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목포 개항, 근대교육의 교문 목포 북교초등학교 (중) [남도 학교기행]

#교육기행이라는 장르
의외일 수도 있겠다 싶지만, 나의 읽기 취향은 단정함이다. 열정과 희열의 언어보다 상징성이 풍부한, 절제되고 군더더기 없는, 슴슴할 정도의 담담함에서 희열과 쾌감을 맛본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그렇지 않은 허투루 글을 만나면 쉬이 허리가 휘게 되고, 안구 주변 근육의 긴장이 느슨해짐을 느낀다. 끽연은 좀 그렇고, 끽다(喫茶)라고 했던가? 아무튼 나의 읽기, 끽문(喫文) 성향은 단정함이다.
다만 그런 담백한, 치밀하고 섬세한 문장을 생산하는 재간이 없다. "글쓰기의 변화는 곧 삶의 변화"라는데, 치열했던 조선의 문장가들이 남긴 『문장의 품격』(안대회)이라도 펼쳐 선인들에게 꼬박꼬박, 야단맞으며 익혀야 하는가, 심사 헛헛하다.
지식 전달 위주의 글을 만나면 매정함을 느끼곤 한다. 각박한 기획회의 같다고나 할까. 정보를 전달하기에 바쁜 글에는 교만과 교착이 있음을 안다. 현란함을 내세웠지만 소란함에 그치는 일이 왕왕이다.
기행글은 어떠한가. 자료를 추적하고 현장을 탐색하여 보편적인 결과를 보도해야 하는가, 감흥과 정취를 뿜어내야 하는가. 이성주의적 판단이 중요한가, 상상력이 필요한가. 기행을 일삼는 자는 탐험가여야 하는가, 예술가라야 하는가. 이런 부류의 생각을 넌지시 한 적이 있다. 일삼아 하는 행위이든 너스레이든, 그러나, 단언컨대, 기행은 아름답다. 대체로.
교육 현장과 그 주변 문화를 탐색하는 교육기행도 그러하다. 요량이 부족하지만, 이미 나선 길이니 점차 방향을 찾을 생각이다. 누가 이 길을 가지 않았더라도 좋다. 풋가을 숲비 같은 신선함도 있을 테니.
#개항은 확장이었을까
1897년 10월 1일, 목포는 개항과 함께 도시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는 나주목 관할 무안현의 수군 방어기지였던 목포진이었다. 1872年(고종 9) 무안 목포진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안목포진지도>를 보면 당시 성안에는 2개의 마을, 성밖에 4개 마을 등 총 6개의 마을 조성되어 있었다. 개항 직전 가호는 총 132호에 인구는 대략 6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은, 강과 바다를 잇는 길목(木) 나루(浦)였다.
개항 이후 급격한 인구 변동이 있었다. 개항장 주변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주변 섬 지역뿐만 아니라 부산 등 전국적으로 인구 유입이 크게 증가하였다. 1897년 말 통계로는 2,600여 명이었다. 무려 4배의 급증이었다. 일본인도 206명으로 집계되었다. 이후 일본인들의 이주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이어지면서 그들을 위한 거주 공간과 의료, 교육 등 생활 시설을 갖추어 나갔다. 1902년 1,045명,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이후인 1907년에는 무려 2,851명으로서, 전체 인구(6,466명) 대비 45.1%가 일본인이었다. 1910년 통계로는 총 10,655명 중 일본인은 3,494명이었다. 개항장이라면 어디나 비슷하였겠지만, 이만하면 제국주의 침략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목포는 도시로서 배후 부지가 협소했다. 따라서 1899년 이후 해수의 범람을 막는 해벽 설치를 비롯하여 개간과 간척을 통해 끊임없이 도시의 공간을 확장해야 했다. 도시의 규모가 커지고 도로가 신설되면서 도로의 교차 지점이 나타났다. 목포에서는 그런 지점을 광장으로 지정하여 도시 계획 관리를 하고 있다.
최초 '호남교차로광장'이라 불리는 1호 광장, '동부광장'이라 불리는 2호 광장에 이어 옥암동 '만남의 폭포' 교차로 25호 광장까지를 포함한 28개의 광장이 운영되고 있다. 여기에 휴식이나 도시 미관을 위한 경관광장이 더 조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목포의 광장은 다중이 모여 집회 등 여론 형성을 하거나 행사를 진행하는 문화광장이 아니라 교통광장이라는 점이다.

#목포 1호 광장은 쌍교촌
눈을 돌려 보면 쌍다리, 쌍교(雙橋)라는 지명이 더러 있다. 숯불갈비 요리로 이름이 있는 담양의 경우 특정 지명이나 행정구역은 아니다.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발원한 증암천에 두 개의 다리가 걸쳐 있는 것이다. 하나는 1920년대 일제가 설치한 전남선 구간의 '증암철교'이다. 광주에서 시작하여 담양을 거쳐 경남 진주까지 이르도록 계획된 것인데, 1944년 일제가 군수물자 확보를 위해 철로를 뜯어가는 바람에 폐선된 것으로 현재는 보행로 또는 농로로 쓰이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인근 마을 이름을 딴 '유산교'로서 4차선 교통로이다. 나란히 하고 있어서 쌍교이다.
기록이 많지 않지만, 이번에는 목포진 쌍교촌에 주목해 보자. 내가 쌍교촌에 애틋한 관심을 갖는 이유가 있다. 쌍교촌 특히 북교동 일대는 근대교육의 시작점, 근대문화의 발상지라는 생각 때문이다. 목포항 인근의 근대 역사·문화 공간의 문물들은 주로 일본 제국주의 자본에 의해 성립한, 본질적으로 약탈성을 지닌 것이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무안목포진지도> 상단 유달산 북동사면에 위치한, 북문 바로 앞 '쌍교촌(雙橋村)'이라는 지명이 눈에 쉽게 들어온다. 비교적 간략한 지도인데도 쌍교촌을 크게 드러낸 것은 지명의 중요성 때문이지 않을까.
(목포)진으로부터 2리 지점이라는 부기로 보아 걸음으로 대략 10분 거리, 약 800m 지점이다. 지도에 보다시피, 북문을 나와 서문과 동문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행로이며, 북으로 유달산 봉수대는 물론 동문 쪽으로 노적봉과 산정리에 이어 용당리나 관해동에까지 이르는 핵심 통로이다. 어림 단정하더라도 목포진성 외곽지역 교통과 교류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겠다.

유달산의 서남쪽 바다가 보이는 옴팍한 동네 다순구미 온금동이나 서산동 지역은 개항 이전부터 인구가 늘어 포화상태가 되었다. 유달산 동쪽, 노적봉 북쪽 기슭은 예로부터 대나무가 많아 죽동(竹洞)이었는데, 오늘날 북교동 방향으로 마을이 들어서면서 신죽동이 새롭게 조성되었다.
그 동북사면 골짜기 산기슭 아래 평지가 시작되는 곳에 제법한 물웅덩이(沼湖)가 있었다고 한다. 유달산으로부터 발원한 수원지였을 것이다. 그 웅덩이에 걸친 다리가 두 개 있었던 모양이다. 지도와 문헌에 등장하는 쌍교촌, 쌍교리는 이곳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기준으로 유달산 방면 약간 가파른 지역을 북교동, 아래 평지면을 남교동으로 나뉘어 불렀다.

#공동묘지에 택지 개발
개항 이후 목포진의 인구 증가는 폭발적이었다. 일본인들은 주로 새로 조성된 신도심에 거주하였다. 지금 보아도 도로가 반듯하고 계획된 구역이다. 유달동과 만호동 일대인데, 유달산 남쪽이라서 남촌이라고 불렀다. 옛 일본영사관과 목포항 주변으로 일본식 건물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 구직을 위해 고향을 떠난 조선인들은 의지할 곳, 오갈 데가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면 보통 야트막한 산자락이나 강변에서 원초적인 거적생활을 하는데, 그들은 유달산 북동쪽 쌍교촌 인근으로 몰려들었다. 그곳은 마침 공동묘지였다. 이름하여 북촌이라 했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거주 환경은 지리적, 문화적으로 이처럼 경계가 분명했다. 그래서 그런지 '북촌'하면 왠지 역사적 한기가 느껴진다. 맞불로 '남촌'에서는 온기가 피어나듯이.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여 당시 관할 관서였던 무안감리서 초대 감리 진상언(秦尙彦, 1857~?)은 대대적인 택지 조성 사업을 진행하였다. 1904년경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이곳 쌍교촌 일대 공동묘지를 택지로 전환하려 한 것이다. 연고 묘지 53기, 무연고 묘지 약 100기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였다. 2년 만에 터전(邑)이 조성되었고, 이어 남교, 죽동, 만복동 등 차례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반듯한 신규 주택이 아니라 수 백호에 이르는 주거 환경이 돼지우리(豚柵) 같았고, 세금이 막중하여 원성이 높았다. 이에 <황성신문>에서는 '목포 인민 호원가(木浦人民呼冤歌, 1906.8.16.)'로,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목포 인민 애원가(木浦 人民 哀寃歌, 1906.8.17.)'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실었는데, 내용이 매우 절박하고 통탄스러워 정약용의 '애절양(哀絶陽)'를 다시 읽는 심정이었다. 어떤 이들은 기사의 일부 앞부분만 인용하여 진상언 감리의 치적으로 진술하던데, 당시 상황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밝힌다.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이곳 (신)죽동과 쌍교촌의 글자를 따서 죽교리로 통합하였고, 당시까지도 무안군 이로면이었던 이 지역을 1932년 목포부에 편입하면서 죽교동이라 불렀다. 여러 번의 행정구역 개편을 거쳐 현재는 대부분 지역이 행정동인 목원동에 속해 있다. 목포 북교초등학교는 죽교동과 목원동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항구도시의 물 걱정
목포와 같은 항구도시들은 대체로 생활 터전이 비좁은 경우가 일반이다. 거북손처럼 유달산 기슭에 붙어 옹기종기 사는 달동네, 지나는 유람객에게는 정겹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사노라면 가장 큰 불편이 식수나 생활용수 확보 그리고 배변 시설의 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리스 에게해 남부에 위치한 산토리니, 경남 통영의 동피랑 마을의 고통 또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목포는 바다가 해일로 넘쳐 들거나 영산강이 범람하기도 하였으니 이래저래 물 걱정이 많은 지역이었다.
이러니 지역 유지들의 대표 자선사업이 마을에 공동 우물을 시공해 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시대는 좀 다르지만, 온금동 주민이 1922년 5월에 건립한 '유학 정인호 시혜 불망비(幼學 鄭麟浩 施惠 不忘碑)'가 그 흔적이다. 서산초등학교에서 유달산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던 것을 도로 공사를 하면서 마을 중앙 큰샘 뒤로 옮겨 놓았다. "목마른 마을에 단비요, 그늘진 고을의 태양이로다.(旱亭甘雨 陰谷太陽)"라는 칭송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이러한 우물 자선사업과 시혜 불망비는 온금동, 서산동 일대에서 대여섯이나 추가로 확인되고 있다.
반면 같은 산기슭 마을이라 할지라도 북교동 일대에서는 집집마다 물 배달을 통해 식수 문제를 해결하였다. 비록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유달산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지표수가 있었고, 마을 조성이 비교적 늦었다는 점 그리고 추측컨대, 식수는 배달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생활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19세기의 세도가 김좌근의 저택에 고정적으로 출입하였다는 '북청 물장수'를 기억하고 있거니와, 북교동의 이름난 물장수는 의외로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목포 최초로 음수 배달 사업을 기획하여 사업가로서 성공한 실존 인물이었으니, 작금 '배달의 민족' 되시는 분들은 그녀에게 한 수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북교동 이 골목 저 언덕, 집집마다에서 '옥단아~', '옥단어~'라는 호출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차범석의 희곡집 『옥단어!』에 등장하는 물지게꾼 여성 '옥단이'가 활약했던 사연이 이러하다.
북교초등학교와 북교동 탐방 이야기는 <하>편에 이어가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