일로 술을 빚었을 겁니다. 우리나라 전통주라고 하면 흔히 쌀로 빚은 술을 떠올리지만 과실주도 많았을 거예요. 과일을 으깨서 발효시키기만 하면 되니 쌀로 빚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거든요. 와이너리가 지역 관광지로 자리 잡는다면 한국 와인이 알려지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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