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작가가 말하는 ‘좋은 이웃’

약속 시간이 임박해 김애란 작가에게 전화가 왔다. 만나기로 한 건물에 도착했는데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작가를 마중 나갔다. 다른 건물 앞에서 서성이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헤어스타일 때문이다. 데뷔 당시부터 지금까지 짧은 단발을 고수하는 것 같지만 실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 했다. 최근 출간한 〈안녕이라 그랬어〉의 소설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회사나 지하철, 동네 편의점 등 어디선가 마주쳤을 법한 이들이 비슷한 고민을 한다. ‘나’를 우선하면서도 이따금 ‘이웃’을 돌아보려는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다른 곤경을 겪는다. 〈바깥은 여름〉 이후 8년 만의 소설집이다.
데뷔 24년 차, 초창기 작품에서 도시 청년들이 머물던 고시원이나 옥탑방, 반지하의 ‘방’을 예리하게 감각하던 작가의 시야는 작품을 거듭하며 훨씬 넓어졌다. 이번엔 집주인이 바뀔 예정이라 곧 이사를 해야 하는 전셋집 아파트, 저렴한 물가의 나라에서 얻은 ‘한 달 살이’ 주택, 천장이 누수된 빌라, ‘거의 전부를 걸어’ 열었지만 손님의 발길이 끊긴 책방 등 다양한 공간이 등장한다. 전작에 비해 인물도 나이를 먹었다. 표제작 후보이기도 했던 ‘좋은 이웃’의 부부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시대인과 어떤 가치와 속도를 공유한다 믿은, 그런데 그게 틀렸다는 걸 막 깨달은 사십 대’다.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독서지도사인 ‘나’는 곧 전셋집을 빼주어야 한다. 새로 이사 올 위층의 젊은 부부는 인테리어 공사를 위해 양해를 구하며 승강기에 ‘좋은 이웃이 되겠다’고 적었으나 약속과 달리 번번이 소음으로 수업에 훼방을 놓는다. 나는 ‘전셋집을 계약할 때 조금 더 대출받아 집을 샀어야 한다’고 후회하는 남편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지고, 사정이 좋지 않다고 짐작해 수업료를 올리지도 않았던 시우네가 아파트를 샀다는 소식에 상실감을 느낀다. 또 다른 단편 ‘숲속 작은 집’에는 ‘이국에서 마주한 노골적인 계급 차에 좀 쩔쩔매는’ 은주가 등장한다. 방 청소를 담당하는 현지 여성에게 ‘메이드’라 부르는 게 불편해 ‘청소해주시는 분’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자 남편 지호는 기만적이라며 ‘풋’ 소리를 내며 웃는다. 선의와 위선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읽다 보면 어딘가 마음이 불편해진다.
표제작에는 킴 딜과 로버트 폴러드가 부른 ‘러브 허츠’라는 곡이 나온다. 실제 유튜브에 곡을 검색해 들어가면 한국어 댓글이 눈에 띈다. 최근 한 달 사이 달린 글들이다. “정말 안녕이라 그러네요.” 한국말로 ‘안녕’이라고 들리는 가사가 실은 ‘I'm young’이다. 소설 속 ‘나’는 화상영어 프로그램에서 만난 교사 로버트에게 한국어의 ‘안녕’에는 ‘반갑다’와 ‘잘 가’라는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평안하시라’는 뜻도 있다. 김애란 작가를 사회학자라고 명명한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썼다. 그는 미학자 R. G. 콜링우드의 말을 빌려 ‘좋은 예술은 공동체를 제 마음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의식의 부패를 막는 약’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우리는 우리의 안녕을 위해 김애란의 안녕을 기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소설을 통해 공동체의 안녕을 묻는 김애란 작가를 만났다.
신간을 낼 때 어떤 마음인가. 신형철 평론가의 표현을 빌려 ‘김애란 정도 되면’ 불안하지 않으려나.
불안함은 신인이든 기성이든 똑같이 겪는 감정 같다. ‘한 시절이 이렇게 묶이는구나’라고 느낄 때 드는 꽤 복잡한 감정들은 작가라면 비슷할 것 같다. 물론 신인 분들에 비해 엄살 부릴 정도는 아니지만 창작품의 생애 순환 주기도 짧아지고 있고 오프라인 서점 매대에 노출되는 시기도 며칠 안 될 거다. 번번이 불안함이 있지만 엄살 부릴 정도는 아니다. 걱정했던 것보다 독자 분들이 많이 반겨주셨다.
책이 나온 지 한 달 됐다. 독자에게서 받은 인상적인 질문이나 후기가 있다면?
(소설에도 나오는) ‘감사합니다’라는 말에 대한 독자의 독후감이 인상적이었다. 감사하다는 게 값진 말이 아니라 값어치를 재는 말이 됐다고 표현했는데 단순하지만 많은 걸 담고 있는 문장이다. 북토크를 할 때 이전과 달리 삶의 고민을 나누거나 답을 구하고 싶어 하는 분이 많았다. 소설에 30~40대가 많이 나와서인지 그 나이대에 직면하게 되는 숙제들, 가령 거주나 돌봄 문제에 대한 고민을 나눠주었다. 나도 답을 갖고 있지는 않아서 말씀을 잘 들어드리고 다른 고민을 보태는 식으로 자리를 가졌다.

작가를 사회학자에 빗대 정의하기도 했다. 당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까. 이번에도 전세사기, 팬데믹, 층간소음, 배달노동 등 현실의 소재가 담겨 있다.
‘사회학자’ 질문에 대해 설명하다 보니 책 바깥의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되었다. 어느 땐 내 말이 내 작품보다 커지는 건 아닌지 좀 걱정이 된다. 그래도 분명히 영향 받은 일들이 있었다. (출판사가 작성한 소개 글에서) 소설집의 주인공이 공간이라고 정리해주었는데 여러 형태의 주거 공간이 나온다. 작품이 쓰인 코로나19 시기의 환경이나 조건의 변화들이 소설에 스몄다. 이왕이면 여러 계층을 다루고 싶었다. 한 계층의 시선으로만 이야기를 꾸렸을 때 자칫 피해의식처럼 보이거나 시선을 좁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 인물의 계층이나 사회적 지위, 경제적 지위도 고정된 게 아니라 때와 장소, 나이에 따라 계속 변한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 그래야 독자들도 소설 속 인물, 혹은 자기 자리를 더 풍부하게 감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크게는 코로나 시기 조건들의 영향을 받았고 구체적인 사건은 전세사기를 비롯해 아파트 관련 기사들의 영향을 받았다.
당대의 사건이라고 할 때 지난 소설집이 떠오른다. ‘입동’ 같은 단편에서 세월호 참사가 연상됐다.
당연히 당대의 공기가 작품에 스며든다. 너무 가까운 사건이거나 진행 중인 사건은 쓸 때 어렵고 조심스럽다. 소설은 사후적인 장르이지만 모든 게 정리되거나 해결되진 않았어도 내가 내 이야기 안에 기대고 싶어서, 그 시절을 건너고 싶어서 쓴 이야기들이 많다. 세월호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세월호 소설을 쓰려 했고, 그게 〈바깥은 여름〉에 묶였다. 흥미로운 건 한국 독자들은 대체로 알아주시고 외국 독자들은 모르더라. 그래도 보편적인 애도의 감정에 공감을 해주었다. 두 반응 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침이 고인다〉를 냈을 때도 ‘88만원 세대’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었다. 한편으로는 해석의 여지가 좁아지는 것 같아 부담스럽지 않나.
그 정도의 자의식은 없어졌다(웃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읽히면 좋다고 생각한다. 세계 문학사든 한국 문학사든 그 안에서 같은 주제가 반복돼왔다고 할 때 ‘이 이야기가 지금 왜, 혹은 어떻게 읽혀야 할까’라는 질문과 만나게 된다. 바로 지금의 특수성으로 전달되고 공명하는 게 불편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대 문학사에서 방이나 집, 약자 얘기들이 많았다면 그게 왜 지금 한 번 더 반복되거나 변주되는가? 그에 대한 답으로 작품이 해석된다면 그건 내게도 의미가 있다.
‘좋은 이웃’의 주된 소재는 아파트다. 이 작품을 쓸 때 이웃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집회 당시 많은 분들이 오랫동안 모여 목소리를 냈다. 개인 사정상 참여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었다. 5차 집회 즈음, 여러 이유로 모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각자 ‘8시에 소등하자’는 일종의 약속이 있었다. 그때 나도 8시에 불을 끄고 베란다에 나가봤다. 주위의 아파트 불빛이 하나둘 꺼지는 모습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밋밋한 철근 콘크리트가 마치 모스부호처럼 서로를 연결시켜주는구나 싶었다. 그때 느낀 안도감이 있다. 불과 몇 년 뒤 우리가 다시 (정치적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 때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불을 끄거나 켰던, 그 아파트였다. 이분법으로 나눌 순 없지만 나의 이익, 특히 부동산 자산으로 대표되는 아파트, 그리고 이웃의 생명이나 안전을 전제하는 여러 조건들 이 두 개를 저울질해야 하는 순간 작은 차이로 많은 분들이 아파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불과 몇 년 전 소등의 장면과 겹쳐지면서 혼란을 느꼈다. 두 행위의 주체가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그 이웃도 이 이웃도 한 사람이었다는 데서 느끼는 약간의 당혹감에서 출발한 단편이었다. ‘왜 이웃은 한 가지 얼굴이 아니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도착하게 된 대답은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더러 자기 돌봄 욕구와 공동체의 안정이 길항 작용을 하고 경합하며 발전해온 한국 현대사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안녕을 추구하는 쪽으로 자주 이겨봤던 경험이 있는 사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작가가 생각하는 좋은 이웃이란?
이 제목이 단행본의 표제작이 될 뻔했는데 나중에 바뀐 이유 중 하나가 ‘좋은’이란 말이 주는 오해 때문이었다. 무결함을 묻는 의미로서 ‘좋은 이웃’이라는 말로 질문이 시작된다면 그건 반성적인 언어가 아니라 방어적이거나 결벽적인 질문이 될 수도 있겠다. 각각 한계와 결함을 가진 구성원들이지만 그 안에서,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거나 질문을 공유하는 식으로 움직이면 좋지 않을까. 이기심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생존 욕구와 공동체의 안녕을 동시에 도모하는 가운데 균형이 맞으면 제일 좋을 것 같다. 그게 어렵다면 두 개를 저울질하는 순간 내 쪽에 추를 조금 더 옮기려고 하다가도 손끝이 떨리는 사람, 거기가 좋은 이웃의 완성은 아니어도 출발이 되지 않을까. 두 가지를 다 도모하는 게 배려나 헌신의 의미가 아니라 결국 나의 안녕에도 도움이 된다. “비는 한 집 위에서만 내리는 게 아니다”라는 속담을 썼는데 전세사기의 경우도 잘 살펴보면 손해에 대한 비용을 모두가 나눠 지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적어도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 고민을 한다.
젊은 독자들이 ‘좋은 이웃’에 공감을 많이 하더라. 그 시기에 가진 혼란이나 고민이나 박탈감 같은 게 비단 기성세대의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됐다. 금융소득이 노동소득을 추월했던 환경에 세대 불문하고 노출이 되어서 아마 그런 것 같다.
계급의 차이를 포착하는 감각이 예민하다.
개인적인 배경과 사회적인 배경이 다 있을 것 같다. 시골에서 맞벌이하는 부모, 특히 생활력 강한 어머니 아래서 명랑하게 자랐다. 시골이고 고만고만한 공동체 안에서 자라 잘 몰랐던 것 같다. 한 가계 안에서도 기복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실감하게 되는 것들이 있지만 아마 그보다는 대학을 서울로 오게 되면서 맨 살갗으로 감각하게 된 바깥 풍경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접했으면 덜 생소했을 수 있지만 상경하면서 내가 경험했던 여러 거주 조건과 거주 형태가 영향을 주었다. 사회적인 걸 따지자면 꼭 작가라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공기 자체가 그렇다. 아주 촘촘하게 서로를 평가하고 점수 매기고 별점 주고 코멘트하는 문화가 요 몇 년 사이 또 발달해서 모든 분들이 센서를 갖게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런데 어떤 현상에는 한 가지 면만 있지 않다.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신분제가 뒤집혔고 계급 이동의 가능성이 경쟁이나 비교를 부추겼다는 생각도 든다. 계급 이동의 역동성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스스로 20대에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 강했던 것 같고, 30대에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 강했다고 했다. 40대에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많은 작가들이 초기작에서는 자기 얘기를 쓴다. 자기 안의 문제가 해결돼야 남도 보이고 우리도 보이니까. 마찬가지 과정을 밟았고 창작뿐 아니라 자연인으로서도 20대에는 어쩔 수 없는 주인공 의식이 있다. 그러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은 단계로 가는 게 30대 정도다. 자의식이 건강하게 흐려지는 시기인 것 같다. 내 중심을 가진 채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30대였다가 40대 이르러서는 다른 사람의 렌즈로도 상황을 살피는 게 좀 더 훈련이 됐달까. 기대도 포기도 여러 번 반복하다 적당히 간에 맞는 시선을 갖게 되는 시기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살아온 시절과 내가 목격해온 타인들의 시절이 넓어지면서 관찰자로서 좀 더 겸손한 시선이 생기는 것 같다. 원경이 확보되는 느낌이 좋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는데 초기작은 근경에 가깝다.
24년 차, 슬럼프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큰 봉우리라기보다 작은 언덕들이 파도 치듯 있었다. 좀 길어진 건 〈바깥은 여름〉부터 최근 단편집을 내기까지의 시간이다. 책을 여러 권 내다 보니 그 안에서 고민들이 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할 때 좋게 말하면 심화가 되고 나쁘게 말하면 답습이 되는데 그 안에서 길을 찾는 것도 고민이 됐고, 몸에 있는 이야기들을 세상으로 한번 내보냈으니 밀물 썰물처럼 깨끗이 비우고 다시 채우는 시간들이 필요했던 것 같다. 정체기라기보다는 필요한 시간이었고 아마 다 겪는 시간들이지 않을까.
처음 쓸 때와 비교해 가장 달라진 건 뭘까. 예전 작품이 비관적이었다면 이제 ‘거기서 그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고도 했는데.
아주 어른도 아닌데 종종 ‘좋은 어른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남이 보지 않는 데서는 무단횡단도 하는 사람이라 말할 자격이 없는데(웃음) 그래도 드는 생각은, 비관적인 전망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그게 타당하다 하더라도 그 전망을 얘기하거나 고정하기 전에 한 번 더 고민하는 사람이 어른 같다. 그다음 세대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렇다. 그 답을 최근에 갖게 된 것 같다. 희망이나 낙관, 관습적이고 아름다운 착지가 아니라 어렵게 구한 답으로서 그렇다. 순진해서가 아니라 알지만 한 번 더 고민해보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내가 그런 어른이라는 뜻은 아니고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작품이 해외에서 번역되기도 하고 영화나 연극이 되기도 했다.
언어의 몸이 바뀌거나 장르가 바뀌면 작품의 수명이 늘어나는 느낌이다. 창작인인 동시에 생활인인 내게도 도움이 되겠구나, 생각한다. 그렇게 번 시간으로 조금 더 창작하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도 든다. 여러 개의 몸을 가져보는 게 작품으로서도 행운이다. 이자람씨가 데뷔작(‘노크하지 않는 집’)을 판소리로 만들어준 적이 있다. 방에 사는 여성 청년들이 다른 사람과 마주치기 싫어 소리나 기척으로 상상하는 내용인데, 판소리에 의성어 의태어가 많아서 단편의 성격과 아주 잘 어울렸다. 소리로 상상한 고립된 여성의 자취 생활을 재밌게 본 기억이 난다. 연극은 아이슬란드나 슬로바키아 작가였어도 경험할 수 있지만 판소리는 한국 작가로서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출간된 〈이중 하나는 거짓말〉 ‘작가의 말’에서 첫 독자인 배우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대체로 마감에 임박해 초고가 나온다. 뜨거운 상태로 원고를 보여줄 때 차가운 거리감으로 정확하게 봐준다. 비슷하게 창작 일을 하니까 기술적인 부분에서 코멘트도 해준다. 여전히 중요한 첫 독자다.
쌍둥이 언니도 첫 독자라고 알려져 있는데.
경험이 많은 기성작가라도 자기 문장 습관을 자기가 잘 모르는 경우가 있는데 (언니가) 수사적인 부분을 봐주기도 하고 독자로서의 인상을 얘기해준다. 청년 시절에는 공들여 봐줬는데 요새 육아와 일로 바빠 성의 없어진 경향이 있어 큰 기대 없이 한번 보라고 한다(웃음).
각별히 애정하는 작품 속 인물이 있나.
단편에서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을 많이 그렸던 것 같다. 이를테면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 나오는 인물은 편의점에서 네 캔에 1만원짜리 맥주를 사고, 마트에서 가격을 꼼꼼히 비교하며, 집에 와서는 직장 상사 흉도 보는 평범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모든 동물이 갖고 있는 자기 생존 욕구를 역행해 제자를 구한다거나 뭐 이런 식으로 뜻밖의 선택을 할 때가 있다. 본디 용감하고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가계부를 신경 쓰고 교무부장을 욕하던 사람이 가끔씩 하는 어떤 결정들, 그럴 때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여전히 놀란다. 이번 책의 경우 마지막 단편(‘빗방울처럼’) 속 신혼부부에 애정이 간다. 코로나 시기에 방이나 집 얘기를 하면서 이 얘기(전세사기)를 안 쓸 수 없었다. 유동성 파티 안에서 혜택을 본 사람도 있고 나만 합류하지 못한 게 아닐까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전세왕’이 가능한 환경 안에서 피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있다. 마지막에 ‘살아’라는 말이 너무 직접적인 메시지 같아서 작가로서 주저되었지만 인물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라 그렇게 넣었다.
동료들의 작품을 많이 읽는다고 들었는데 요즘 눈여겨보는 작가가 있나. 서점에서 성해나 작가의 소설집과 순위를 다투고 있기도 한데.
동료들 작품은 대체로 다 좋아하고 읽으며 힘을 받는 편이다. 성해나 작가 작품 중 극우 집회 안으로 들어가는 한국계 미국인 이야기(‘스무드’) 같은 것도 굉장히 인상 깊었다. 소설로 옳음에 대해 쓰는 건 쉬울지도 모른다. 필요한 얘기지만 옳음에 착지를 하면 때로 이야기가 더 부풀어지지 못하고 멈춰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 단편을 보고 섬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집단에 들어가 외국인의 시선에서 타자화시켜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그 안의 인물을 지지하지는 않아도 정서적으로 좀 들여다보고 이해까진 아니지만 엄연한 한국의 한 풍경으로 직시하더라. 마찬가지로 김기태 작가의 소설도 좋아한다. 비슷하게 다초점 렌즈를 쓴다는 인상을 받았다. 어떤 결론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 결론을 향해 갈 때 좀 빠른 길을 택할 경우 누락되거나 손실되는 가치들이 있다. 그걸 같이 살피면서 자기가 도착하려고 하는 주제에 오히려 힘을 실어주는 면이 인상적이다. 잘 바라보는 일이 제일 어렵다고 하는데그걸 잘하는 동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창작자로서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에 어떤 영향을 받았나.
한국 근현대 문학이라는 공유지를 넓혀주었다고 생각한다. 문학적 성취가 있고 조명받은 작가지만 지금처럼 아주 크게 대중적 지지를 받거나 호응받는 작가는 아니었다. 어떤 주제나 작품에 집중했던 30년 가까운 세월들, 그 긴 시간이 헛된 게 아니었구나라는 증명을 해준 것만으로도 문학인에게 주는 힘이 크다고 생각한다. ‘장거리 작업’을 해야 하는 창작자들에게 주는 위안이 있다. 무형의 정신적 가치를 주었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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