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러 3국 관계에서 독립변수가 된 남북한 [정의길의 세계, 그리고]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3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한반도를 둔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과 남북한 관계에서 큰 변곡점이 아닐 수 없다. 남북한은 이제 강대국 패권 다툼에서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로 진화할 잠재력을 갖췄고, 남북한 관계도 이에 따라 진화할 수밖에 없게 됐다.
천안문의 풍경은 최근 미국을 방문한 이재명 대통령의 지난달 26일 필리 조선소 방문과 겹쳐진다. 이 대통령은 한화오션이 인수한 이 조선소에서 열린, 미국 해양청이 발주한 국가안보 다목적선 ‘스테이트 오브 메인호’ 명명식에서 “대한민국 조선업이 이제 미국 해양 안보를 강화하고 미국 조선업 부활에 기여하는 새로운 도전의 길에 나서게 된다”며 “이곳 필리 조선소를 통해 72년 역사의 한-미 동맹은 안보 동맹, 경제 동맹, 기술 동맹이 합쳐진 ‘미래형 포괄적 전략 동맹’의 새 장을 열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한국의 안보를 책임져왔다는 미국은 이제 한국에 강대국 패권의 핵심인 해양력을 의탁하게 됐다. 미국은 지금 대양을 항행하는 상선을 1년에 한척도 만들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첨단기술의 기름이자 엔진이라 할 수 있는 반도체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의 반도체 ‘자급률’(국내 생산 비중)은 글로벌 생산의 약 10% 수준이며, 10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는 사실상 0%이다. 한국은 대만과 함께 미국에 가장 중요한 반도체 공급국 중 하나이다.
이 대통령의 이번 방미에 고율 관세를 휘두르는 미국의 막대한 요구에 순응해야만 하는 ‘번국’의 모습만이 있다고 봐서는 안 된다. ‘종주국’의 패권을 좌지우지하는 신흥 변방국의 모습도 담고 있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안보 동맹, 경제 동맹, 기술 동맹이 합쳐진 미래형 포괄적 전략 동맹”이라는 표현은 그런 양면을 담는다. 한-미 관계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베풀던 관계에서 한국이 미국의 안보·경제에 영향을 주고 기여하는 관계로 변화했다. 한국이 그저 종주국의 조공 요구에 순응하는 번국으로 남느냐, 아니면 대등한 동반자로 가느냐는 자신의 의지와 역량에 달리게 됐다.
이런 상황은 미국에 맞서 다극화 질서를 구축하려는 중국 및 러시아와 북한의 관계 변화로 더욱 재촉된다. 도널드 트럼프 1기 집권 때 북-미 정상회담의 좌절 뒤 핵 무력 강화로 질주했던 북한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가장 유리한 국제정세를 향유하고 있다. 그 전쟁이 가속하는 중·러의 다극화 구축 시도에서 경제·외교적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북한은 러시아와 군사동맹을 복원하고 중요한 협력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대중국 관계에서도 독립과 자율을 더 신장시킨다. 중·러에 공히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가 더 커졌다. 북한이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의 대화와 협상 제의를 일축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북한이 지난해 초부터 통일 노선을 포기하고, 한반도에서 적대적 두 국가 체제를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정은이 천안문 망루에서 시진핑 및 푸틴과 나란히 선 것은 북·중·러 3국 관계가 재정립됐음을 드러낸다. 이 장면이 한·미·일 남방 동맹에 맞서는 북·중·러 북방 연대의 구축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급하다. 북한은 적어도 중·러의 세계 전략에서, 그리고 그들의 다극화 질서에서 독립변수가 되고 있다.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만나자고 계속 러브콜을 보내는 데서 잘 드러난다.
트럼프가 중·러에 보이는 태도는 정세를 더욱 유동적으로 만든다. 트럼프는 중국과 러시아에 말로는 강경하나, 실제로는 타협과 협상으로 일관한다. 트럼프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와 공급망 위력을 맛보고는 관세협상에서 타협적 자세를 보인다. 푸틴과 회담했던 트럼프는 그에게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의 회담이나 종전을 강요하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과 러시아를 누르고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려 하기보다는 이들 국가와 세력권을 타협하려는 모양새이다. 중국과 러시아도 미국과 기꺼이 타협할 것이다.
미·중·러의 세력권 짬짜미, 이런 미·중·러에 전례 없는 영향력을 미치는 남북한이다. 북한이 통일 노선을 포기하고 한국을 별개 나라로 대하겠다는 것도 이런 상황을 반영한다. 한국에 그 어느 때보다 독립적인 외교 의지가 절실하다. 미국과 일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면서 영향력 지렛대를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러시아에는 한국이 결코 위협이 아님을 각인시키고 그들의 자원과 시장도 얻어야 한다. 북한이 표방한 적대적 두 국가 체제를 우선 적대 않는 두 국가 체제로 진화시키는 데도 필수적이다. 남북한 모두 도약할 수 있는 변곡점에 섰다.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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