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삶] 특급 동지와 삼일로창고극장에 관한 추억

박은희 2025. 7. 2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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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은희 연출가·전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

십여 년 전 대학교수인 제자가 연출전공 여학생을 추천하였다. 사회초년생이 되는 자기 제자에게 필자를 길잡이로 소개한 셈이었다. 단체소속을 물으니, 친구들과 만든 '모이공'에 있다고 한다. '모이면 공연한다' 첫만남이었지만 대화는 길게 이어졌고, 모일 사람과 장소가 중요하다는 결론에 어렵지 않게 공감하였다. 그러나 대화가 깊어지면 점점 어려워진다. 어려운 연극 풍토가 열정 넘치는 젊은이들이 지속할 수 있는 연극 활동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극을 같이 할 사람은 뜻의 깊이와 방향이 같아야 하고, 감각의 결이 같아야 하고, 인내심과 의지가 같아야 하고, 배우 재능이 있거나 각 분야 스태프 재능이 있어야 하고, 일정 수입이 없어도 티 안내고 마지막공연 마칠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내야 한다. 마치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전생의 동지들을 찾는 일이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연극을 하는 일생은 동지를 찾고 규합해서 연습하고 공연하는 일의 연속이다.

동지들이 규합되면 모일 장소가 필요하다. 연습실과 공연장이다. 연습실은 큰 소리로 악을 써도, 소리 내어 울어도, 웃어도, 북치고 장구치고 노래를 불러도 소음 신고하지않을 이웃이 있어야 하고, 임대료는 무료이거나 낮아야 한다. 공연장 또한 마찬가지이다. 흡음, 방음시설이 잘 되어있고 무대기계설비와 조명장비, 스피커시설 등을 제대로 갖춘 공연장은 외부 소음을 차단해주어 오로지 공연에 필요한 배우 목소리, 음악이나 음향효과 등 소리의 적당한 울림과 시각적인 표현이 연출자의 의도대로 펼쳐질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연출과 배우화술, 무대장치에 탁월한 큰 스승님과 연출과 연기, 음향효과에 탁월한 작은 스승님 외에 연습실과 공연장, 장소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을 만나게 되었으니 행운아이다. 장소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은 연극인이 아니기에 필자는 그분을 '특급 동지'라고 부른다. 필자의 '특급 동지'는 고 유석진 신경정신과박사이다.

유 박사님은 우리나라에 모레노 정신치료극을 최초 도입하고 환자치료에 필요한 연극을 공부하기 위해 필자의 큰 스승님이 출강한 워크숍을 수강하던 중에 폐관 직전의 국내 유일한 아레나 무대를 구할 독지가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2층 양옥의 아래층 바닥을 파내어 고를 높이고 직사각형 무대를 둘러싼 한 줄짜리 벤치식 의자. 무대 높이 7㎝의 아레나 스테이지 유형. 청계고가의 남산 방향 내리막길, 삼일로 오른쪽 언덕 계성초 옆 골목 안, 서울시 중구 저동1가 20의 6. 이름하여 삼일로창고극장. 그는 사재를 털고, 대출도 받고, 이중섭 화가를 치료해주고 받은 은지화도 팔아 보태서 그 공간을 샀다. 그리고는 큰 스승님께 위탁운영을 제안하며 청소년과 젊은 연극인들을 위한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필자는 젊은 시기에 개관 단원으로 시작해서 바로 그 공간,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연출가가 되었다. 필자의 어릴 적 놀이터 애관극장도 처음엔 인천의 부호 정치국(丁致國)이 자신의 창고를 개조하여 국내 최초 사설공연장 협률사(1895년)를 세웠다는데, 그동안 경험한 다양한 극장을 다 놔두고 길가의 창고만 보면 생기가 발동한다. 오래전 파라다이스호텔에서 열린 새얼아침대화에 참석하고 귀가 길에 대한통운 붉은벽돌 창고들을 발견하고 옆의 선배에게 소리쳤다. "전부 소극장 만들면 좋겠어요!" 선배는 당장 대한통운에 전화했고 불과 며칠 전 3년 임대 줬다는 답을 받았다. 아까웠지만 한참 후에 미술계의 아트플랫폼이 탄생한 걸 보면서 삼일로창고극장과 '특급 동지' 모습이 중첩되었다. 필자는 스스로 후배연극인들의 '특급 동지'가 되어주질 못한 아쉬움에 지금도 그 근처를 서성일 때가 있다.

/박은희 연출가·전 인천시립극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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