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탐구] 맑은 물길 따라 ‘무주’ | 전원생활
이 기사는 전원의 꿈 일구는 생활정보지 월간 ‘전원생활’ 8월호 기사입니다.
청정한 자연환경으로 이름난 땅, 전북 무주. 안온한 산천에 안긴 채, 맑은 강물을 따라 무주를 순례해본다. 무주의 뿌리인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대천 강물은 완만한 산 능선을 타고 내려와 읍내를 적시고 무주 사람들의 삶에 흘러든다. 때로는 예술가의 슬픔을 품고 역사와 맞닿으며 삶의 시름을 녹이기도 한다.투명한 강물에 낮에는 푸른 산천이, 밤에는 반짝이는 은하수와 반딧불이 빛이 비춰든다. 강물은 내도리 마을을 타고 내려오는 금강 본류와 합류하며 마침내 장쾌한 물의 장관을 만든다. 시끌벅적한 여행은 사양하고픈 이들에게 시간마저 살포시 흐르는, 깊고 맑은 무주로의 여행을 권한다.
자연과 인간의 교감 지남공원
첫 목적지는 무주읍에 자리한 지남공원의 등나무운동장. 5월이면 연보랏빛 등꽃이 만개하는 이곳은 이제 초록빛 이파리들로 푸른 그늘을 만들고 있다. 고(故) 정기용 건축가는 등나무 구조물을 설계하며 “모더니즘이 놓친 자연과 인간의 교감과 감성을 내게 일깨워준 작업”이라 했다. 자연을 활용해 정지된 건축물을 흐르는 시간 속에 엮어낸 이곳에서 잔잔한 여운을 안고 머물다, 한낮의 태양 빛을 피해 김환태문학관과 최북미술관으로 들어선다.

무주 출신 문학비평가 김환태는 순수문학을 추구했지만, 일제강점기 순수문학가들이 변절하자 절필한 채 무주로 내려와 생을 마감했다. 조용한 강물만치 슬픈 침묵을 또 다른 무주의 예술가, 조선 후기 화가 최북의 삶에서도 느낄 수 있다. 벼슬아치가 그림을 그리라고 협박하자, 그는 자신의 오른쪽 눈을 찔러 멀게 했다.
광인이라 불렸던 그의 그림에선 김환태 작가에게서 느낀 감성이 전해진다. 메추라기와 나비 등 작고 여린 것에 닿은 화가의 시선은 산수화 ‘하산세우도’에서 또 한 번 드러난다. 비 내리는 여름 산 아래, 섶 다리를 건너는 가객. 세 예술가에게서 느낀 무주의 예술이 조용히 흐르는 물길과 닿아 흐르고 있다.
물길이 이끈 신비로운 시간 여행 나제통문
남대천 물줄기를 따라 설천면으로 향한다. 뜨거운 여름 햇살에 데워져 따듯해진 개울물, 설천면체육공원 맞은편 설천 제방교에서 소천교 사이 500m 길이의 수로에서 물놀이를 하는 한 가족이 보인다.
“설천면에 있는 친할머니 댁에 왔어요. 오늘이 서울 올라가기 전 마지막 날이라 이곳에 들렀죠. 평일 낮 시간이라 한산한 거예요. 주말이면 사람들로 꽉 차요.”
튜브를 타고 수로를 따라 내려오는 두 딸을 지켜보는 엄마와 대나무 족대로 천렵에 나선 아빠. 어느새 가족 모두가 개울로 모인다. 빛과 물그림자가 노니는 작은 피서지의 전경이다.

이 물길을 따라 차로 5분만 올라가면,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적이 나타난다. 석모산 줄기를 따라 동편과 서편을 가르며 세워진 벽에 굴을 뚫어 문을 만든 통문이다. 일제가 신작로를 놓기 위해 뚫은 것인데,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나제통문’이라 이름이 붙었다.
20억 년 전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편마암 바위 속을 걸으니, 동굴 속 암석처럼 울퉁불퉁한 모양으로 인해 마치 다른 세상, 다른 시대에 온 듯하다. 지금도 옛 신라 지역인 동쪽의 무풍면은 경상권 방언을, 옛 백제 지역인 서쪽의 설천면은 전라권 방언을 사용한다. 두 마을을 잇는 길 위에서 통문을 지나며 시간의 경계를 건너본다.

굽이치는 계곡물 소리를 배경으로 서늘한 바람이 청량한 감촉으로 끼쳐오는데 보고만 있을 수 있나. 제27경 명경당 위쪽 물길에서 잠시 발을 담그자 여름 한나절 산행의 노곤함도 선선히 씻겨 사라진다. 신라 신문왕 때 지어진 백련사에서 무예를 수련하던 9000여 명의 승려들이 이 계곡물에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하얀 눈처럼 흘려내렸다던데, 바위들 사이로 흰 거품을 내며 흐르는 계곡물을 보니 덕유산의 동맥처럼 흐르는 구천동 계곡 곁에서 살던 옛 선인들의 삶이 가히 눈앞에 그려진다.
백련사를 지나 향적봉까지 오르는 2.5㎞의 산행길을 걷는다. 산길이 가팔라지며 신갈나무, 철쭉, 호랑버들 등 고산지대 식생들이 길을 수놓는다. 그중 적갈색 수피를 한 주목나무는 시간의 수호자처럼 이곳을 지키며 고고한 멋을 풍긴다. 모두 ‘덕 많은 산’ 덕유산이 오래도록 품어낸 자연의 풍경이다.
8~9월 캄캄한 밤엔 천연기념물 반딧불이가 날아올라 가수 황가람 씨의 노래 ‘나는 반딧불’의 가사 속 ‘우주에서 무주로 날아온 밤하늘의 별들이 반딧불이 된’ 환상적인 풍경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그의 구슬픈 노래 속엔 가사만큼이나 특별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주 반딧불축제 담당자가 정중식 작곡가에게 축제용 노래를 의뢰해 만들어진 곡 ‘나는 반딧불’이 앨범으로 나오게 됐고, 밤하늘만큼 캄캄한 어둔 시기를 보냈던 무명 가수 황씨가 그 노래를 리메이크해 그간의 설움을 씻어내듯 빛을 발하게 된 사연이다. 고요한 물길을 보건대, 마음도 물결처럼 느슨해진다. 하루가 저무는 길목에서 시간도 무게를 덜어내듯, 나른하게 흐른다.
“자연특별시라고 불릴 만큼 청정한 무주의 자연 자원으로 지역 문화 상품을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에서 시작한 사업입니다. 국내 와인 제조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탓에 처음엔 해외에 나가 기술을 배워왔어요. 이후 주류 회사와 협업해 와인 제조 기술을 도입했습니다. 달· 눈(雪)·해 같은 자연물에 향적봉의 해발고도 1614를 붙여 ‘달 1614’ ‘설 1614’ ‘해 1614’ 시리즈를 만든 것도 무주를 알리기 위해서였어요.”
한국·일본·중국 등 동북아 지역에 분포하는 머루는 포도보다 알은 작지만, 항산화 물질인 안토시아닌 함량이 3배에서 많게는 10배 정도 높다. 이 대표는 와인의 원료가 되는 머루를 지역 농가에서 70% 수매하고, 30%는 직접 재배한다. 한 잔 맛을 보니, 머루 와인 맛은 의외로 순박하고 자연스럽다.

“머루는 우리나라 과일 중 와인으로 만들기 가장 적합합니다. 와인으로 만들었을 때 색상이 좋고 산도도 높아서죠. 게다가 무주는 해발 400~600m에 달하는 고지대라 일교차가 크고 토양 조건이 좋아 머루의 품질도 뛰어나요.”
양조장 부지 옆에 2022년 문을 연 와인 카페 ‘술고지’는 무주 와인을 더 친근하게 소개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덕유양조가 생산한 다양한 와인을 맛볼 수 있고, 와인을 탄 온수로 즐기는 족욕 체험, 와인 만들기 체험, 와이너리 투어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앞으로 체험장을 활성화하고 신제품 개발에 힘을 실을 생각입니다. 올가을부턴 복분자 와인을 출시할 예정이고, 장기적으론 머루 와인을 증류해 브랜디도 선보일 계획입니다. 머루 와인이 한국을 대표하는 와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원래는 대전 근교로 공방을 차릴 생각이었는데, 적당한 곳이 없었어요. 마침 무주에 991㎡(300평) 정도 되는 널찍한 땅이 있다는 말을 듣고 와봤죠. 부지에서 마을 건너로 산세가 훤히 트여있는데, 남편이 보자마자 ‘딱 좋다, 여기로 하자’고 해서 땅을 사 공방 건물을 지었어요.”
이 대표는 대전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체육 강사로 15년간 근무했다. 그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수업이 1년 동안 중단되면서 취미로 도자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도자기공예를 배우는 교양수업에서 느꼈던 물레를 만지는 감각은, 30년 뒤 그의 손끝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흙덩어리를 물레에 던져 손으로 중심을 감고, 매끄러운 형태로 다듬는 손끝의 감각은 오직 물레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어요. 그 감각에 매료돼 공방을 차리게 됐죠.”
수업은 회당 2시간 정도 진행되며 접시 하나와 컵 하나를 만드는 게 기본이다. 수강생들이 도자기를 완성하고 나면 이 대표가 공방에 마련한 전기 가마로 초벌과 재벌을 마쳐 집으로 배송한다. 수강생들의 연령과 취향에 따라 수업 방식은 매번 바뀌지만, 이 대표는 이곳을 찾은 이들 모두가 자신이 느낀 물레의 맛을 느껴보길 바라며 꼭 물레 작업을 권한다.
“대전에서 학교 수업을 마치고 출발해 저녁 6시쯤 이곳에 도착해, 도자기 작업을 하다 보면 금세 새벽 1~2시가 돼요. 주변에선 퇴근하고 또 일을 하느냐며 걱정하기도 하지만, 저한텐 도자기 만지는 작업이 휴식 같은 거라 재밌기만 해요. 이 재미를 이곳을 찾는 분들이 함께 느낄 수 있으면 해요.”

무주는 한때 전라도 양잠산업 중심지였지만 1990년대 들어 양잠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이 공장도 20년간 문을 닫았다. 그 시절 이야기를 카페에 담으려고 서씨는 1970년대 양잠산업이 번성했던 시기를 상징하듯, 카페 이름을 ‘전북제사1970’으로 지었다. 낡은 전화기와 공장 설비 기계 등 옛 물건들로 인테리어하고, 음료 이름에도 외래어 대신 한국어를 사용해 ‘겁나게 쓴(에스프레소)’ ‘그냥 쓴(아메리카노)’ 등 복고적인 분위기를 살렸다.
“천마나 사과 같은 무주의 특산품을 활용한 디저트를 꾸준히 개발하고 있어요. 작년엔 야외에서 조그만 음악 콘서트를 열었는데, 앞으로도 무주에 청년들의 발길을 이끄는 재밌는 이벤트를 꾸준히 열고 싶어요.”
무주 토박이인 청년 창업가 장동연 씨(29)는 제주도 여행 중 제주의 청정한 자연을 테마로 다양한 굿즈를 만드는 숍들을 보고 감명받아, 무주에도 해보자 결심했다. 그리고 2023년 9월, 무주읍내에 굿즈 상점을 차렸다.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인쇄물을 제작하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활동했던 미적 감각이 굿즈를 만드는 데에도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반딧불이를 형상화한 복주머니, 무주의 풍경을 그린 노트와 포스트잇 등 귀엽고 앙증맞은 굿즈들이 가게 안에 가득하다.
그중 장씨가 가장 애착하는 상품은 무주의 고지도에 색감을 얹어 디자인한 패브릭 포스터다. 무주에 관한 옛 사료를 뒤져보다 발견한 고지도를 본뜬 선 위에 파란 색감을 더해, 예스러우면서도 세련된 감성을 살렸다.
“산, 강, 별이 가득한 조용한 풍경은 무주 밖에선 볼 수 없는 경관이죠. 향교와 적상산사고 같은 오래된 역사도 숨어 있고요. 앞으로도 무주의 한적한 시간을 즐기면서 굿즈 숍을 꾸려가고 싶어요.”
겉모습은 조금 허름하지만, 현지인이 극찬하는 길모퉁이의 조그만 맛집이다. 대표 메뉴인 민물새우탕은 무주 남대천에서 잡은 민물새우로만 끓이는데 손톱만 한 크기의 새우가 한가득 들어가 끓일수록 진한 감칠맛이 우러나온다. 가짓수는 많지 않지만, 계절에 맞춰 제철 채소로 만드는 밑반찬은 맛이 꽤 좋다. 엄마가 차려준 듯한 토속적인 맛에 이끌려 한 숟갈씩 뜨다 보면 어느새 한 대접을 말끔히 비우게 된다.

푸짐한 버섯전골 상차림 구천동맛집
덕유산 산행 후 허기진 배를 채우고 지친 몸을 풀기에 딱 좋은 능이버섯전골 전문 한식집이다. 덕유산 리조트 단지 인근에 자리해 산행 후 들르기에 좋다. 사골로 육수를 낸 국물과 무주산 버섯 10여 가지가 푸짐하게 들어간 전골은 따로 양념장을 넣지 않아 버섯의 은근한 맛과 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반찬으로 나오는 백김치는 무주 고산지대에서 키운 배추로 담근 것인데 부드럽고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천마 돌솥밥 전문 덕유정
덕유산 초입에 자리한 한식집이다. 무주 대표 특산물 천마를 돌솥밥으로 맛볼 수 있다. 밥맛에 은은한 천마향이 어우러져 밥이 구수하고 차지다. 사전에 요청하면 직접 만든 김부각도 맛볼 수 있다. 두툼한 조기구이와 덕유산 나물로 만든 밑반찬은 돌솥밥과 곁들여 먹기에 조화롭다. 한방오리백숙과 토종닭백숙 등 보양식도 판매한다.

건강한 전통 디저트 송아리
화과자, 개성주악, 도넛설기 등 전통 디저트를 퓨전화해 선보이는 디저트 가게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화과자는 인삼, 사과 등 무주 특산품을 본떠 수제로 만든 것으로, 외양도 빼어나지만 대두콩으로 만든 앙금이 들어가 맛도 자극적이지 않다. 디저트와 곁들이기 좋은 음료로, 직접 만든 식혜도 판매한다. 화과자를 만드는 원데이 클래스도 운영 중이다.

원조 어죽 식당 무주어죽
금강 변을 따라 줄을 잇는 어죽 식당 중에서도 이곳은 꼭 한 번 들러야 한다. 금강에서 직접 잡은 빠가사리(동자개)만 사용해 잡내가 나지 않고, 10시간 넘게 고아 육수가 진하다. 어죽과 콤비로 먹기 좋은 충북 지역의 향토 음식 도리뱅뱅이도 별미다. 동그랗게 빙 둘러 담은 빙어를 고추장 양념을 발라 구운 음식으로, 고소한 맛과 바삭한 식감이 어우러져 술안주로 제격이다.

글 이수정 기자 | 사진 임승수(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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