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서 피어난 화가 전혁림, 이중섭과 책값 독촉하러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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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친구들
통영은 아기자기한 미항이다. 고깃배가 드나드는 전형적인 어항이다. 해산물이 많이 나니 경제가 풍족했고 풍광이 좋으니 인물이 많이 났다. 유치진·유치환·박경리·김춘수·김상옥·윤이상·전혁림 등 수많은 문학가와 예술가가 나왔다. 1945년 9월에 ‘통영문화협회’가 결성되었다. 대표는 가장 연장인 유치환이 맡고 간사는 윤이상·전혁림·김춘수가 맡았다. 정윤주(음악)·서성탄·김용기·박재성(이상 연극)·김상옥(문학) 등이 가세했다. 이들은 연극 공연, 미술전람회, 민속무용 발표회 등 문화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근로 청소년을 위한 중학교 과정의 공민학교 야간부를 개설했다. 한글강습회를 열고 유치원도 운영했다.
전혁림(1915~2010)은 통영에서 나고 자랐다. 1933년 통영수산전문학교를 졸업했다. 미술대학으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사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진남금융조합에 일하면서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미술은 물론 동서고금의 교양과 전문적인 지식을 독서로 메꾸었다. 이때부터 몸에 익힌 독서는 평생을 갔다.
![화가 전혁림, 1993년 자신의 작업실에서. [사진 유족]](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07/joongangsunday/20250607000153358uesu.jpg)
전혁림은 부산 피란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화우들을 사귀었다. 이때 사귄 화가들이 이중섭·박고석·황염수 등이다. 일본으로 떠난 이중섭의 부인 마사코는 남편에게 도움이 될 요량으로 값비싼 일본책들을 부산으로 보내었다. 이를 보수동의 헌책방 골목에 맡겼는데 책방 주인은 팔린 책값 지급을 미루었다. 이중섭은 전혁림을 데리고 책값을 독촉하러 갔다. 가서 보니 책방주인의 살림이 너무 빈궁해 보였다. 책방 주인에게 동정심이 발동한 이중섭은 전혁림을 끌고 물러났다. “그냥 가자. 돈은 받지 말자.” 이 모습을 본 전혁림은 이중섭은 참으로 도량이 큰 대인이라고 감탄했다.
![전혁림의 5m 길이 대형 유화 작품 ‘풍어제’(1997). [사진 유족]](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07/joongangsunday/20250607000154715xcwj.jpg)
전혁림의 곁에는 늘 시인 김춘수(1922~2004)가 있었다. 전혁림이 7년 연상이었다. 나이를 떠나 두 사람은 가까웠다. 1949년, 마산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된 걸 계기로 김춘수는 마산에 정착했다. 전쟁이 끝난 마산에는 문인과 화가들의 시화전이 자주 열렸다. 김상옥·전혁림 시화전(비원다방, 사랑다방, 1954년), 이원섭·전혁림 시화전(비원다방, 1954년) 등도 이때 열렸다. 이 무렵 통영의 전혁림은 교직을 구해 마산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살 데가 마땅하지 않아 김춘수의 집에서 기거한 적이 있었다. 김춘수는 1970년대 초반까지 마산에 살았는데 그의 집은 중앙극장 뒷골목에 있었다. 김춘수는 그림을 좋아했고 미술이론에도 밝았다. 통영에 이어 마산에서 두 사람의 미술에 관한 대화가 다시 이어졌다. 전혁림과 김춘수는 포비즘, 큐비즘, 초현실주의 등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했다.
1990년 여름, 김춘수는 현대화랑이 펴내던 계간 ‘현대미술’지에 전혁림에 관한 글 ‘쉬임없는 과정의 화가’를 기고했다. 이 글에서 김춘수는 미학자 에밀 우티츠의 말을 빌어 전혁림을 “계량가능한 규범을 얻으려고 힘을 다하는 예술가”라고 정의했다.
김춘수가 세상을 떠난 2년 후인 2006년, 김춘수·전혁림의 시판화전 ‘통영이 낳은 두 예술가의 만남’이 대구 맥향화랑에서 열렸다. 20점의 판화가 제작되었다. 두 사람은 인연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전혁림은 마산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진해·통영·부산 등지로 다녔다. 1956년, 진해 속천 쪽에 있던 유택열(1924~1999)의 2층 적산가옥에는 이젤 2개와 캔버스가 세워져 있었다. 하나는 유택열의, 또 다른 하나는 전혁림의 이젤이었다. 통영을 다녀온 전혁림은 한두 달씩 진해에 머물렀다. 2층집에 머물면서 그림만 그렸다. 두 사람의 동거는 1년 정도 지속되었다.
유택렬과 전혁림, 이 두 사람은 학교에서 정식으로 미술을 전공한 적이 없었다. 둘 다 독학으로 높은 예술적 경지에 다다랐다. 대부분의 독학자들이 그렇듯, 이 둘은 상당히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다. 처지가 비슷했던 두 사람은 강렬한 동지애로 뭉쳤다. 1959년에는 진해 등대다방에서, 또 1969년 11월 진해 대도다방에서 전혁림·유택렬 2인전을 가졌다.
전쟁 때 피난을 온 이중섭·황염수·김은호·변관식·박노수 등이 부산 영도의 ‘대한도기’에서 도자기 그림을 그리며 생활을 영위했다. 전쟁 후 그들은 부산을 떠났다. 전혁림은 1956년부터 1962년까지 대한도기에서 같은 일을 맡았다. 전혁림의 첫 서울 개인전은 1969년 국립공보원에서 열린 ‘도자화’ 전시였다.
1970년대에 전혁림은 주로 부산에 있었다. 중앙동 삼호여인숙 등을 전전하며 그림을 그렸다. 서울 샘터화랑의 엄중구 대표는 부산의 공간화랑에 갔다가 화랑 대표 신옥진의 소개로 전혁림이란 화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거기서 전혁림의 그림을 두 점 샀다. 이를 계기로 1980년부터 1990년까지 전혁림은 샘터화랑의 전속작가가 되었다.
![통영문화협회 시절 1945년 통영 미륵도 용화사에서. 앉아있는 사람들 중 왼쪽에서 5번째 전혁림, 4번째 유치환. 뒷줄 4번째 김춘수, 5번째 윤이상. [사진 유족]](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6/07/joongangsunday/20250607000156033gvrl.jpg)
서울에 온 전혁림은 사흘쯤 지나면 새벽녘에 통영 중앙시장에서 파는 바닷바람을 머금은 욕지도 채소가 그리워졌다. 전혁림은 몇 차례 박고석 부부를 통영으로 초대했다. 엄중구 부부가 동행할 때도 있었다. 전혁림의 부인 정명년은 요리 솜씨가 빼어났다. 참돔찜과 해삼탕에는 미나리를 얹어 향을 더했다. 후식은 견과류와 과일을 정성스레 꿀에 재어 만든 정과였다.
전혁림은 선천적으로 호기심이 많은데다 호학이었다. 명동 차이나타운에는 수입 일본 책과 영어원서를 파는 자그마한 책방들이 많았다. 명동의 골목을 쏘다니며 책을 사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서울에서는 통영에서는 볼 수 없는 AFKN 방송이 나왔다. 그걸 보는 것도 즐거웠다. 남대문시장에 가면 네이블(배꼽) 오렌지를 꼭 샀다.
1990년, 엄중구는 전혁림과 통영시장의 편지를 들고 베를린의 윤이상 집을 찾아갔다. “전혁림이 나처럼 일찍 유럽에 왔더라면 이미 세계적인 화가가 되어 있었을 터인데.” 윤이상의 탄식이었다.
친구를 잘 사귀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전혁림이었지만 마음이 통하면 모두가 다 친구고 말벗이고 스승이 되어주었다. 손위 손아래를 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남긴 엄청난 양의 그림들이 그의 친구이자 말벗이자 스승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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