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기획> 싸우는 여성들…조국 독립과 여성 해방을 외치다

송성환 기자 2025. 10. 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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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국회 앞마당.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립, 그것이 조국의 독립을 넘어 여성이 해방되는 길이라 믿은 것입니다. 김활란과 황신덕, 박인덕 등 당시 명망 있던 여성 교육자들이 변절해 친일에 앞장설 때도, 차미리사는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의 신념을 해방까지 지켜냈습니다. 인터뷰: 한상권 / 덕성여자대학교 명예교수"차미리사 선생은 여성의 권리, 인격이 중요하다. 그 다음에 독립을 해야 된다.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여성의 인권을 강조했다는 면에서는 제가 생각할 때는 그런 독립운동가는 거의 찾을 수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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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국회 앞마당.


1945대의 드론이 한강 하늘에 거대한 초상화를 수놓습니다.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를 시작으로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낯익은 얼굴들이 스쳐간 뒤, 조금은 생소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무장 투쟁에 나섰던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과 권기옥입니다.


대중에게 여성 무장투쟁을 알린 영화 ‘암살’


주인공 안윤옥의 모티브가 된 인물은 남자현이었습니다.


직접 총을 들고 조선 총독과 일본 대사 암살을 시도했고, 만주에서는 항일투쟁 자금을 모았습니다.


분열한 독립운동 세력 앞에선, 손가락 세 개를 잘라내며 붉은 혈서로 단결을 호소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이름을 남긴 권기옥.


비행기를 몰고가 조선총독부와 일본 왕궁을 폭파하겠다는 다짐은 끝내 이루지 못했지만, 그의 투쟁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인터뷰: 이윤옥 /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정말 영화에 한두 편 나오는 그 한두 명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많은 여성들이 의병이나 그런 의열 투쟁이나 무장 투쟁에 관여했었습니다. 그런 쪽으로 더 많이 조명을 해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직접 군대를 모아 전선에 뛰어든 여성도 있습니다.


조선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의병장 집안의 며느리로서 의병을 이끌고,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여성도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지은 안사람 의병가는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안사람 의병가 - 윤희순

내 집 없는 의병대들 뒷바라지 하여보세

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 찾기 운동이요


1938년 중국에서 설립된 부녀복무단은 22명의 여성으로 이뤄진 조선의용대 산하 부대였습니다.


남성 대원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고 보급을 맡았던 이 부대의 단장은 박차정.


항일 부녀회를 조직해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했고, 여성으로는 유관순 열사에 이어 두 번째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습니다.


인터뷰: 심옥주 원장 /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원

"작은 재봉틀 같은 거 있잖아요. 그거를 둘러메고 산에 같이 올라와서 갔다는 기록들이 나오거든요. 그런 걸 보면 이 국경에 맞닿아 있는 곳의 여성들은 말 그대로 독립군으로서 본인들이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실천하는 쪽으로 바로바로 움직였고…."


조국 독립 앞에 남녀의 구분은 없었습니다.


신분 역시 장벽이 되지 않았습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의 예술 전시장. 


40미터 길이의 장엄한 테피스트리 위에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공간, 현대 노동 운동까지, 여성들의 투쟁이 한땀한땀 수놓아져 있습니다.


첫 머리에는 기생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현계옥과 정칠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연인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최초의 여성 의열단원으로 무기 다루는 법을 익혔던 현계옥.


언론이자 여성주의자, ‘사상기생’이라 불리며 항일운동에 나선 정칠성.


조선 시대 천시받는 기생이었지만, 동시에 춤과 노래, 문학에 밝은 예인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근대 역사에선 주체성을 갖고 사회 참여와 항일운동에 나서며, 복합적 존재로 새겨졌고, 영화와 연극, 발레 등 다양한 문화 예술의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인터뷰: 신현규 교수 / 중앙대학교 교양대학

"민족주의적이고 독립적인 독립운동에 관심 있었던 기생 분들은 스스로 자각한 분들도 계셨고요. 그래서 기생을 그만두고 일본에 유학을 가거나 다른 나라에 유학을 가신 분들도 적지 아니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김향화.


1919년은 그의 인생을 바꾼 해였습니다.


1월 고종 황제가 승하했을 때는 수원 기생들을 이끌고 덕수궁 앞에서 통곡했고, 3월에는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체포된 뒤에선 유관순과 같은 감방에 수감되며, 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영화같은 그의 삶은 발레 무대 위에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김문신 단장 / 수원시티발레단 

"기생으로서, 내가 한 여성으로서 그 생활에 안주해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그 시대를 대변해서 내가 무언가가, 이 조국의 한 일원으로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뇌와 번뇌…."


3·1운동은 여성들에게 자각의 순간이었습니다.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깨닫게 된 계기.


그 꽃을 피우기 위해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주목한 것은, 바로 교육이었습니다.


인터뷰: 강영심 교육문화사업위원장 / (사)역사‧여성‧미래 

"여성의 자각, 사회에 대한 공동체, 민족 공동체의 일원이다, 이런 의식이 깨이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죠."


인터뷰: 한상권 / 덕성여자대학교 명예교수 / '차미리사 평전' 저자

"내가 삼십 년 믿어온 예수님보다 학교를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자식이나 남편의 사랑을 모르고 늙어진 몸으로 오직 나의 온생명은 내 '근화'올시다'. 그러니까 (차미리사) 그 분으로 볼 때는 자기의 모든 삶을 이 '근화'에다 다 투영한 거죠. 투영한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자기와 근화는 떼려야 뗄 수 없다."


무궁화의 다른 이름 '근화'.


1923년 차미리사는 근화여학교를 세워 모든 여성에게 차별 없는 교육 기회를 줬습니다.


사진과 재봉술 같은 실용적인 학문을 가르쳤고, 주체적인 삶과 실천적 사고를 강조했습니다.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립, 그것이 조국의 독립을 넘어 여성이 해방되는 길이라 믿은 것입니다.


김활란과 황신덕, 박인덕 등 당시 명망 있던 여성 교육자들이 변절해 친일에 앞장설 때도, 차미리사는 교육을 통한 독립운동의 신념을 해방까지 지켜냈습니다.


인터뷰: 한상권 / 덕성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차미리사 선생은 여성의 권리, 인격이 중요하다. 그 다음에 독립을 해야 된다.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여성의 인권을 강조했다는 면에서는 제가 생각할 때는 그런 독립운동가는 거의 찾을 수가 없죠."


하지만 일제의 탄압은 예외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갇혔던 서대문형무소의 여옥사.


3평 남짓한 8호 감방, 그곳엔 유관순을 비롯해 개성에서 3.1 운동을 이끈 어윤희, 유치원 교사 권애라, 기생 김향화 등 전국 각지에서 만세를 외치다 붙잡힌 여성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고문과 억압 속에서도 이들은 노래로 서로의 마음을 지탱했고 짧은 가사에 해방을 향한 바람을 담았습니다.


자유연애를 외치던 신여성부터 기생과 교사, 학생까지.


좁은 감옥에서 목놓아 부르던 해방가는 100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 광장의 함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여성 해방을 염원하는 그들의 노래는 지금도 이 시대를 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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