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인물 재조명)서예거목 소헌 김만호(8) 상산시회 조직, 전통문화 지킴이로…30세 한의사 시험 합격

◆장년기(壯年期) 1937년(30세)~1944년(37세)
△30세, 한의사 시험 합격
드디어 소헌 선생이 고대하던 한의사 합격증을 받아 들었다. 1937년에 선생이 한의사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1936년 병자대포락丙子大浦落의 대홍수와 흉년의 와중이어서 더욱 값진 성과였다. 당시 선생의 나이30세 였다. 그러나 합격 통지를 받은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2월23일에 어머니가65세의 일기로 별세하셨기 때문이다. 9년 전 한약종상 시험에 합격했을 당시 아버지가 운명하셨고 이번에 한의사 시험에 합격했을 때 어머니 마저 돌아가신 것이다. 선생은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비통함에 사로잡혔다. 지난 날의 회한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운명인지는 모르지만 내게는 항상 큰 기쁨이 있을 때마다 큰 슬픔도 함께 왔다. 21세 때 한약종상 시험 합격과 함께 부친의 별세가 그러했고, 1939년 기묘년의 경우도 한의사 시험에 합격하여 채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모친께서 세상을 떠나시니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라고 소헌 선생은 당시를 회고했다.
△모친의 별세와 위기회 구성
모친의 유해는 일제 묘지령에 따라 공동묘지에 가 매장했다가 그날 야간을 틈타 삼막골(三幕谷) 우실 쪽에 간좌곤향(艮坐坤向:풍수지리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북동쪽 즉 간艮을 등지고 남서쪽 곤坤을 바라봄)의 좌향(坐向)으로 정성드려 모시었다. 이 시기에 선생은 위기회(圍棋會)를 만들었다. 어머님의 별세라는 곤극(困極, 매우 고통스럽고 힘듦)을 붓으로만 달래던 선생에게 위기회는 위안처가 되었다. 위기회는 1938년 무인(戊寅)에 이진교(李鎭敎) 선생을 회장으로 바둑 친목 모임으로 설립됐다. 소헌 선생은 부회장을 맡았다. 위기회 활동은 그에게 활력소가 되어 주었다. 바둑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그의 시름은 차츰 잦아 들어갔다.
선생은 내친 김에 다음해인 1939년에 우리 문화를 애호하고 지키자는데 마음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시회(詩會)를 조직했다. 시회 이름은 '상산시회(商山詩會)'로 정하고, 선생이 스스로 회장을 맡았다. 한 달에 한두 번 모임을 갖고, 서로 문답도 하고 시도 짓고 바둑도 즐기는 모임이었다. 그 때 선생의 시호(詩號)는 '시은(市隱)', '만호(晩湖)' 였다.

다음은 1939년(32세)에 상산시회에서 편집 제책한 시문집(詩文集) 『효시은거』(囂市隱居, 시끄러운 저자 거리에 숨어서 산다는 뜻)에 수록된 선생의 한시 8편이다. 암울한 당시의 상황이 청년 소헌의 시문(詩文)에서 잘 드러나 있다.
① 「思友詩」(사우시, 벗을 생각함)
不款憶君自憶君(불온억군자억군, 약속에 의해 그대를 기억함이 아니라 언제나 기억하노니)

問君何事每相分(문군하사매상분. 그대에게 묻노라 우리는 무슨 일로 늘 헤어져 사는고)
莫言靈鵲能傳喜(막언영작능전희, 까치가 울어야 희소식 전한다고 말하지 말라)
幾度虛驚到夕曛(기도허경도석훈. 몇 번이나 그대가 왔는가 놀라다 석양에 이르렀네)
△매화를 노래한 매화시
②「梅花詩」(매화시, 매화를 읊음)
世機忘却自閑身(세기망각자한신, 세상 일 망각하자 자연히 한가하여)
匹馬西來再見春(필마서래재견춘. 필마 타고 서쪽으로 다시 봄구경 옴에)
東閣梅花今又發(동각매화금우발, 동쪽 정각의 매화 이제 막 피었는데)
淸香不染一纖塵(청향불염일섬진. 맑은 향기 조금도 홍진에 물들지 않았네)
△부여를 회고하는 부여회고
③ 「夫餘懷古」 (부여회고, 부여를 회고함)
百花庭畔萬重山(백화정반만중산, 백화 만발한 부여 정원을 만첩산이 둘렀는데)
舊國遺墟指點閒(구국유허지점한. 백제 서울 남은 터는 눈앞에 한가롭네)
古柏扶蘇城外路(고백부소성외로, 부소산성 바깥 길엔 늙은 측백 서 있는데),
言官六十拜神還(언관육십배신환, 언관이 육십 번 절을 하면 신神이 돌아온다네)
△서른살, 섣달 그믐밤의 각오
④ 「除夜作」(제야작, 섣달 그믐밤에 짓다)
無爲渡世好光陰(무위도세호광음, 이 세상 좋은 세월 어영부영 보내다가)
三十一年明日是(삼십일년명일시, 내일이면 나의 나이 삼십일 세로구나)
中宵悲歎將何益(중소비탄장하익, 밤 깊도록 슬퍼하고 탄식한들 무슨 이익 있으리오?)
且向百年修厥己(차향백년수궐기. 다만 미래를 향해 수신할 뿐이로다)
△꿈을 노래한 몽시
相思相見只憑夢(상사상견지빙몽, 서로 그리워하고 만남을 꿈을 통해 이루었으니)
儂訪歡時歡訪儂(농방환시환방농. 나의 방문을 님이 반겼을 때 나도 님을 반겼다오)
願便遙遙他夜夢(원사요요타야몽, 먼 훗날 다른 날 밤 꿈속)
一時同作路中逢(일시동작로중봉, 잠시 길에서라도 만나 함께 회포 풀기를 원하오).

△구름을 노래한 운시
⑥ 「雲詩」(운시, 구름을 노래함)
夜深人定水聲低(야심인정수성저, 밤이 깊자 사람들은 잠들고 물소리도 조용한데)
睡起無情月在西(수기무정월재서, 잠결에 일어나 무심히 바라보자 달은 서쪽에 떠 있네)
會有冷風澄碧落(회유냉풍징벽락, 때마침 바람은 차갑고 푸른 하늘이 맑음에)
自憐心事似雲迷(자련심사사운미, 내 마음 구름과 같이 혼미함을 가엽게 여기노라)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향시
⑦「思鄕詩」(사향시, 고향을 생각함)
前江夜雨漲虛沙(전강야우창허사, 마을 앞강에 밤비 내려 모래톱에 물이 넘치면)
萬里河情一帆斜(만리하정일범사. 먼 강의 물길에는 돛단배도 띄우겠지)
遙想故園春已到(요상고원춘이도, 멀리 봄이 온 고향 동산을 생각하며)
空懷無賴坐天涯(공회무뢰좌천애. 텅빈 회포 의지할 곳 없이 타향에 살고 있네)
△외로운 밤을 노래한 독야작
⑧ 「獨夜作」(독야작, 외로운 밤)
天回斗轉月西沈(천회두전월서침, 하늘에는 북두칠성이 기울고 달은 서쪽으로 지는데)
一炷殘燈獨照心(일주잔등 독조심, 한 개의 타다 남은 등불만이 내 마음을 비추네)
百藥難醫腸斷處(백약난의 장단처, 애간장 타는 데는 백약이 무효이니)
吾生從此恨籠禽(오생종차한롱금, 내 인생 지금부터 자유가 없게 됨을 한탄하노라)
△33세에 한의원으로 바꾸고, 우리 문화 지키려 혼신의 저항
1940년 33세의 선생은 '한약방'을 '한의원'으로 개칭하고 이후로 지역 활동을 다방면으로 펼쳐 나갔다. 그 해에 선생이 수리장(水理長)으로 활동했는데 일본조두(日本組頭)의 부당함을 겪으며 민족적 울분을 통감했다. 1940년 33세 때 학교비평의원(學校費評議員)에 당선되었다. 1941년에는 소방조부조두(消防組副組頭)가 되었는데 당시 일인 조두(組頭)의 횡포를 막아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상산시회(商山詩會)는 회원이 늘고 계속 발전되어갔다. 그러나 이즈음 일인(日人)들은 한국의 문화를 말살하려고 광분하던 때라 이 시회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고 온갖 방해와 협박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이 시기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문화 예술을 억압하고 멸시했다. 역사와 전통을 왜곡시키고 우리의 선량한 풍습들을 열등한 미신으로 비하시키고 있었다. 청년 소헌은 이에 대한 반발심과 저항감에 사로 잡혔다. 오히려 그것이 선생에게는 자극제가 되어 우리의 것을 지키려는 혼신의 노력으로 저항하였다.
참고)일본 조두(組頭)란? 조두(組頭)는 일본말로 '구미가시라'이다. 일본 에도 시대의 행정 제도인 '오인조(五人組, 고닌구미)'에서 비롯된 조직의 리더로, 지역 행정을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한국인 마을을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역할의 조두들이 여러 불법적 행위를 저질렀다.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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