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목포 개항, 근대교육의 교문 …목포 북교 초등학교 [문화발원지 남도 학교 기행]

#시간의 상실
1895년 11월 16일, 그날을 끝으로 조선의 월력(음력)은 끝났다. 조선 역사에는 1895년 11월 17일은 없다. 자고 일어나보니 1896년 1월 1일이 된 것이다. 이 44일간의 시차와 제도와 의식의 변화는 생각보다 진폭이 크고 충격이었다. 이른바 을미개혁 단행으로 양력이 채택된 것이다. 새 연호는 '건양(建陽)'이었다. 메이지유신처럼 '양력(陽)을 내세워(建)' 시간의 흐름을 재정립한 것이다. 백성들의 일상, 시간이라는 새로운 부호 체제에 부작용이 없었을까.
연호의 변경은 국정의 중대한 변화를 시사하는데, 이전 2년 동안의 연호였던 '개국(開國)'을 폐기하고 새로운 연호인 건양을 채택하였다는 것은 서구의 문명과 제도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선포인 것이다. 고종은 매달 음력 초하루에 올리는 제의인 삭전(朔奠)을 이날, 양력 1896년 1월 1일에 거행하였다. 이날을 기점으로 단발령도 즉시 시행되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한 격분에 더해 단발 칙령은 민심을 들끓게 하였고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었다.
아다시피, 황후 시해 직후 실시된 1895년 8월~1896년 2월에 이루어진 근대화 개혁을 을미개혁이라고 한다. 그 이전 1895년 2월 2일에 고종은 교육의 중요성을 담은 <교육 입국 조서>를 발표하였다. 이어 1895년 7월 19일 소학교령(小學校令, 칙령 145호)이 제정 공포되면서 서울과 지방 곳곳에 관립, 공립소학교 설치가 이어졌다. 본격 근대교육의 시발이 된 것이다.
#목포 개항의 의미
요즘 목포항 인근 '근대 역사 문화 거리'를 거닐다보면 '1897'이라는 숫자 조형물을 자주 마주할 수 있다. 1897년 10월 1일 목포 개항 시점을 기념하여 설치한 것이다. 목포 개항은 이전 부산, 원산, 인천의 개항 경우처럼 강제적 조약에 의한 것이 아닌 고종의 칙령에 의한 비교적 자주적, 자발적 성격이 강하였다. 그렇더라도 제국주의 자본의 유입과 식민적 약탈 통로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시 개항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선과 주변국 간의 대외무역 상황을 보면 청나라와의 무역은 증가한 반면 일본과의 무역은 점차 침체되어 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때문에 일본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국면 전환이나 돌파구 마련이 시급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 정부에 대해 지속적으로 목포항을 비롯한 추가 개항을 타진하고 있었다. 당시 목포는 면적이나 인구 규모로 미루어 볼 때 커다란 거점도시가 아니라 영산강을 통해 내륙으로 진입하는 '길목으로서 포구(木浦)' 수준이었다. 이러한 지역성을 고려할 때 일본이 유달리 목포에 눈독을 들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첫째, 지리적으로 영산강 하구에 위치하여 수운을 통해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영산강 주변 도시인 무안, 영산포, 나주에 이어 광주는 물론 지석강을 통해 능주까지 아우르는 광역 시장이 배후에 있어 물류 기지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일본의 식량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미곡 집산 지역으로 나주평야가 있고 그 미곡을 운반하기에 적합한 지점이었다. 넷째, 목포는 한반도 서남권에 정위치하였기에 한반도와 중국, 일본을 연결하는 수심이 비교적 깊은 국제적 항구로서 장점, 어업 항로 기지로서 가치 그리고 군사 전략적인 효용성이 컸을 것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목포 개항은 일본 정부 또는 일본공사관 측과 협의로 진행된 사안이 아니었다. 1897년 7월 3일 토요일, 의정부 외무아문에서 '목포와 증남포 항구 개항에 대한 청의서'를 제출하여 고종의 재가를 받았다. 증남포는 대동강 하구의 진남포로서 오늘날 남포시이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좀 더 살펴보자. 먼저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35권 건양 2년(1897년) 7월 3일 기사이다. 의정부에서 "이것이 통상 교섭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우리나라에도 유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금년(1897년) 10월 1일로 택하여 개항할 것이며, 일체 준비해야 할 일들과 관세 등 여러 가지 실무 문제를 모두 다 이미 개항한 다른 항구의 규정에 의하여 처리할 것"이라고 상주하니 고종이 재가를 하였다는 것이다.
같은 해 7월 13일 <독립신문>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사가 등장한다. "전라도 목포와 평안도 증남포는 본년 10월 1일에 열어 통상 구안을 만들고 모든 일은 이미 열린 구안의 장정을 방조하여 판리할 차로 7월 3일에 외부대신 서리 민종묵이 회의에 제출하여 의정부에서 협의 타당하다 아뢰어 재가를 물었더라."라는 내용이다.

외무아문을 비롯한 의정부 관료들은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는 가장 유용한 방안의 하나로 개항장에서 거둬들이는 관세 수입에 주목하게 되었다. 직접적인 관세 수입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주변국과의 통상 과정에서 관세를 차관 도입의 담보로 하여 재정 수입을 늘리는 것도 매우 적절한 방안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민간 기업보다는 국영 기업 또는 정부 주도의 통상이었으므로 고관세 징수와 그것을 빌미로 한 투자 유치는 적절한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경제난 해소를 위해 자국 우선의 극단적인 배타적 정책을 펴고 있는, 미국 트럼프 정부가 대한제국의 통상 정책, 개항 정책을 훔쳤을까 싶다.
다시 간략히 정리하자면, 국내 상공업의 진흥이 목포와 증남포 개항의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판단과 주장은 매우 사적인 것이며 우호적인 시선이다.
학문적 식견과 전문 능력이 부족하여 더 이상 추적할 수 없지만, 당시 목포와 증남포를 통해서 거둬들인 관세의 총액이 궁금하다. 의정부 정책 입안자들이 구상한 차관 유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도 궁금하다. 궁극적으로 국내 상공업 진흥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 더 나아가 국리민복(國利民福)을 꾀해 정부의 체통이 바로 섰는지도, 몹시 궁금하다!

#향교에서 근대교육이라니
1895년 7월 19일 소학교령이 제정 공포되고, 1897년 10월 목포 개항이 이루어지면서 목포·무안지역에서도 근대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무안향교 내에 무안항공립소학교(務安港公立小學校)가 개교한 것이다. 오늘날 목포북교초등학교로 이어지는 목포·무안지역 공립 근대교육의 시작이었다.
"사람을 기르는 것이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라는 <교육 입국 조서>의 취지가 이 지역에서도 실현된 것이다. 향교 내 동재 건물인 양사제(養士齊)를 주 공간으로 활용하였는데, '선비를 기르는 공간'이라는 건물의 명칭과 지극히 부합하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경제 규모나 지역성으로 볼 때 목포가 오히려 무안에 의존성을 지니며 지역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목포에서는 같은 해 사립인 일신학교가 창립되었는데 이는 흥진학교로 개칭되어 1907년 11월 무안항공립소학교 후신인 공립목포보통학교에 통폐합되었다.
1895년 소학교령이 공포되었지만 전국 곳곳에서 본격적으로 학교가 설립된 것은 1896년부터이다. 한성을 중심으로 관립(국립)소학교가 처음 11개 설치되었으며, 지방에서는 관찰부 소재지, 항구, 군(郡)과 부(府)의 소재지를 중심으로 공립소학교가 설립되었다. 1896년 9월 21일 <독립신문>에서 파악한 현황에 따르면 공립은 38개였다. 약 10년 후인 1906년 통계에 따르면 관립소학교는 13개, 공립소학교는 110개로 증가하였다.
관립과 공립의 차이는 적지 않았다. 관립소학교는 의정부의 학부에서 직접 관리하였지만, 공립소학교는 지방 전현직 관료나 주민이 자금을 모아 설립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교장은 군수가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관립, 공립 망라하여 교원의 서임(임용)은 학부의 추천을 통해 정부에서 임면하는 공식적 발령이었다. 비록 관등이 낮은 5등~9등의 판임관(判任官) 직급이었지만 국가 공무원 처우였던 것이다.
초기 공립소학교의 경우 교육 공간은 서원이나 향교, 관아의 부속건물이 활용되었다. 관련 예산이 확보되지 않아 월 700원이어야 하는 운영비가 절반 정도 지급되는 경우(안동 소학교의 사례)도 많았다. 나머지는 원토(서원), 교토(향교)를 통해 조달하거나 지역민에게 부과되는 경우가 있어 지역민들로부터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개교 직후인 1898년 무안항공립소학교의 학생 수는 22명(제국신문)이었다. 가장 많은 곳이 부산항(59명), 평양(52명), 함흥(43명)이었으며, 적은 곳은 춘천(9명), 김포(14명), 해주(18명)소학교였으니 어려움 속에서도 초창기 근대교육에 대한 열기는 유지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초기 교원들
무안항공립소학교 초창기 현장 교육을 담당한 교원들의 행적이 궁금하였다. 내 스스로 교원 출신이기도 하거니와 두 차례 학교 설립을 직접 경험한 자로서 그 창업의 어려움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에 소개된 무안항공립소학교 최초의 교원은 변지학(卞志學)이었다. 1899년 5월 26일자 <황성신문> "무안항공립소학교 교원 변지학 승서 판임관 5등(務安港公立小學校 敎員 卞志學 陞敍 判任官 五等)"이라는 인사 발령 기사이다. 변지학을 판임관 5등으로 승급한다는 내용인데, 판임관은 학부의 추천만으로 임용되는 인사 대상자이다.
이어 1901년 현 북교초등학교 자리로 이설할 때까지 무안항공립소학교에 재직한 교사들의 이름을 추적하여 열거하고자 한다. 모든 교사가 나름의 과오나 성과가 있겠지만 초창기 학교 그들의 노고를 기억하고자 함이다. 변지학에 이어, 1899년 부교원 김현필(金顯弼)을 해임하고 대체하여 김윤호(金潤浩)를 임용하였다.
1900년 3월 변지학을 전라남도관찰부 공립소학교로 발령하였고 후임으로 경주군(慶州郡) 공립소학교 교원 이강호(李康浩)를 무안공립소학교 교원 판임관 6등으로 임용하였다.
1900년 8월 이강호를 충청북도관찰부 공립소학교 교원 판임관 5등급으로 승급 전출하였고, 후임으로 함경북도관찰부 공립소학교 교원 마희율(馬羲律)이 판임관 6등으로 임용하였다. 1900년 10월 교원 이희재(李喜幸, 전후 기사로 보아 幸은 宰의 오자인 듯)를 판임관 6등으로 임용했다는 기사 등이 보인다.
초창기 교원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있으려니 아이들의 똘망똘망한 모습도 그려진다. 마치 재현된 AI영상처럼 양사제 교실 풍경도 떠오른다. 22명의 첫해 학동들은 역사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목포 이설 이후 나머지 '목포 근대교육, 북교동 시대 편'은 다음 기사에서 이어가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