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경남 독립의 역사와 더 큰 미래로] ⑨ ‘백마 탄 여장군’ 마산 출신 김명시

박준혁 2025. 5. 7.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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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1월 ‘독립신보’가 연재한 ‘여류 혁명가를 찾아서’라는 기사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임신 중에 체포되어 매를 맞아 유산하던 이야기, 밤에 수심도 넓이도 모르는 강물을 허덕이며 건너가던 이야기 등은 소설이기엔 너무도 심각하다.”

그녀에게 조국이 뭐였길래 임신한 몸으로 고문을 견딜 수 있었을까. 나라에 덕 본 거 하나 없지만, 독립을 위해 최전선에 나섰던 김명시 장군.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국에서는 오랫동안 잊혔던 그의 이야기가 최근 다시 조명받고 있다. 마산이 낳은 여성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의 뜨거운 삶과 투쟁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에 위치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 학교길./성승건 기자/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에 위치한 여성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 학교길./성승건 기자/

독립운동으로 바뀐 운명

어머니·오빠 3·1운동 참가
고려공산회 유학생 선발 후
중국서 항일 독립운동 시작
임신 중 체포돼 7년간 옥고
출소 후 조선의용군 지휘도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장군은 1907년 마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떴기에 어머니 혼자 어시장에서 일하며 5남매를 키웠다. 그녀의 형제는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할 정도로 집안은 가난했다.

평범했던 그의 삶을 바꾼 것은 3·1 만세운동이었다. 김 장군 어머니는 3·1운동에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희생이 죽음인지 부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 장군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마산지역 3·1운동 현장이 김 장군 집 근처에서 일어났으며, 어머니뿐만 아니라 오빠도 참가했다. 김명시 장군은 훗날 체포된 뒤 일본 검사에게 “3·1운동으로 자극받았다”고 진술했다.

어려운 환경에 야학으로 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 후 서울 배화여학교에 진학했지만, 중퇴했다. 같은 해 10월 고려공산청년회 유학생으로 선발돼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유학길에 오른다. 고려공산청년회는 조선의 독립과 민족운동을 지원하고, 청년 조직을 결성해 혁명 운동을 주목표로 하는 단체이다.

1927년 중국 상해로 파견돼 대만·필리핀·베트남 등지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30년 하얼빈 일본영사관, 기차역, 경찰서 등을 공격해 큰 타격을 줬고, 1932년 귀국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7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9월 초 중국 옌안에서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 조선의용군 모습. 앞줄 오른쪽 네 번째,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이 김명시 장군으로 추정된다./이춘 작가/

1945년 9월 초 중국 옌안에서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 조선의용군 모습. 앞줄 오른쪽 네 번째,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이 김명시 장군으로 추정된다./이춘 작가/

임신 중이던 김명시는 경찰 심문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유산하고 말았다. 임신을 한 몸으로 독립운동을 한 것이다. 아직 그가 누구와 언제 결혼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춘 작가는 “외사촌을 만났을 때 과거 김명시 장군이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랑 결혼했다고 하는 결혼사진을 받은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 들킬 수 있으니 관련 자료를 다 불태운 걸로 안다. 장씨 성을 가진 독립운동가로 추정되지만, 근거는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1939년 신의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 화북 지역에서 조선의용군 부대 지휘관을 맡아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조선 의용군들은 남자 군인들과 같이 전투에 참여해 항일 운동을 하는 그를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해방 후 김 장군은 서울로 돌아와 조선부녀총동맹 간부,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을 역임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활동했다. 이후 사회주의 활동가들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행적을 감췄다.
여성 독립운동가 김명시(오른쪽) 장군과 남동생 김형윤./열린사회희망연대/

여성 독립운동가 김명시(오른쪽) 장군과 남동생 김형윤./열린사회희망연대/
여성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의 생가 터./성승건 기자/

여성 독립운동가 김명시 장군의 생가 터./성승건 기자/

‘조선 잔 다르크’ 행적 찾기

결혼·검거 당시 기록 없어
2019년부터 포상 신청했지만
행적 불분명 이유 불가 통지
국토원 명단 미기재 등 근거
3년 만에 독립유공자로 서훈

◇여장군에서 무직 여성= “서울시 종로구 유상동 16번지에 사는 김명시라는 여자로,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유치장 내 약 3척 높이 수도관에 목을 매고 죽은 것이다.” 1949년 10월 13일 김효석 내무부 장관은 김명시 장군 사망을 이렇게 발표했다.

그는 사망 직전 2년여 동안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외부 활동을 피했다. 해방 후 남한은 좌우가 극심히 대립했던 시기였기에 그의 활동이 멈춘 것으로 추정된다. 김명시 장군과 함께했던 이들은 탄압을 피해 월북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직도 그가 어떻게 검거되었고, 조사를 받았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북로당 정치위원 혐의를 받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된 뒤 한 달 넘게 서울시 경찰국과 부평경찰서에서 수사를 받던 중 자살했다는 내용뿐. 그의 무덤조차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조선의 잔 다르크가 하루아침에 무직 여성으로 발표되며, 그의 삶은 수십 년 동안 잊혔다.

지역 시민 단체 열린사회희망연대가 김명시 장군에 대한 포상을 2019년부터 신청했지만 사망 경위 등 광복 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불가 통지가 내려졌다.

이후 열린사회희망연대는 북한 정부 수립에 기여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신미리애국열사릉’ 명단에 김 장군이 없고, 1991년 국토통일원 북로당 창립대회보고서 명단에도 김 장군의 이름이 없는 근거로 서훈 인정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 이후 2022년이 되어서야 서훈이 이뤄졌다.

서훈 과정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좌우 대립의 모습을 보였다. 서훈 직후 김명시 장군이 독립 유공자로 인정된 데 불만을 품은 한 남성이 회색 스프레이로 김 장군 벽화와 안내판을 훼손하는 일이 발생했다.
오동동문화광장 내 김명시 장군의 생가(무대)터./성승건 기자/

오동동문화광장 내 김명시 장군의 생가(무대)터./성승건 기자/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문화광장 내 김명시 장군의 생가 터를 알리는 표지석./성승건 기자/

창원시 마산합포구 오동동문화광장 내 김명시 장군의 생가 터를 알리는 표지석./성승건 기자/

〈인터뷰〉 책 ‘김명시: 묻힐 뻔한 여성 항일독립영웅’ 쓴 이춘 작가

“독립운동가 재조명 부족… 김명시 죽음 진상 규명해야”
이춘 작가가 지난달 29일 창원의 한 카페에서 경남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박준혁 기자/

이춘 작가가 지난달 29일 창원의 한 카페에서 경남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박준혁 기자/

이춘 작가는 김명시 장군의 삶을 조명한 ‘김명시: 묻힐 뻔한 여성 항일독립영웅’을 집필했다. 2022년 김명시 장군이 독립 유공자로 인정받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이 작가는 김명시 장군의 삶을 보면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딱 맞다”고 평가했다. 그의 삶은 대접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책에서 김명시 장군을 노동자 출신 혁명 운동가로 표현했다. 어떤 의미인가.

-김명시 장군을 비롯해 가족 모두 노동자 계급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가장 핍박받은 이들은 노동자였다. 김명시 장군은 평범한 노동자들 속에 탄생한 영웅이었다.

김명시 장군은 경찰권, 사법권, 군대를 가진 일본과 맞서 싸웠다. 독립을 위해서 러시아, 중국에서 항일 무장 투쟁했다. 이만큼 광범위한 곳에서 무장투쟁을 한 독립운동가는 드물다.

△김명시 장군이 자살했다고 발표됐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했던 사람이 스스로 삶을 포기했겠느냐는 의문은 계속 든다. 해방 후 친일 경찰들의 행위는 더 가혹했다. 일제보다 심했다고 한다. 고문으로 사망했지만 자살로 위장됐을 가능성이 크다. 김명시 장군을 담당했던 조사원도 당시 반공 검사로 유명했으며, 이후 진상 규명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3척 높이에서 자살했다고 하지만, 이 높이는 아이들 키다. 말이 안 된다. 자살 이후 나온 기사들도 내용이 다 다르다. 가족들도 보도연맹으로 학살된 이들이 있기에 보복이 두려워 다들 입을 닫아 왔다.

△서훈 과정과 이후에도 좌우 대립이 현 사회에 남아 있음을 보여줬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좌우 갈등은 아직도 남아 있다. 2022년 서훈 이후 벽화 훼손 사건으로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서훈 여부는 과정의 문제이지만, 테러는 지금 현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유족들도 항일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하고 숨죽여 살았어야 했다. 그만큼 좌우 대립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재조명이 부족하다.

지역 독립운동 역사가 계속 축소되는 거 같은 우려가 든다. 급여도 없고, 학교도 다지지 못한 이들이 했던 독립운동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친일 청산에 대해서는 강조하지만, 독립운동 역사에는 관심이 적다. 역사는 기억을 놓칠 때 가혹하게 다시 다가온다. 명심해야 한다.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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