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세계는 통제 불능… 통제할 수 있는 내면에 신경쓰라[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컬트 거장’ 데이비드 린치 화두… 불안-공포에 지배되는 인간들
통제 밖 외부 집착해선 못 벗어나… ‘도넛’은 통제 가능한 내면 상징
중요한 것 집중하는 삶 살고 있나


린치가 2006년에 펴낸 ‘큰 물고기 잡기(Catching the big fish)’란 책에 해당 문장이 나온다. “구멍이 아니라 도넛에 신경 쓰라는 표현이 있다. 당신이 도넛에 신경 쓰며 일을 한다면 그것이 당신이 통제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당신은 당신 외부에 있는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내면으로 들어가 최선을 다할 수는 있다.” 이어서 린치는 명상을 통해 세상의 사건들을 겪는 방식이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원전을 찾아보면 “구멍이 아닌 도넛을 보라”는 말의 뜻을 좀 더 다채롭게 음미할 수 있다. 먼저 “…라는 표현이 있다(There’s an expression)”는 부분을 통해서, 이 문장은 린치가 만든 말이 아니라 이미 존재했던 말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유사한 표현을 20세기 초반의 여러 매체에서 찾을 수 있고, 캐나다의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도 비슷한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들 중 상당수가 공자의 말이 아니라 공자가 인용한 말인 것처럼, 이 말도 린치의 말이 아니라 린치가 인용한 말인 것이다.
“도넛을 보라”고 보도되었던 부분은 단순한 동사 ‘보다’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다’ 혹은 ‘신경을 쓰다’와 같은 뜻을 가진 ‘Keep one’s eye on (the doughnut)’이라는 표현이었다. 즉, “구멍이 아닌 도넛을 보라”는 말은 단순히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조언이 아니라 무엇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인가에 대한 조언인 셈이다.

그렇다면 “구멍이 아닌 도넛을 보라”를 말을 통해 린치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세계는 신경 쓰지 말고 당신이 통제할 수 있는 내면에 신경 쓰라는 것이었다. 내면에 대한 관심에 걸맞게 린치는 명상을 꾸준히 실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이것이 곧 세계를 무시하고 저버리라는 취지였을까? 그렇지 않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게 되어, 결국 세상의 사건들을 겪는 방식이 훨씬 나아질 수 있다고 린치는 믿었다.
실로 우리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 세상을 좀 잘 겪고 싶지 않은가. 그러나 세상에는 어두움이 많아서 인간은 자칫 공포에 잠식될 수 있다. 그 공포는 증오를 낳고, 증오는 분노를 낳게 마련이라고 린치는 믿었다. 어떤 공포가 가장 무시무시한가? 미국 작가 데이비드 브레스킨과의 인터뷰에서 린치는 “최악의 공포는 우리 모두가 너무도 통제 불능이라는 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통제 불가능한 외부에 집착하지 말고 통제 가능한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인간은 공포로부터 상당히 벗어날 수 있다.
자, 공포로부터 벗어나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무엇을 하긴. 재밌는 일을 하다 죽어야지. 린치는 예술에 재미를 느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남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아이디어와 사랑에 빠지고 표현해 내는 자유로운 삶이 바로 린치가 원한 삶이었다. 그 삶이 쉬웠겠는가? 어느 날 가족들은 젊은 린치를 어두운 거실에 불러 놓고 말했다. 어린 딸을 키워야 하니 영화는 그만 접고 일자리를 구하라고. 그 말을 들은 린치는 신문 배달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주인공이 현관문 한편에 서 있는 장면을 찍은 뒤, 1년 반 동안 돈을 벌어서야 간신히 그다음 장면, 즉 주인공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린치는 결국 성공했지만,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하다가 하는 실패는 감수할 수 있으나,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다가 하는 실패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과 통제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한 뒤,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삶을 살고자 했던 데이비드 린치. 그는 기괴한 변태보다는 헛된 일에 관심을 끊고 자기 인생을 잘 돌보고자 했던 로마 시대 스토아 철학자들을 닮았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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