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인물 재조명)서예 거목, 소헌 김만호(4)…오토산의 신동, 스승을 만나다

최미화 기자 2025. 8. 29. 00:35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영태 영남대 건축학부 명예교수, 화가

◆ 6세~8세 시기:1913년~1915년

6세 때부터 『동몽선습(童蒙先習)』 익히고, 학습 8세에 스스로 서예 공부 돌입
종이가 귀하던 시절, 나무판(粉板 분판)에 글씨 쓰고 닦기를 반복

분판은 종이가 귀하던 시절, 아이들이 붓글씨를 익히는 데 쓴, 기름에 갠 분을 발라서 결은 널판지를 이르던 말이다.
소헌 선생이 여섯살 때 학습한 동몽선습 표지와 일부 내용.

1913년 계축년, 선생의 나이 6세 때 부친은 서산사(西山寺)를 떠나 그 옆 마공(馬孔) 상곡(上谷)에 새 터(신기 新基)를 잡고 주택을 건축해서 이사하였다. 새 집을 마련하여 생활이 다소 안정되자 부친은 더욱 글공부 가르치기에 열성을 쏟았고, 선생도 그 뜻을 따라 『천자문』을 단숨에 마치고, 『동몽선습(童蒙先習)』 학습에 들어갔으며 한글과99단, 10간12지 육갑을 6세 때 벌써 다 외웠다. 동리 어른들은 '오토산의 신동'이 났다고 야단들이었다. 당시16세이던 백형도 학습 지도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에 힘 입어 차츰 붓글씨도 모양이 갖춰져 갔고 글씨에 대한 관심이 커가기 시작했다.
선생이 얼마나 천자문 공부에 열중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를 선생에게서 들었다.
선생의 나이 7세이던 1914년 갑인(甲寅) 정월 대보름 날의 일이었다. 아침 일찍 백형이 천자문을 가져오라고 했다. 천자문이라면 자신이 있던 선생은 선뜻 책을 가져와서는 백형이 짚어 주는 대로 부모님 앞에서 한자 한자 읽기를 시작하였는데 그만 거문고 금(琴)자에 와서 막혀버렸다. 그토록 자신 있던 천자문이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긴장하여 당황한 탓인지 갑자기 속이 메스껍고 어지럽기 시작하더니 기어이 보름날 먹은 음식을 다 토해 내고 말았다. 천자문 책은 온통 얼룩으로 버려지게 되었다. 서책이라면 자신 보다도 더 소중히 여겼던 그는 얼른 구토한 것을 손으로 훔쳐내고 닦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책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 후 선생은 이 책을 소중히 간직해 왔다. 그러나6·25 동란 때 소실되고 말았으니 선생은 "마치 소중히 간직하던 거문고(금 琴)를 잃어버린 것 같이 내내 가슴 아파하였다"고 했다.
을묘(乙卯)년인 1915년 8세의 어린 선생은 벌써 『한문통감(漢文通鑑)』 읽기 시작했다. 주위에서는 문일지십(聞一知十, 하나를 들으면 열 개를 안다)의 천재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선생은 한문 공부와 더불어 붓글씨 공부를 더 열심히 하였다. 당시엔 모든 물자가 빈약하던 때라 종이가 귀하여 겨우 일본 신문지에다 지필(紙筆)할 정도로 종이가 귀했다. 그래서 선생은 나무판을 대패질하여 들기름을 먹여 분판(粉板, 글씨판)을 만들어 그 위에 먹을 묽게 갈아 글씨를 쓰고 그 뒤 걸레로 닦아내고 또 쓰고 했다.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글씨가 남들의 눈에 띄게 잘 쓰게 되고 한문의 깊은 뜻에 빠지면서 선생은 나름대로 "어떻게 하면 더 잘 쓸 수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글자가 어떻게 해서 생성 되었는가"하는 물음과 의문에 골똘해 졌다. 이는 누구의 지도와 도움이 없는 자기와의 외로운 싸움이었다. 주위에서는 필재(筆才)가 있는 신동(神童)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글씨에 열중이었다. 그러했지만 어린 나이에 혼자의 힘으로 서도(書道) 공부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9세~14세 시기:1916년~1921년
누구나 자신을 향한 칭찬에는 기분이 우쭐해진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소헌 선생은 좀 달랐던 것 같다. 선생은 인근에서 붓글씨 신동(神童)으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그러한 소문과 칭찬을 몹시 거북스러워 했다. 그럴수록 더 묵묵히 글씨 쓰기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사실 어린 나이에 혼자 힘으로 한 공부에 얼마만큼의 깊이에 접근할 수 있었을까? 9세 소헌 선생의 서도 공부에도 큰 진척은 있을 수 없었다. 스스로 서도 공부를 한다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이럴 즈음 선생에게 한줄기 햇살이 찾아왔다. 뜻이 있는 곳엔 반드시 길이 있는 법이다. 좋은 스승을 만난 것이다.

서도의 길 열어준 스승과의 만남
소헌선생이 쓴 '정관자득'을 1977년에 각한 작품이다.
9세 되던 병진년(丙辰年) 1916년에 당시 경성(京城)의 법필사(法筆師)이던 창랑(滄浪) 김희덕(金熙德) 선생이 아버지 송암(松庵) 선생을 만나러 상주(尙州)에 왔다가 소년인 선생의 글씨를 보고 너무나 깜작 놀랐고, 자진하여 1년 가까이 독선생이 되어 서법(書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9세의 선생은 창랑 선생을 만나면서 비로소 정식으로 서도(書道)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동안 참뜻을 모르고 그냥 보기 좋게만 써왔던 글씨가 서법을 배우면서 형태를 제대로 갖추어갔고, 그 발전 양상이 실로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김희덕 선생과의 만남은 소헌 선생이 평생 서예가의 길로 가도록 한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소헌 선생은72세 때 매일신문에 기고한 「나의 스승 그 가르침」(1979. 11. 3)에서, 60여 년 전 서도에 입문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지금까지 가슴 깊숙이 새기고 있는 '정관자득(靜觀自得)'과 '중사신통(重思神通)', 숙관(熟觀)의 학서(學書)는 당시의 스승 김희덕 선생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술회했다. 김희덕 선생에게 황자원(黃自元)의 임서(臨書)부터 익혔다는 소헌 선생은 스승의 가르침이 너무나 자상하고 헌신적이었다고 회고했다. 더구나 어린 소년인 자기에게 '화개방수유생색 앵출범금불감제(花開傍樹猶生色 鶯出凡禽不敢啼, 꽃이 피니 곁의 나무들이 오히려 빛이 나고 꾀꼬리가 나니 무릇 새들이 감히 울지 못한다)라고 찬(讚)해 주시던 기억은 6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잊혀 지지 않고 아직도 그 큰 빚을 갚지 못하는 자책감에 사로잡힌다고 했다.
소헌선생이 1979년에 남긴 '중사신통'

"김희덕 선생에게 특히 대자(大字, 큰 글씨)를 공부한 기억이 납니다. 지금까지 대자를 많이 쓰고 있는 것은 창랑 선생의 혜안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는 글씨 쓸 종이가 없어 고작 신문지나 분판(粉板, 나무 글씨판)을 이용했습니다. 대자는 분판에 쓸 수가 없어서 뒷동산에 올라가서 반석(盤石, 평평한 큰 돌)을 찾아 떨어진 빗자루를 붓 대용으로 해서 검정 물감을 물에 타서 글씨를 썼고 솜을 뭉쳐 손에 움켜쥐고 익히기도 했습니다. 냇가 모래사장에 나가 큰 막대기로 몸통보다 더 큰 글씨를 썼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서도에 깊이 심취할 수 있었던 것은 김희덕 선생의 격려와 채찍 때문이었다. 선생은 유공권(柳公權)과 구양순(歐陽詢)의 본첩(本帖)을 섭렵하고 상고(上古)의 법첩을 익혔는데 특히 왕희지(王羲之)의 법첩을 대했을 땐 희열을 느꼈었다고 술회했다. 10세 때 운명적인 스승 창랑 선생은 떠났고, 그 후 스승을 뵙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그 시기에 교통이 용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계속)

참고

' 정관자득'(靜觀自得)은 사물이나 현상을 고요히 관찰하면 스스로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의미이다. 북송 유학자 정호(程顥) 정명도의 '추일우성'(秋日偶成)이란 수행시 중에 '만물정관개자득' (萬物靜觀皆自得)이란 시구에서 인용된 말이다. '정관'(靜觀)은 차분한 마음으로 사물을 본다는 뜻이고, '자득'(自得)이란 스스로 그 답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Copyright © 대구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