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반독재 투쟁에 일생을 바치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

2025. 3. 1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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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⑮ 심산 김창숙
일생 동안 굽힘 없는 선비 정신으로 시대의 불의에 항거한 심산 김창숙 선생. [중앙포토]
“성인의 글을 읽고도 그가 시대를 구하려 한 뜻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 선비다.”(심산 김창숙)

심산(心山) 김창숙 선생은 1879년 경북 성주에서 유림가문 후예 김호림의 1남 4녀 중 외아들로 태어나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저명한 유학자 이종기·곽종석·이승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한주학파는 유교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서양실용학문과 만국공법을 수용해 외교를 통한 국권회복을 주장했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 후 이승희와 함께 상경해 을사오적 처단을 상소했고, 1908년에는 대한협회 성주지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1909년 한일합방론을 주창하는 일진회를 규탄하는 성토건의서를 발표한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국채보상운동, 성명학교 설립에 참여했다. 경술국치 후 선생은 깊은 좌절과 울분 속에서 3년간 방랑하며 황폐한 삶을 살았으나 1913년 모친의 준엄한 꾸짖음을 받고 훗날 항일투쟁의 밑거름이 되는 학문에 정진하게 된다.

1919년 3·1독립선언 민족대표에 유림계가 참여하지 못했으나 이후 선생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다. 선생은 유림계가 단결하여 한민족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는 운동에 앞장설 것을 주장했다. 이에 혁신유림계는 1919년 5월에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염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독립청원서를 작성하고 선생을 파리에 파견키로 뜻을 모았다. 선생은 곽종석 등이 문안을 작성하고 유림대표 137명이 서명한 파리장서(長書)를 극비리에 휴대하고 망명길에 나서 상하이에 도착했다. 독립운동가들과 상의 끝에 이미 민족대표 자격으로 파리로 출발한 김규식에게 선언문을 번역·우송해 강화회의에 제출하도록 하고 선생은 중국에 남아 활동하기로 했다.

유림대표로 파리 가려다 상하이 망명
선생이 중국으로 떠난 후 이 사실이 일제에 발각되어 곽종석 등 관련 인사들이 국내에서 대거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이것이 ‘제1차 유림단 사건’이다. 선생은 중국에서 쑨원 등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두루 만나 독립을 위한 협력을 모색했으며 박은식·신채호 등과 함께 언론활동도 했다.

1919년 선생은 상하이에서 안창호·김구·박은식·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의정원의 경상도 의원에 선출되었고 교통위원회 위원을 맡기도 했다. 임정이 출범하게 되었으나 선생과 박은식·신채호 등은 이승만이 윌슨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요청했다는 사실을 들어 대통령 추대를 반대했다. 선생은 1921년 54인의 이름으로 위임통치안 성토문을 발표한 후 북경으로 떠나버렸다. 이후 임정의 계속되는 내분 수습을 위해 1923년 상하이에서 국내외 독립운동단체대표들이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으나 임정 해체와 새로운 조직을 주장하는 창조파와 임정을 유지하자는 개조파가 대립하게 된다. 선생은 임정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임정 해산에는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성균관대학교 전문부 2회 졸업식.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1925년 선생은 북경에서 이회영과 함께 내몽골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논의하고 중국 측으로부터 황무지 개간권을 얻은 후 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 선생과 국내 유림단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군자금 모금에 나섰으나 목표에 크게 못 미쳤고 일제의 추적이 극심해져 이듬해 모금한 자금을 가지고 중국으로 탈출했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 600여 명의 유림인사들이 일경에 체포되는 ‘제2차 유림단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상하이로 돌아온 선생은 의열투쟁을 전개키로 하고 1926년 이동녕·김구 등과 협의해 의열단원 나석주의사를 국내에 밀파하여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투탄 의거가 일어나도록 했다. 선생은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독립운동세력 통합에 나서 임시의정원이 개편되면서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27년 6월 지병으로 상하이 병원에 입원했던 선생은 급습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국내로 압송,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일경은 선생에게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으나 선생은 한치의 동요 없이 진술을 거부하고 변호인 선임조차 거절했다. 결국 선생은 1927년 12월 재판에서 나석주의사 폭탄투척사건 주모자로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성균관대학교에 세워진 심산 김창숙 선생 동상. [사진 김석동]
선생은 수사과정의 혹독한 고문으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고 대전형무소 수감 중에도 일제의 온갖 회유를 거절해 비타협 저항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감옥에서 선생의 병이 악화되자 1934년 7년 만에 풀려나 울산 백양사로 요양을 떠났고 이후 5년여 만에 일제의 감시가 풀려 1940년 아들 집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일제의 추적, 감옥살이, 유배생활로 모친의 장례식에 참석 못 했고 21년 만에 산소를 찾게 되었다.

1945년 선생은 일제가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에서 남한책임자로 활동했다는 혐의를 씌워 왜관경찰서에 수감하고 있던 중 67세의 나이로 해방을 맞게 된다. 임정과 함께 활동했던 선생은 해방 후에도 임정을 중심으로 건국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기에 임정을 지지하고 연합군을 환영하는 국민준비대회에 참가했다. 선생은 임정요인들이 중경에서 환국한 후에는 행동을 함께하면서 반탁운동에 나서는데 이는 임정추대운동이면서 반소·반공투쟁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임정은 1945년 12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해 선생을 중앙위원으로 선임했고 이듬해 선생은 임정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반탁운동을 계속 하면서 소련 측의 지시를 받고 찬탁으로 돌변한 공산당 세력을 매국과 반역행위라고 질타했다. 임정은 이승만과 김구 등 우익인사들을 중심으로 의회기능을 할 비상국민회의를 개최해 정부수립의 모체기관으로서 최고 정무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고 선생과 이승만 등 28인이 최고정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최고정무위원회가 미군정 측에 의해 자문기관인 민주의원으로 바뀌어 역할이 축소되자 선생은 오직 임정을 중심으로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1947년 UN의 남북한 총선거 결의안이 가결되었으나 소련 측의 거부로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었다. 선생은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7인 성명을 발표하고 남한만의 총선거를 반대하며 남북협상을 추진했다. 그러나 평양회담은 실패로 끝났고 선생이 추구해 온 반분단·통일운동도 결실을 맺지 못했다.

일제가 격하시켰던 성균관 명칭 되찾아
이후 선생은 성균관 일에 본격 나섰다. 광복 후 유림단체가 난립하고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던 혼란 상황에서 유림의 대동단결을 위해 선생이 주도하여 1945년 11월 성균관 명륜당에서 전국유림대회를 개최하고 민족고유문화의 근간인 도의의 혁신과 향상, 성균관대학의 설치를 결의했다. 이듬해에 남북 유림대표자 2500명이 성균관 명륜당에 모여 전국유림통일대회를 열어 일제가 ‘경학원’으로 격하시켰던 성균관의 명칭을 정식으로 환원시키고 통합유림단체 ‘유도회(儒道會)’를 출범시키면서 선생을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그 해 9월 성균관대학의 인가가 나자 선생이 성균관장 겸 초대 학장을 맡았고, 유도회에서 실질운영을 담당하게 되었다. 선생은 향교재단을 규합하고 재산을 기부 받아 1946년 성균관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자 초대 총장을 맡았다.

선생은 6·25 당시 서울에 남게 됐으나 북한 측의 회유를 거절하고 9·28 수복 때까지 숨어 지내다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한 이후에는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에 맞섰고 1950년대 전체에 걸쳐 반독재 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평생을 대의명분을 위해 헌신했으며 강한 의지로 올곧은 길을 좌고우면하지 않고 대의와 명분을 지켜나간 ‘이 땅의 마지막 선비’이자 ‘참 지사’의 길을 살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 되었다. 1962년 3·1절 생전에 정부는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수여했다. 선생은 그 해 5월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입원 치료 중 84세를 일기로 서거해 서울 수유리에 안장되었다. 안타깝게도 선생의 두 아들 환기·찬기는 부친에 앞서 독립운동 중 순국했다. 경북 성주와 서울 반포동에 선생의 기념관이 세워졌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현재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가 있으며, 오랜 경제전문가로서 직장인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가성비 좋은 서울의 노포 맛집을 소개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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