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싹하지만 여운 남는 뱀파이어 이야기, 연극 ‘렛미인’
8월16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드넓은 대극장 무대가 북유럽의 눈 덮인 자작나무 숲으로 변했다. 쌩쌩 찬 바람에 눈발 휘날리고, 푸르스름한 가로등 아래 덩그러니 놓인 정글짐 위를 소년과 소녀가 춤추듯 오르내린다. 연극 ‘렛미인’은 간간이 소품을 움직여 공간을 변형할 뿐, 140분 내내 이 단일한 세트를 유지한다. 어둑하고 서늘한 무대 자체가 던지는 울림과 상징이 그만큼 크다.
평탄치 않은 가정,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소심한 소년 ‘오스카’(안승균·천우진)는 늙은 ‘아빠’ 하칸과 이웃집으로 이사 온 미지의 소녀 ‘일라이’(권슬아·백승연)를 만난다. 마을 부근 숲에서 잔인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가운데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하지만 눈부시게 예쁜 일라이는 소녀도 소년도 어른도 아이도 아니었고, 하칸 역시 아빠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짧고 어색한 대화보다 몸짓과 눈짓, 침묵과 모스부호로 더 많이 소통한다. 오스카의 외로움과 일라이의 고독함은 예측불허의 방향으로 폭주하며, 마침내 새하얀 설원을 피로 물들인다. 오싹하면서도 여운을 남기는 뱀파이어 소재 연극이다.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소설이 원작. 연극에 앞서 스웨덴과 미국에서 각각 영화로도 제작됐다. 2013년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이 작가 잭 손의 대본과 존 티퍼니의 연출로 초연했다. 뮤지컬 ‘원스’와 연극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에서도 호흡을 맞춘 ‘명콤비’다. 신시컴퍼니는 2016년 이 원작 프로덕션의 무대와 디자인을 그대로 구현하는 ‘레플리카 프로덕션’ 방식으로 국내 초연했다. 이번엔 1200석 규모의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으로 옮겨 선보인다.

무용수처럼 쉴 새 없이 뛰고 움직이는 배우들의 예사롭지 않은 몸놀림이 대사 못지않게 많은 걸 이야기한다. 단검을 쥔 소년들의 군무 등 율동 장면이 많아 한편의 무용극이라 해도 무색하지 않을 정도. 연출가 티퍼니는 최근 국내 언론 화상 인터뷰에서 “안무는 타인과 쉽게 교감하지 못하는 인물들의 소통 욕구나 감정선의 표현”이라고 했다. 얼음 같은 차가움 속에 애잔함을 실어 나르는 올라퓌르 아르날즈의 음악은 극의 밀도와 몰입감을 높여준다. 무대에서 라이브로 보는 마지막 수영장 학살 장면은 영화와 색다른 묘미를 제공한다.
‘나를 들여보내 줘’란 뜻의 제목 ‘렛미인’은 초대받지 못한 뱀파이어는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전승 설화에서 착안한 것 같다. 오스카가 일라이에게 ‘들어오라’고 말하는 순간 둘은 사랑을 이루고 서로를 구원하게 되는 걸까. 아니면 소년 오스카가 다시 늙은 하칸이 되어 슬픈 사랑을 반복하는 ‘도돌이표 엔딩’일까. 이 작품에서 변치 않는 사랑을 읽을 수도 있지만, 시간의 풍화 속에 시들어가는 사랑에 관한 잔혹한 우화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원작 소설이 사랑의 구원 쪽에 가깝다면, 연극은 관객에 따라 다른 해석을 낳을 것 같다. 티퍼니 연출가는 “죽음과 영생을 다룬 작품”이라고 해석하면서, “오랜 시간 삶을 유지할 때 지극히 외롭고 슬픈 삶을 산다는 것도 이 작품의 메시지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8월16일까지.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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