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지으며 나를 바라보니

한겨레 2025. 7. 1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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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서당 입구에 있는 율곡 이이(왼쪽)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진 원철 스님

앞에 붙어있는 ‘마롱리’ 역시 ‘마카롱을 비틀어 놓은 말인가 보다’ 하며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폈다.

알고 보니 마롱리는 본점이 위치한 파주의 어느 동네의 지명이었다. 궁금증이 발동하여 장맛비가 잠시 그친 주말을 이용하여 임진강변을 달렸다. 요즘 어딜 가나 유행하는 베이커리 커피집 간판이 멀리 보인다. 입구에는 ‘마롱리 면사무소 카페 since 1958’이라는 광고 겸 안내를 위한 그림판이 붙어있다. 1958년부터 파평면사무소가 오랜 세월 머물렀던 곳으로, 3300평의 넓은 대지 위에 본관인 면사무소, 보건소, 대서소 등 근현대의 옛 건축물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여 리뉴얼한 공간이라고 했다. 본관 아랫부분 주초석에는 준공 연도가 새겨진 기록문자를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화강암 벽돌로 지은 창고 같은 건물이 세월의 더께와 무게를 안고서 멀리서 찾아온 이들에게 달콤함과 씁쓰레함이 조화된 맛을 제공하고 있었다.

곁에는 율곡수목원이 있다. 율곡은 밤나무가 가득한 골짜기를 말한다. 밤파이 안에 들어가는 밤의 이미지가 오버랩 된다(광고판에는 공주 정안밤이라고 굳이 밝혔다).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이율곡(李栗谷, 1536~1584) 선생의 부친인 이원수 공은 아들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서 밤나무 1천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그 공덕은 자식의 이름을 만세토록 빛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율곡의 별명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다. 과거시험에 아홉번 수석(장원)을 했기 때문이다. 이퇴계(李退溪, 1502~1571) 선생이 어린 율곡을 만난 뒤 후생가외(後生可畏: 후학을 만나고서 경외감이 들었다)라는 인물평을 남길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 수목원 안의 둘레길엔 ‘구도장원길’이란 이름을 붙였다. 시험을 앞둔 이들이 합격을 기원하며 잠시 한숨을 고르면서 마음 안정을 되찾는 힐링처로 손색이 없겠다.

밤꽃에 둘러싸인 신사임당 사당. 사진 원철 스님

율곡의 영정과 위패를 모셔놓은 인근의 자운서원(紫雲書院)으로 갔다. 진입로 한켠의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사당 곁의 큰 밤나무(그때 남편이 심은 밤나무는 아니겠지만)에는 밤꽃 향기가 주변을 진동시킨다. 사임(師任)이라는 별호 자체가 태교의 일환이었다. 현숙한 부인인 주(周)나라 성군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妊)을 본받는다(師)는 뜻이었다. 율곡 아버지와 어머니 합장묘를 비롯하여 율곡의 직계가족 3대 무덤 10여기가 모여있는 곳이다. 어머니는 강릉 출신이고 아버지는 파주가 본관이다. 아내는 황해도 해주 사람이다. 그 시절에는 신부가 신랑집인 시댁으로 가서 사는 것을 ‘시집간다’고 했다. 신랑이 신부집인 장인댁으로 가서 사는 것을 ‘장가간다’고 했다. 율곡은 외가와 본가와 처가를 가리지 않고 인연 따라 두루 살았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었다. 16세 때 모친 사별 후 3년상을 치루었다. 계모와의 불화 끝에 가출했다. 외가인 강릉에서 마음을 추스린 후에 금강산까지 발을 디디게 되었다. 불가(佛家)에서는 ‘금강산에서 누구나 발심(發心)한다’고 했다. 금강산에 가면 누구나 수행하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명산이다. 내친김에 모친의 죽음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19세 때 출가를 결행했다. 그때 법명은 의암(義菴)이었다. 1년 만에 ‘색(色)이 곧 공(空)이요, 공이 곧 색이라’는 이치를 깨닫고 하산(下山)하면서 선시(禪詩) 한편을 남겼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요, 세속과 출가가 둘이 아닌 경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20세 때 일이다.

물고기 뛰고 솔개 날아도 위 아래 하나이니(鳶飛魚躍上下同)

그것은 공(空)도 아니요 색(色)도 아니로다(這般非色亦非空)

스스로 웃음 지으며 나 자신을 바라보니(等閑一笑看身世)

홀로 서 있는 숲 속에 해는 이미 기울었네(獨立斜陽萬木中)

밤꽃 속의 신사임당 사당. 사진 원철 스님

하지만 조선 유교사회에서 불가에서 수행한 이력은 성리학 원리주의자에겐 늘 정치적 시빗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굳이 그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심지어 ‘금강산 답사기’까지 남겼다. 모친 사별에서 하산까지 4년 기간은 그를 사상적으로, 정신적으로 한차원 더 승화시킨 의미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난까지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심심하면 불거지는 시시비비에 대하여 제자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심각한 표정으로 금강산 시절의 삭발 여부를 묻자 율곡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미 산에 들어갔는데 외양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들, 이미 마음이 불교에 빠져 있다면 외양을 따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경전을 공부하는 학인들에게 능엄경은 ‘차돌 능엄’이었다.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차돌멩이처럼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하기(어렵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그는 천재답게 능엄경(楞嚴經)을 좋아했다. 그 영향으로 능엄경의 문체인 네글자로 이루어진 문장 짓기를 선호했다. 사서삼경만 공부하기에도 버겁다고 여기던 시절에 능엄경까지 섭렵했다는 점에서 당신의 실용주의적 통섭 능력을 가늠할 수 있겠다.

율곡이 8세 때 지은 시(詩)가 남아있는 화석정(花石亭)을 찾았다. 정자 곁에서 유장한 곡선으로 흐르는 임진강을 굽어보는 것으로써 일정을 마무리했다. 돌아와서 보니 ‘율곡’이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광화문에서 조계사 방향으로 가는 도로명이 ‘율곡로’다. 종로 안국동 사거리에서 율곡로를 가로질러 송현공원과 북촌으로 가는 건널목을 하루에도 몇번씩 이용하면서 생활하는 곳이 아닌가.

원철 스님(조계종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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