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명목을 찾아서] (14) 정평공 손홍량(孫洪亮) 선생과 안동 송리 은행나무

최미화 기자 2025. 7. 22.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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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웅 대구생명의숲 이사장, 전 대구시 녹지과장
일직손씨 가문을 중흥시킨 손홍량이 20세 전후에 심었다는 은행나무. 수령이 700여년으로 안동시 일직면 송리에 있다.

안동시가 스스로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자부하듯이 안동은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독립운동가 이상룡(李相龍, 1858~1932) 등 사표(師表)로 삼을만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 바탕에는 높은 도덕심으로 나라와 이웃을 배려하고 사회에 공헌하는 후손을 길러내는 명문가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일직(一直) 손씨(孫氏)도 예외가 아니다. 시조는 중국에서 귀화한 손응(孫凝)이라고 한다. 원래 순(荀) 씨였는데 고려 제8대 왕 현종(재위 기간 1009~1031)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손(孫) 씨로 하사(下賜) 받았다고 한다. 가문을 중흥시킨 사람은 여말의 문신 손홍량(孫洪亮, 1287~1379)이다.
여말에 5명의 왕을 40여 년간 보필하며 나라를 위해 봉사한 손홍량 선생을 기리는 유허비와 비각.

공은 호가 죽석(竹石)으로, 안동시 일직면 송리에서 태어났다. 1309년(충선왕 1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1348년(충목왕 4) 첨의평리로 있을 때 밀직부사 김인호(金仁浩)와 함께 정조사(正朝使, 새해를 축하하러 가던 사신)로 원나라를 다녀왔다.

1349년(충정왕 1) 추성보절좌리공신(推誠保節佐理功臣), 도첨의 찬성사를 거쳐 삼사(三司)의 책임자인 판삼사사(判三司事, 종일품)가 되었다. 이듬해 복천부원군(福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51년(충정왕 3) 나이가 많다며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이때가 공이 나이 65세, 충선왕을 시작으로 충숙, 충혜, 충목, 충정 등 5명의 왕을 40여 년 동안 보필하며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원(元)의 간섭이 극심했던 때였다. 왕의 호에 충성, 충(忠) 자를 붙인 이유는 원나라에 충성하라는 뜻이다.

10년의 세월이 흐른 공의 나이 75세 때,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때 공민왕은 난을 피해 안동으로 오게 된다. 공이 찾아가 수습책을 건의하니 왕이 감격하여 "그대는 진실로 곧은 사람(子誠一直之人)"이라며 치하(致賀)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개경으로 돌아가서 직접 그려 정평공에게 하사한 초상화. 이때 산호 지팡이와 방석도 같이 하사했다. 일직손씨대종회 제공.

난이 평정되자 왕은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때 공은 노구를 이끌고 다시 개경으로 올라가 환도(還都)를 축하하자 공민왕이 "늙을수록 더욱 도탑다(老而益篤)"고 하며 친히 초상화를 그려주고 산호(珊瑚) 지팡이와 방석을 하사했다. 이어 고향으로 내려오려고 하니 이제현(李齊賢, 1287~1367), 이색(李穡, 1328~1396) 등이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고 애석한 마음을 시(詩)로 표현했다.

이때 목은(牧隱)은 "그대 있어 조정이 깨끗하더니/ 그대 가니 난리로 시끄러웠네"라고 했다.

1379년(우왕 5) 93세로 돌아가시니 직성군(直城君)에 책봉되고 정평(靖平)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일직의 타양서원과 밀양의 혜산서원에 제향되고 고향마을에 유허비가 세워졌다.

오랜 세월과 전란을 거치면서 공의 많은 유물이 멸실되었으나, 공민왕이 직접 그려준 초상화는 현재 밀양 세덕사에, 20세 때 직접 심었다는 700여 년이 된 은행나무(경상북도 자연유산)와 어릴 때부터 마시던 우물은 송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일직 손문은 대구지역 문풍 진작(振作)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가장 돋보이는 분이 공의 11세손 모당 손처눌(孫處訥, 1553~1634)이다. 대구 수성리에서 출생한 모당은 전경창(全慶昌, 1532~1585)과 정구(鄭逑, 1543~1620)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

임진왜란 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부친상과 모친상을 당해 크게 활동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유재란에서는 전공을 세워 고을의 수령이 조정에 표창을 상신하려 하자 극구 만류했다. 이어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대구향교와 연경서원(硏經書院) 중건에 앞장섰다. 이괄(李适, 1587~1624)의 난, 정묘호란에도 창의했다.

특히, 그가 대구지역 유학 발전에 끼친 영향은 유시번(柳時蕃, 1616~1692) 등 200여 명의 제자를 길러냄으로써 대구가 문향으로 자리 잡게 한 점이다. 낙재 서사원과 함께 대구의 사림(士林)을 주도하면서 교육도시의 밑거름을 쌓았다.

송리의 은행나무는 수령에 비해 그리 굵지 않다. 원 줄기는 죽고 맹아(萌芽)가 자란 것이다. 이렇듯 묵은 뿌리에 다시 새싹을 틔우는 끈질긴 생명력이 바로 일직 손문의 가풍(家風)인 것 같다

대구에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앞서 말한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도 그중 한 분이지만 봉산서원에 배향된 문탄(聞灘) 손린(孫遴)과 더불어 아들 처신(處愼), 손자 단(湍) 3대가 연이어 문과에 급제해 고을과 가문을 빛냈다.

대구의 문과 급제자가 총 38명(현풍, 칠곡 등은 제외)임을 감안하면 시쳇말로 대단한 집안이다. 상동(上洞)에서 범어네거리로 옮겨 심은 큰 은행나무 역시 심은 사람은 일직 손문이고 마지막 소유자 역시 일직인 손중괴(孫重槐)이다. 일본의 소프트뱅크 CEO로 성공한 세계 제일의 부호로 꼽히는 손정의도 선대가 대구의 일직 손문(孫門)이다.

이정웅 (사)대구생명의숲 이사장, 전 대구시 녹지과장
이정웅 (사)대구생명의숲 이사장, 전 대구시 녹지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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