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씨부인전' ㅣ 한계를 깨부수는 임지연의 힘
아이즈 ize 이설(칼럼니스트)

JTBC 토일 드라마 '옥씨부인전'(극본 박지숙, 연출 진혁)은 크게 2가지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 동명의 고전과 16세기 프랑스의 현실을 그린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다. 조선 후기 '옥씨부인전'은 일종의 규방문학으로, 옥씨부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조선의 유교적 이념과 여성의 덕성을 강조한 것이다. 조선 시대 양반가 여성의 이상적인 모델을 밝히고자 했음을 엿볼 수 있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은 전쟁에 나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온 남편을 두고 벌어지는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다. 그가 과연 진짜 남편인지, 아니면 신분을 세탁한 다른 누군가인지를 스릴러 형식으로 보여준다. 미국에선 리처드 기어 주연의 '써머스비'로 리메이크됐다.
즉, 노비에서 양반가 아씨로 제2의 삶을 얻은 옥태영(임지연)의 이야기를 다룬 '옥씨부인전'은 '마르탱 게르의 귀향'의 여성판이자, 고전 소설 '옥씨부인전'의 21세기적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드라마 '옥씨부인전'의 배경을 길게 설명한 이유는 이 작품이 담고 있는 특별함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 혹은 로맨스에 치중했던 이전의 사극과는 전혀 다르고, 자유와 평등 등 사극에서 다루기 어려운 민주주의의 가치를 알기 쉬운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옥태영이 외치는 대사에 스토리를 관통하는 주제가 깃들어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늘 아래 평등하다"는 평등사상, 15일 4회 방송에서 옥태영이 성소수자를 위해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분, 처지와 상관없이 법 앞에서 평등하게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대목은 시대를 초월하게 만든다.

조선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양반과 노비가 철저히 구별되는 신분사회로 그 경계가 엄격했다. 한 번 노비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노비로서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고, 드라마에서 나오듯 때론 집 안의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서양의 혹독한 노예제도와 다를 바가 없었다.
기존 사극에서는 그동안 이에 대한 고민이 진지하게 다뤄진 적이 없다. 사실 그럴 필요성도 못 느꼈다. 조선에서 기록된 역사는 대개 왕과 귀족들의 것이었고, 양반은커녕 한낱 노비의 삶이 기록으로 남을 리 만무했다. 당연히 '그들'의 이야기는 논외였다. '조선 왕조 500년'류의 사극은 수도 없이 만들어졌지만, 노비나 천민이 주인공이 드라마가 없던 이유다. 굳이 떠올린다면 도망친 노비를 쫓는 자들을 그린 '추노' 정도였다고 할까.
그러나 '옥씨부인전'에는 이렇게 철저한 주변인이었던 노비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주인공 구덕이가 갖은 고초를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양반가의 옥태영 아씨로 변신하는 과정이 그렇다. 그 도중에 양반과 노비의 신분 차에서 오는 엄혹한 현실과 갈등이 자주 묘사된다. 발각되면 죽을지도 모르는 개인적 생존권의 고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비라는 신분 제도의 불합리성, 인간 본연의 가치인 평등주의의 실현, 그리고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의 확산이 줄거리와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3회에서 이런 주제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옥태영은 친구처럼 지내온 노비 백이(윤서아)가 갑자기 사망한 후 오히려 백이의 어미인 막심(김재화)이 누명을 쓰고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직접 사건 수사에 나서 비밀을 파헤친다. 밤새 법전을 공부하고 사건을 추적해 현감(성동일)이 주재하는 심판장에서 막심의 외지부(변호인)로 나선다. 그리고 양반가 자제의 양심 고백을 통해 사망 사건의 진실을 밝혀낸다. 거기엔 야비한 양반가의 이기적인 음모가 숨어 있다. 21세기 범죄 스릴러의 법정 장면을 방불케 한다.
민주와 평등의 기본 이념이 속속들이 배어 있다. 하늘 아래 중요하지 않은 사람의 목숨은 없다는 것, 아무리 양반이라도 노비들을 함부로 단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 현재로썬 너무나 당연한 가치들이 줄줄이 읊어져 나온다. 마치 200여 년 전보다 민주와 평등의 가치가 훨씬 퇴색된 현대를 꾸짖어 일깨우는 것 같다. 위헌적이고 불법적인 탄핵 정국과 맞물려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배달의 기수'처럼 계몽 일변도로 흐르지 않는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대사를 쓰면서도 액션과 코미디를 버무려 시종일관 재미를 잃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옥태영을 맡은 임지연의 연기는 아무리 칭찬을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필자는 2023년 7월 방영됐던 '마당이 있는 집'에서의 임지연의 연기에 놀랐던 적이 있다. 당시 '임지연의 '먹방'이 남다른 이유'에 대해 아이즈(IZE)에 칼럼을 썼다. 아시다시피 남편의 가정폭력을 다룬 '마당이 있는 집'에서 임지연은 매 맞는 아내 추상은 역이었다. 비밀을 간직한 이야기 중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캐릭터로 스릴러의 참맛을 보여줬다. 특히 블랙 코미디를 연상하게 하는 '자장면 먹방' 장면은 기가 막혔다.

이 '먹방'을 보고 나서 두 가지를 떠올렸던 기억이 있다. 하나는 너무나 태연한 임지연의 연기에 새삼 감탄하게 됐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얼마나 그럴 듯했으면) 자장면 생각이 절로 간절해졌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임지연은 기대 이상의 변신을 보여준다. '더 글로리'의 악역에 이어 '마당 있는 집'의 가정폭력 피해자, 그리고 다시 노비와 양반 사이를 오가는 옥태영으로 시청자들의 눈을 붙들고 있다.
이는 띄엄띄엄 방송되는 중에도 상승하는 시청률로 입증되고 있다. 11월 30일부터 방송된 '옥씨부인전'은 지금쯤이면 원래 6회까지 방송됐어야 하는데 계엄과 탄핵 정국으로 두 차례나 결방됐다. 15일에서야 겨우 4회가 방영됐다. 드라마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한 번 맥이 끊기면 보통은 회생이 불가한 법. 그러나 '옥씨부인전'은 웰메이드 스토리로 시청률이 팍팍 뛰었다. 1회 4.2%에서 시작해 2회(12월 1일) 6.8%, 3회(12월 8일) 7.8%, 4회 8.5%로 탄핵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거침없는 상승곡선을 그렸다.
'옥씨부인전'은 형식만 사극일 뿐 다뤄지는 내용은 거의 21세기 현대극을 뺨친다. 그 속에서 이제 임지연은 한계가 없어 보이는 캐릭터 연기를 소화하고 있다. 이제 쉽고 편안한 캐릭터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임지연의 시간이 다시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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