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의 중국萬窓] "붓끝에 인간과 우주를 담다"… 동양 정신문화의 결정체 서예(書藝)

2025. 1. 1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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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 [나무위키 자료]
예서. [나무위키 자료]
해서. [나무위키 자료]
행서. [위키백과 자료]
초서. [위키백과 자료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나무위키 자료]

옛부터 "신언서판(身言書判)으로 사람을 판별한다"고 했다. 중국 당나라 역사서인 '신당서'(新唐書) 선거지(選擧志)에서 유래한 말로 몸가짐(身), 말의 진실됨과 솜씨(言), 글(書), 판단력(判)을 기준으로 인재를 등용한다는 뜻이다. 신언서판은 중국뿐만 아니라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인물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됐다. 이처럼 글은 그 사람의 인품과 내공을 알리는 것으로 간주돼왔다. 중국에서 문예(文藝)와 서예(書藝)가 발전하게 된 배경이다.

서예는 붓끝에 인간과 우주를 담는 동양 정신문화 예술의 결정체라고 한다. 그래서 동진 시대의 왕희지로부터 당송 시기 구양순 안진경 소식 황정견 미불, 남송의 주희와 원의 조맹부, 명의 문진명과 동기창, 청의 옹방강, 근대의 오창석 강유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문인들이 서예를 통해 문장과 자신을 갈고 닦았다. 우리나라에서도 통일신라의 김생 최치원에서부터 이제현 강희안 한호 이광사 김정희 이하응(대원군) 등 쟁쟁한 서예가들이 이름을 날렸다.

서예는 기필, 행필, 수필, 끌기, 누르기, 방향 전환, 필압 등 다양한 붓의 활용(용필·用筆)을 통해 문자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다. 붓끝에 작가의 감정과 사상은 물론 내면세계까지 담아내는 사유의 예술이며, 수행의 방편(方便)이기도 하다.

◇ 전서에서 초서까지… 서체(書體)의 종류

'까달음의 예술, 서예'(임성부 지음, 북랩 펴냄)에 따르면 중국의 문자는 거북의 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칼로 새긴 '갑골문'(甲骨文), 돌이나 바위에 새긴 '석문'(石文), 솥이나 제기(祭器) 등 청동기나 쇠에 새긴 '금문'(金文) 등으로 발전해왔다. 최초로 문자를 통일시킨 사람은 진시황이다. '전서'(篆書)는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와 한나라 전후의 여러 서체를 통칭한다. 진시황의 문자 통일 전까지의 글씨는 '대전'(大篆), 통일 이후의 글씨는 '소전'(小篆)이라고 한다. 진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했던 승상 이사(李斯)가 소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흔히 전서라고 하면 장방형의 소전을 뜻한다.

'예서'(隸書)는 진시황때 중앙집권 체제가 갖춰진 후 행정 업무 등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흘려쓰던 서체다. 진나라때 옥중에 갇힌 정막(정邈)이라는 사람이 창안한 글씨로, 죄인을 다스리는 사람이 썼다는 의미에서 예서라 불렀다고 한다. 소전체를 편하게 쓰기 위해 다시 간추린 서체로, 한나라때 유행했다. 예서는 '파임'이 가장 큰 특징으로, 형태보다는 담백한 획질이 중요하다. 추사도 예서를 글씨의 으뜸으로 쳤다. 중국 지린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도 예서로 쓰였다.

'해서'(楷書)는 자형이 방정하고 질서정연해 '진서'(眞書) 또는 '정서·정체'(正書·正體)라고도 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글자체로, 현대까지 한자 교본의 전형이다. 후한 말 삼국시대,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당나라때 확립됐다. '해서의 아버지'로 불리는 후한의 종요가 체계화했으며, 동진의 왕희지를 거쳐 수당에 이르러 성숙한 서체가 됐다. 정방향으로 획이 모가 나고 오른쪽 획이 굵으며, 우측 상방으로 약간 올려쓰는 것이 특징이다.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 안진경 등이 대표적인 서예가다.

'행서'(行書)는 동한의 유덕승이 창안한 서체다. 해서의 획을 약간 흘려 쓰는 서체로, 해서와 초서의 중간 형태다. 글자가 살아숨쉬듯 생동감과 기백이 넘친다. 끊일 듯 말듯 유려한 운필과 일필휘지, 작가의 심미안이 투영된다. 율동성이 뛰어나 예술성이 높은 서체로, '서예의 꽃'이라고 한다. 글씨를 하도 잘써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의 유명한 '난정서'(蘭亭序)는 행서의 상징이다. 중국인들은 '난정서'를 천하제일의 행서로, 천하제이로는 안진경(顔眞卿)의 '제질문고'(祭姪文稿), 천하제삼으로는 소식(蘇軾·소동파)의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을 꼽는다.

'초서'(草書)는 빨리 쓰기 위한 글씨다. 진대에 등장해 한대에 독립적 서체로 발전했다. 자유분방하고 기운생동한 필칠, 작가가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기에 좋다. 하지만 점획의 생략이 많아 글자를 읽기가 매우 어렵다. 심지어 자신이 쓴 글을 시간이 지나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초서의 대가로는 '초성'(草聖)으로 일컬어지는 당나라 장욱과 회소가 있다.

◇서(書)를 예(藝)의 경지로 끌어올린 동진의 왕희지

서예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위진남북조 시대까지 의사 소통과 서사 기능을 주로 담당했던 서예가 문자예술로 위상을 확고히 구축한 것은 동진의 왕희지(王羲之)에 의해서다. 기원후 350년경으로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일이다. 왕희지는 서예에서 시(詩) 분야의 굴원, 이태백, 두보와 같은 위상을 지닌다.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했으며, 예서(隸書)를 특히 잘 썼다.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그의 아들인 왕현지, 왕응지, 왕환지, 왕숙지, 왕휘지, 왕헌지 등도 모두 당대의 명필로 명성이 높았는데, 특히 7남인 왕헌지(王獻之)가 뛰어난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왕희지와 왕헌지 부자를 일컫어 '이왕'(二王) 또는 부자의 이름 앞글자를 모아 '희헌'(羲獻)이라고 했다.

총 324자의 '난정서'(蘭亭序)는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힌다. '새가 날듯, 학이 춤추듯, 우아하고 기품이 있으며, 살아움직이는 듯하면서도 절제된 리듬감이 돋보이는 격조높은 혼의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353년 3월 3일 왕희지는 지금의 절강성 소흥현인 회계현(會稽縣)의 산음(山陰)에 난정(蘭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사안을 비롯해 치담, 손작 등 동진의 문인 명사 42명과 모임을 가졌다. 왕희지는 당시 회계현을 다스리던 회계내사(會稽內史)이자 우군장군(右軍將軍)으로 있었다.

이들은 이날 제를 올리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다. 모임은 술잔이 물에 떠내려 돌아가는 동안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술을 마시는 유상곡수(流觴曲水) 연회로 펼쳐졌다. 당시 왕희지, 사안 등 20여명은 시를 지었고, 나머지는 벌주를 마셨다. 이때 지었던 시 36수를 모아 책자를 만들었다. 왕희지는 연회가 끝난 후 서문(序文)을 짓고 글씨도 직접 썼는데, 이것이 바로 '난정서'이다. 난정에서의 모임을 갖게 된 이유, 우주의 광대함과 인생의 무상함, 문장이 갖는 의미 등을 담담하게 써내려간 '난정서'의 내용 또한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에 비견되는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왕희지 이전 서예는 양쯔강을 중심으로 북남 두갈래의 풍으로 갈라져 있었다. 거칠은 자연의 북파(北派)는 강인하고 웅혼한 형태의 서를 지향하고, 농경문화가 발달해 물물이 풍부한 남파(南派)는 우아함을 추구했다. 남북파를 통합한 게 왕희지다. 행·초서의 대가로 꼽히는 소식, 미불, 황정견, 동기창의 뿌리도 왕희지에 있다.

◇중국의 서예가들

서사나 예술을 넘어 중국인의 의식과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서예는 소수 특권층만 누리던 상류계급의 문화예술이었다. 서체는 사회적 요구와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 발전해왔다.

당나라때는 왕권이 확립되면서 서체는 엄정하고 세련돼졌다. 구양순은 처음 왕희지 서체를 모방했으나 후에 독자적인 서체를 완성해 일가를 이뤘다. 해서, 예서, 초서 등에 모두 조예가 깊었는데, 그중 해서가 으뜸이라고 평가받는다. 그의 해서는 세로로 길며, 구조가 독특하고 필력에 힘이 느껴지고, 웅장하며 엄정한 규범을 따르고 있어 후대 서예가들에게 모범이 됐다. 그의 서체는 '구체(歐體)'로 불린다. 우세남은 왕희지의 서법을 익혀 구양순, 저수량, 설직과 함께 당나라 초기 4대 서예가로 꼽힌다. 온화하고 기품있는 서체로, 당 태종도 우세남에게서 글씨를 배웠다. 저수량은 구양순과 우세남의 지도 아래 서법을 익혔다. 가늘면서 힘이 넘친 글씨를 썼다. 안진경은 왕희지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서체를 벗어나 호방하고 웅혼한 서체를 개발, 당나라 이후 중국 서예를 지배하게 된다. 그의 해서체는 '안체'(顔體)로 불린다. 남송의 시인이자 서예가인 육유는 "글씨를 배우려면 마땅히 안진경의 것을 배워야 한다"(學書當學顔·학서당학연)고 했다.

소동파(소식), 황정견, 미불, 채양은 북송 4대 서예가로 꼽힌다. 송나라때는 글씨에 담긴 뜻인 '의취'를 중시, 개성이 담긴 글씨가 유행했다. 시서화 삼절에 모두 능통했던 소동파는 "서법을 알면 글자밖에 글자가 있다"며 법첩에 의존하는 것을 비판했다. 동파는 왕희지와 왕헌지의 글씨를 배웠으며, 특히 왕희지의 '난정서'를 교본으로 삼았다. 이후 안진경체를 익히고 다시 위진 시대의 졸박하고 두터운 풍격을 결합해 자신만의 서체를 개척했다. 아름다우면서도 굳세고 호방한 그의 글씨는 '소체'(蘇體)로 불리기도 했다.

원과 명 나라때는 글씨의 형태를 중시했다. '송설체'(松雪體)로 불린 조맹부(호 송설도인)의 글씨는 고려말과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맹부는 시, 서, 화에 모두 조예가 깊었다. 그의 글씨는 법도가 근엄하고 체세가 수려하면서 고르고, 우아한 운치가 있었지만 약하지 않았다. 명나라 말 제일의 문인이었던 동기창은 초기 안진경과 우세남을 따르다가 후에 왕희지체를 배워 행서 발전에 한 획을 그었다. 그의 서체는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글씨의 교묘함은 용필에 있고, 더욱이 용묵에 달려있다"며 먹을 다루는 기술도 강조했다. 옹방강, 완원 등이 활약한 청나라때는 금석문이 부활했으며, 해서와 예서가 황금기를 맞았다.

잘쓴 글씨에 화룡점정 역할을 하는 것이 '낙관'(落款)이다. 낙관은 낙성관지(落成款識)의 줄임말로, 서명과 인장의 통칭이다. 글씨나 그림을 완성한 후 마지막 부분에 쓴 시기, 성명과 아호를 적고 인장을 찍는 행위로, 자신의 작품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명필로 치는 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후덕하고 품격을 갖춘 '온유덕후'한 글씨다. '대교약졸' (大巧若拙·큰 기교는 어수룩함과 같다)이란 말처럼 노골적으로 기교를 부린 작품은 하(下)로 친다. 채옹은 "좋은 글씨란 종횡으로 역동적인 형상들이 있는 것"이라고 했으며, 소동파는 "글씨는 사람처럼 정신, 기운,뼈, 살, 피를 모두 갖춰야 하며, 이중 하나라도 없으면 글씨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강현철 논설실장 hckang@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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