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미련한 인내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가을이 새벽 격하게 찾는다. 잠에 들 때는 큰대자였는데 아침엔 누에고치다. 둘둘 말아 김밥도 아니고 칭칭 튼 누에고치다. 풀어헤치는 데 인내가 필요하지만, 기분 좋다. 오후엔 습하고 다소 불쾌한 감이 있지만 새벽마다 찾는, 창턱을 넘는 가을은 한여름 지난한 버팀을 보듬는다.
진즉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었다. 휴일 없는 연이은 출근에 간만의 아침 인사다. 출근 전, 뜰을 채운 상쾌한 바람에 간간이 모기가 손등에 입맞춤을 하지만, 촉촉이 젖어있는 잎이 호흡을 덮는다. 밤새 끊이지 않던 벌레 소리에 새소리가 아침 공기를 가르고 뜰을 채웠다. 나뭇가지란 가지는 모두 새가 차지하고 풀숲은 벌레 차지다. 가지와 가지 사이는 거미줄로 채웠다.
밤샌 작업으로 친 거미줄에 이슬이 달렸다. 코바늘 뜨개질을 배운 것도 아닌데 촘촘하게 수를 놓았다. 얼마나 가는 실을 썼는지 이슬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비엔날레 행사장에 전시된 작품설명에 가장 가는 실이라 적혀있는데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가장 가늘다는 200번대의 실은 굵은 밧줄이다. 발을 딛는 길을 피해 담벼락 가까이 쳤다. 매일 친다. 아마 한여름에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슬을 달진 않았었다. 이슬 한 알 한 알이 보석이다. 햇살을 담았다. 투명한 수정에, 호박에 루비도 보인다. 심지어 가끔 사파이어도 눈에 띈다. 보석의 종류는 달라도 형태는 같다. 거미와 가을날의 협업이다. 낮이 되면 이슬은 잠시 자리를 비켜줄 것이다. 밤새 친 이유를 알기에 거미에게 표하는 예의다.
직조방식은 알 수 없다. 서로 정한 같은 방식은 없는 듯하다. 집안 내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터득되고 진화된 방식이 있는 듯하다. 같은 것은 사용하는 실이 굉장히 가늘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단 계열의 실인 듯하다. 당연히 동물이 만들어낸 섬유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많은 보석을 달고도 끄떡없다. 가지에 달린 줄을 끊어 돌돌 말아보면 주렁주렁 달린 산머루 송이가 될 듯하다. 물론 그전에 우수수 떨어지것이다. 떨어지기 전에 손가락을 조심스레 내민다. 손가락 끝으로 물방울이 옮겨진다. 영적 교감이 일어날 듯, 거미줄은 미동도 없다. 차갑다. 새벽에 응결된 물방울이 지문을 메꾼다. 갈랐던 새벽공기가 손등을 덮는다.
햇살이 더해지면서 인도의 전통 장식 기법인 미러워크가 그려질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거울이 아닌 유리 알갱이다. 햇살을 담을 뿐 눈에 전달할 뿐, 그 어디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단지 달아 잠시 치장했을 뿐, 과시할 줄 모른다. 그것도 잠시 달았을 뿐이다. 아무도 없는 밤에 줄을 치고, 새벽에 달았다. 가늘수록 더 아름답게 달리니 끊임없는 반복적 작업이다. 수고로움에 오래 달고 싶지만, 친수적이라지만 잠시뿐이다. 존재가 하나 된 듯한 그 짧은 순간을 반복한다.
끝내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가을, 바닥에 깔던 천의 위치가 바뀌고, 두께를 고민한다. 열었던 창문을 어느 시점에서 닫아야 할지, 깊은 잠 속, 새벽 나절 자각몽을 경험하게 된다. 무더위에 바람 한 점 없는 시간을 버텨왔다. 끊기고 짓밟히는 시간을 버티며 성장이라는 격한 과정을 격고 연륜을 만들었다. 지쳐 멈춤이 있었지만, 시간은 다음을 잇는다.
지칠 줄 모르는 벌레 소리에 새소리가 이어지고, 공기 속에 놓이는 협연으로 이어지는 시간 안에, 거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줄을 치고 있다. 시간을 들릴 수 있고 손으로 느낄 수 있도록 영적인 연결처럼 이어질 수 있는 작업을 이어간다. 그것이 찰나일지라도 그 순간을 위해 끊임없이 줄을 뽑아내고 공간에 그리는, 정해진 형태를 알 수 없지만, 무엇인가를 위해 멈춤이 없다.
무상함을 안다. 변화의 찰나를 안다. 하지만 몸에 배어있다. 생각에 앞서 몸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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