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바닥이 다 예술품”…그림책 원화를 대중 곁으로 [.txt]

최윤아 기자 2025. 9. 28.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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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사람 그림책 원화 판매 실험하는 권종택 보림 출판사 대표
번역서 일색 그림책 시장 개척한 출판인
은퇴 앞두고 ‘그림책 원화’ 가치 널리 알리며
다음달엔 전시회 열고, 온라인 판매까지도
지난 23일 경기 파주시 문발동 파주출판도시 보림 출판사에서 권종택 대표가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뭔가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한 갈래로 묶은 흰머리를 분홍 야구 모자 속에 쏙 넣고 나타난 그는 90분 남짓한 인터뷰에서 이 말을 일곱 차례 반복했다. 마치 “내일 아침엔 흰 눈이 소복이 내렸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어린이처럼 보였다. 그림책 전문 출판사 보림의 권종택(79) 대표 얘기다.

지난 23일 경기 파주시 문발동 보림 출판사 사옥에서 권 대표를 만났다. “제가 사실 은퇴할 나이잖아요. 그런데 은퇴하려고 보니까 그림책의 그림을 팔(려고 시도하)지 못했던 게 너무 아쉽더라고요.”

1946년에 태어나 1976년에 보림 출판사를 창업했다. 내년이면 권 대표는 여든, 보림 출판사는 쉰을 맞는다. 보림은 한국 현대 그림책의 성장과 함께였다. 보림이 1990년대 ‘연필과 크레용’이라는 시리즈를 내며 단행본 창작 그림책 시장을 열어젖히기 전까지, 한국 그림책은 일본 등지에서 수입해온 번역서 일색이었다. 이후에도 ‘컬렉션’ ‘아티비티’(예술의 아트(Art)와 활동의 액티비티(Activity)의 합성어) 시리즈 등을 선보이며 종이라는 평면의 한계를 넘어서 그림책의 재미를 확장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17년에는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 아시아 지역 ‘올해 최고의 출판사 상’(BOP)를 받았다. 2020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상을 받은 백희나 작가, 2022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 이전에 보림이 있었던 셈이다.

출판인으로서 의미 있는 시도를 거듭했고 성과도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변화를 소망하고 있었다. 그 변화의 이름은 ‘그림책 일러스트의 대중화’다. “그림책 작가들이 한권 작업하는 데 2~3년이 걸려요. 그동안 수십장에서 100장 사이의 그림을 그리는데, 책에 수록되는 건 열댓장뿐이에요. 너무 아까운 거예요. 그림책에 이렇게 좋은 그림과 캐릭터가 있는데 팔지를 못했던 게요. (…) 사실 그림책 열다섯 바닥이 다 예술품이거든요.”

지난 23일 경기 파주시 문발동 파주출판도시 보림 출판사 ‘일러스트 갤러리 비읍’에서 권종택 대표가 그림책 원화 앞에 서서 웃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은퇴를 해야 하는데” 해보고 싶은 일, 목격하고 싶은 변화가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결국 지난해 일을 벌였다. 그림책 속 원화를 대중에게 팔아보기로 한 것이다. 다만 그림책 원화는 작가에게 소중한 유산이고 사료로서의 가치도 있으니, 작가가 작품의 세계관을 이어가는 선에서 새로 작업해 판매하기로 했다. 첫 시험대는 국토 최남단 제주였다. ‘노란 우산’ ‘백두산 호랑이’의 류재수, ‘달려 토토’의 조은영, ‘안녕’의 박은정 등 그림책 작가 5명의 작품 24점을 제주의 그림책 전문 서점 3곳에서 시범적으로 팔아봤다. 준비한 작품의 80%(19점)가 팔렸다. 최고가는 200만원 선, 최저가는 60만∼70만원 선이었다. “제가 예상한 것보다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구매자들이 그림책 커뮤니티(애호가) 분들이긴 했지만, 떠밀리듯 억지로 산 게 아니고 좋은 작품을 골라 작가 사인 여부까지 확인하고 구매하더라고요.”

제주에서 가능성을 엿본 권 대표는 판을 좀 더 키웠다. 작가와 서점을 양쪽에서 설득해 원화 판매의 개방성을 한 차원 더 높였다.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어서 그림책 작가들에게 작업한 원화의 데이터를 받아 올려두고, 서점이 판매를 희망하는 원화를 골라 가져가 팔도록 했어요. 한 서점에서 8점을 팔았는데, 그중 5점이 서점과 아무 인연이 없던 분들이 홍보만 보고 와서 산 거였어요. (…) 김동성 작가의 ‘엄마 마중’은 원래 디지털로 작업했는데 작가가 목탄으로 그려 내놨더니 여기저기서 서로 사 가겠다고 하고요. 이런 일들이 생기니까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난 23일 경기 파주시 문발동 파주출판도시 보림 출판사 ‘일러스트 갤러리 비읍’에서 권종택 대표가 그림책 원화 앞에 서서 웃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그림책 일러스트를 팔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 희망은 50년 경력 노련한 출판인의 마음을 다시 뛰게 했다. 권 대표는 그림책 커뮤니티의 울타리를 넘어 대중에게 직접 그림책 일러스트를 선보여 판매하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다음달 1일부터 31일까지 보림 사옥 1층 전시장 ‘일러스트 갤러리 비읍’에서 ‘100명의 작가, 100개의 세계’라는 이름의 전시를 열기로 했다. 46년생 원로 그림책 작가인 김복태부터 신진 정네모까지 한국 창작 그림책을 수놓았던 108명의 작가가 새로 원화를 그려 출품했다. ‘파도야 놀자’의 이수지 작가, ‘넉 점 반’을 그린 이영경 작가 등도 참여했다.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와디즈’를 통해 온라인에서도 판매한다. “우리 전시가 성공하면, 이후에 뭔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림책을 만들며 평생을 살았기에 누구보다 그림책 일러스트를 가치 있게 여긴다. “목적성을 갖고 그리는 일러스트는 (감상자와) 커뮤니케이션이 잘됩니다. 바로 가슴으로 (감흥이) 오죠. 해석하며 봐야 하는 순수 미술과는 다르게, 그냥 그림으로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런 작품을 내 삶 가까이에 두고 즐기면 얼마나 좋을까요. 요즘 비싼 공연은 몇십만원씩 하니 가격적으로 대중화의 가능성이 있고요. (…) 1990년대 태어난 창작 그림책 1세대가 이제 엄마가 됐거든요. 엄마가 보던 그림책을 아이도 보고, 그 캐릭터가 그려진 원화로도 접할 수 있다면, 즐거움이 연장되지 않을까요?”

오는 10월 1일부터 경기 파주시 ‘일러스트 갤러리 비읍’에서 열리는 ‘100명의 작가, 100개의 세계’ 전시에서 소개되는 그림책 원화. 왼쪽부터 시계방향 김동성 ‘엄마 마중’, 이수지 ‘악보 연습-산’, 김동수 ‘발걸음’, 이영경 ‘노래’. 보림 출판사 제공

권 대표가 염원하는 건 또 있다. 그림책 일러스트 비평이 깊고 넓어지는 일이다. 은퇴를 목전에 둔 권 대표가 홀로 애써서 될 일이 아니기에 ‘목표’가 아니라 ‘염원’이고 ‘소망’이다. “우리나라 그림책 평론은 텍스트 중심이에요. 그림 작가들이 여러 디테일을 숨기고 해도 결국은 글을 중심에 두고 평론하죠. 그 폐해가 꽤 커요. 쉽게 말해 ‘이 그림책은 이런 내용이야’라고 (글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림책을 학습의 가치로 삼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림책이 아니라) 학습지를 만들게 되기도 쉬워져요. (…) 만약 이번 전시로 뭔가가 벌어진다면, 그림을 중심에 둔 비평도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최윤아 기자 a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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