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클라이밍 | 조경아ㆍ유옥준] 봄날의 호랑이굴 속 사내와 여인, 그 자유로운 점프의 기억

신준범 2024. 11. 6.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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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클라이밍짐 조경아 대표와 제자 유옥준의 범굴암 등반기
호랑이처럼 압도적인 파워의 크랙 '하부님'(5.11a)을 신중하게 살피며 오르는 유옥준.

호랑이 굴로 간다. 사내는 담담했고, 여인은 들떠 있었다. 말수가 없는 사내와 재치 있는 입담의 여인은 사제지간이다. 오똑한 콧날과 깊은 눈매, 선이 분명한 인상의 사내가 불당골에 든다. 짧은 머리에 검은 안경을 꼈지만 장난기 가득한 소녀 같은 인상의 여인이 사내를 뒤따른다.

경기도 광주 남한산 자락 검단산(520m) 기슭의 범굴암에 든다. 2002년 석우산악회와 산사랑산악회가 개척한 수도권 남부의 인기 하드프리 암장이다. 예부터 불당리 사람들은 바위굴에 호랑이가 살았다 하여 범굴암이라 불렀다. 최대 높이 30m, 폭 40m로 비교적 작은 암장이며 페이스와 오버행이 주를 이루고 있다. 남향이라 볕이 잘 들어 수도권 클라이머들이 시즌 첫 바위 장소로 즐겨 찾는다.

호랑이를 잡으러 온 사내는 조경아(47) 강동클라이밍짐 센터장이다. 유옥준(43)은 암장을 6년 동안 다닌 그의 제자다. 갈기머리 휘날리는 강인한 인상의 사내가 조경아, 핑크색 티셔츠를 입은 흰 얼굴의 여인이 유옥준이다. 여자 이름 같은 사내와 남자 이름 같은 여자가 벽 앞에 선다.

범굴암 '-5.10'(5.11b/d) 루트 상단 크럭스를 돌파해 쌍볼트 클립을 목전에 둔 조경아.

범굴암에 범은 없지만 범의 기운은 남아 있다. 단단한 벽에 새겨진 거친 돌기와 미세한 무늬, 앙상한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더해 바위는 만만치 않은 기세다. 사내가 오른다. '성공'(5.11a)길이다. 손에 시원하게 탁 잡히는 것 없는 페이스. 손가락 파워를 발휘하면서 발을 올려야 하는 까다로운 바윗길.

조경아는 과감하게 발로 일어선다. 손가락을 세워 미세한 홀드를 꼬집고, 찍어 누르며 절묘하게 밸런스를 잡아 빠르게 오른다. 두려움 없는 발놀림으로 크럭스인 오버행 천장 아래까지 이른다. 한 템포 호흡을 고르는가 싶더니, 거침없는 발놀림으로 오버행 천장을 넘어선다. 힘이 느껴지는 단단한 등반, 범을 제압하기보다는 범과 어우러지는 몸짓이다. 범의 미세한 리듬까지 타며 즐기는 것이다.

울산이 고향인 그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8년 수원 삼성전자에 취직했다. 취미 생활로 시작한 사내 산악회 활동은 그의 적성에 딱 맞았다. 워킹산행에 푹 빠져 매주말 전국의 산을 올랐다. 유명한 산은 물론 알려지지 않은 산을 찾아 개척산행도 할 정도로 등산을 즐겼다. 산악회에서 암벽등반 기초교육을 받으며 그는 신세계에 눈을 떴다. 산행보다 더 짜릿한 즐거움에 눈을 뜬 것이다. 당시 수준급 클라이머였던 이근택, 조규복, 최원일, 안강영에게 클라이밍 기본교육을 받고, 수원의 실내암장에서 몸을 만들었다. 선배가 만든 훈련을 위한 작은 공간이었다.

바쁜 선배를 대신해 가장 열정적으로 운동했던 그가 암장 코치를 맡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99년 자신의 암장인 수원클라이밍센터를 개업했다. 산악회에서 만든 암장이 아닌, 개인이 만든 대중적인 암장은 수원에서 처음이었기에 지역의 많은 클라이머들이 모여들었고, 거쳐 갔다.

10년 넘게 수원클라이밍센터를 운영한 그는 2010년 서울 강동구의 쿠드클라이밍센터 센터장을 맡으며 서울로 왔다. 아웃도어 브랜드 쿠드코리아에서 실내암장을 내며 전문 센터장인 그를 영입한 것이다. 2013년 쿠드코리아로부터 암장을 인수한 그는 강동클라이밍짐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강동구의 유일한 실내암장이었기에 강동권 클라이머들의 목마름을 풀어 주는 클라이밍 옹달샘 역할을 해왔다.

유옥준은 하드프리보다 리지등반을 더 좋아하는 산처녀다.

고도감 셀수록 실력 발휘하는 산처녀, 유옥준

"에이 쪽팔려! 겁은 극복이 안 돼!"

바윗길 '성공'의 크럭스 오버행에서 떨어진 유옥준이 아쉬운 듯 소리친다. 2014년 손가락 골절 부상을 입기 전까지 5년 동안 일주일에 4~5일을 등반했었다. 평일 중 최소 3일은 암장에서 운동하고, 주말에는 전국의 산을 찾아 등반했다. 손가락 힘만 놓고 보면 여간한 남성 클라이머들보다 낫다는 것이 조 센터장의 평가지만, 그녀의 아킬레스는 겁이 많다는 것. 허나 흘린 땀이 있기에 두 번 떨어지지 않는다. 발을 허리까지 과감하게 올려 오버행 턱을 넘어선다.

유옥준은 2010년 강동클라이밍짐에서 등반을 시작했다. 독특하게도 3명의 자매가 함께 등반한다. 둘째 언니가 먼저 등반을 시작하면서, 계속되는 등반자랑에 호기심 반 시샘 반으로 큰언니와 함께 시작했다. 하남 토박이인 그녀는 가장 가까운 암장이었던 조경아 센터장의 암장에서 등반에 입문해, 현재 선등은 물론 5.10b 난이도를 온사이트로 오르는 만만찮은 실력을 쌓았다. 5년 넘게 한 암장을 꾸준히 다닐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지루할 만하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동클라이밍짐에서 암벽등반과 리지등반, 빙벽등반 등을 배웠으며, 리드와 속도·볼더링·아이스클라이밍 대회까지 모두 출전한 경험이 있다.

손가락 끝에 온 힘을 모아 흐르는 홀드를 당기는 유옥준.

그녀는 고도감이 센 리지나 멀티피치 등반에선 겁 없이 잘 오르는데, 단 피치 하드프리에선 겁이 많은 편이다. 매번 크럭스에서 추락하는 것도 실력이 부족해서보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는 "높은 산에선 무조건 올라가야 하니까 두려움이 없는데, 하드프리에서는 추락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얘기한다. 이런 그녀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역시 산에서 실력 발휘를 하는 산처녀"라고 말한다.

유옥준은 수다를 즐기는 산처녀다. 등반 중에도 수다는 멈추지 않는다. 엄살떨며 등반하는 그녀에게 큰언니 유혜준은 "아니, 무섭다면서 뭘 그리 힘차게 올라가?"라며 추임새를 넣는다. 자매인 두 사람은 마음 맞는 자일파트너로 몇 년째 매주 리지등반을 하고 있다. 특히 대둔산 리지등반을 즐긴다.

"리지등반은 과정이 재미있어요. 짧은 것도 있고, 긴 것도 있고 바윗길이 무척 다양하잖아요. 여럿이 가면서 수다도 떨고 간식도 먹고 하는, 산을 타는 과정이 좋아요."

초반 스타트가 까다로운 자유인(5.10c)을 갈기머리 사내가 오른다. 얼핏 봐도 큰 홀드가 없다. 어떻게 올라야 하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는, 루트 파인딩이 관건인 길이다. 바위에 붙어서야 미세한 홀드와 디딜 자리가 보이는데, 계산이 조금만 엉키면 고수도 추락할 법한 페이스다. 난감한 퀴즈 같은 바윗길을 조경아는 발로 돌파한다. 확신이 들지 않는 미세한 돌기를 읽어내며 과감한 발놀림으로 풀어낸다. 상단 오버행 천장을 간단히 넘어서며 쌍볼트에 로프를 건다.

봄 햇살이 비추는 범굴암을 오르는 조경아. 베테랑 루트세터답게 바윗길을 읽어내는 눈이 정확하다.

조경아는 1995년 첫 직장이었던 삼성전자를 나와 등반에 모든 걸 거는 삶을 택했으며, 그 선택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는 "2년을 고민해 사표를 쓰고 나왔다"며 "돈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새로운 직장을 구해 놓지도 않고 대책 없이 나왔다"고 한다. 이후 청악산우회 전양준(코오롱등산교육센터 강사)·문철한(로프악세스 대표)과 태국 프라낭 등반을 다녀오며 등반에 더 몰입하게 되었다.

암장 코치를 하고, 수원클라이밍센터를 운영했으나 수입이 열악했기에 선배가 운영하는 빵집에서 2년간 일했다. 그는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해, 몇 년걸리는 제과기술을 6개월 만에 마스터했다"고 한다. 수원클라이밍센터 회원이 늘면서 다시 암장에 집중하며 2007년 결혼해 현재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범굴암 한가운데 선명한 크랙이 있다.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가장 인기 있는 놀이기구라 대기자가 많을 것 같은 가장 선이 굵은 등반라인, '하부님'(5.11a)이다. 핑크색 티셔츠를 입은 여인이 크랙을 만진다. 온사이트의 어려움을 유연한 몸놀림으로 이겨낸다. 홀드를 살피느라 동작의 흐름은 끊어지지만 완력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구간을 아무렇지 않게 술술 올라간다. 주 3일 암장에서 땀 흘린 성실함이 빛을 발한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벽을 오르는 스승과 신중한 표정으로 확보하는 제자.

크럭스는 상단 오버행 천장이다. 1.5m 정도 툭 튀어나와 있어 잡을 곳이 보이지 않는다. 홀드를 찾아 잡아내더라도 고도감과 추락의 공포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것이 관건이다. 키가 작은 편인 유옥준이 매달리지 않고 넘으려 안간힘을 쓴다. 당황해 진퇴양난 속에서 완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그녀를 깨운 건 스승인 조경아다. 호통치듯 진중한 소리로 조언하자, 유옥준이 안정을 되찾아 다시 바위에 집중한다. 보이지 않던 홀드를 찾아내어 팔을 건다. 이윽고 무게 중심을 옮겨 높이의 공포를 극복해 과감하게 발을 올린다.

유옥준은 "조 선생님이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너는 등반하면서 말만 안 해도 그 힘으로 올라가고 남을 것'이라 한다"며, "실제로 말을 안 하고 등반에 집중하면 올라가진다"고 웃으며 얘기한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승부욕보다는 놀이처럼 과정을 즐기는 셈이다. 그녀는 스스로의 겁을 이용할 줄 안다. 겁이 많은데 선등은 어떻게 하냐고 물으면, "무서우니까 더 집중해서 올라간다"며, "죽을 똥 싸면서 간다"는 농담을 곁들인다.

그녀는 등반 스승인 조경아에 대해 "말에 군더더기 없다"며 "냉정하고 정확하게 지적을 잘 해준다"고 말한다. "선생님한테 등반에 관한 걸 다 배웠기에 함께한 추억이 많다"며 강동클라이밍짐에 출근 도장을 찍는 이유를 둘러 답한다.

산처녀 유옥준은 세 자매가 줄을 묶고 요세미티를 함께 오르는 것을 목표로 오늘도 땀을 흘린다.

'-5.10'(5.11b/d) 루트 오버행 등반을 앞두고, 로프를 퀵드로에 걸기 위해 입에 물어 당기는 유옥준.

자유로운 비상을 꿈꾸는 루트세터

조경아는 1990년대 후반부터 대회에 꾸준히 출전했다. 특히 속도부문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며 두각을 보였다. 허나 선수보다는 루트세터로 잘 알려져 있다. 1999년부터 지금까지 200여 회가 넘는 대회에서 루트세팅을 맡았다. 홀드를 배치해 벽과 등반라인을 만드는 일을 해온 것이다. 특히 2000년 1기 루트세터 자격을 취득하며, 1세대 루트세터로 헌신적인 활동을 해왔다. 후배들을 양성하는 루트세터 심사관으로도 오래 일했다.

대회 루트세팅은 쉽지 않다. 루트 세터는 대회당 적으면 2명 많으면 5명이 함께한다. 주말에 대회가 열린다면 월요일부터 함께 모여 루트 세팅을 한다. 일주일을 꼬박 투자해야 하는 셈이다. 주최 측에서 루트 세팅비를 지급하지만, 일주일을 투자하는 것에 비하면 일당이라기보다 수고비 정도의 적은 금액이라 사명감과 헌신하겠다는 마음 없이는 하기 어렵다. 그는 루트세터로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융화'를 꼽는다. 한 명이 자기주장만 내세워 융화가 안 되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나머지 세터들이 너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공적인 대회를 치르기 위해선 세터들의 팀워크가 중요하다. 또한 세터장이 세터들의 특색을 파악해 조화롭게 운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직장을 다니는 세터는 일주일을 휴가 내어 참여하고, 자영업자는 일주일 장사를 포기해야 하기에 출혈이 크다. 하지만 대회가 끝난 뒤 선수들이 "고생하셨다"고 인사 한 번 하면 무엇보다 큰 보람을 느낀다.

바윗길을 살피며 조언하는 조경아.

"등반은 자신과의 싸움이며 자신을 극복해 가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게 등반이죠. 그래서 파트너와 관계가 중요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면이 있습니다. 등반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등반 예절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해요."

그는 "이제 등반에 대한 큰 욕심은 없다"며 "처자식도 있고 암장에 묶여서 개인사업자가 되어버렸다"고 허심탄회하게 말한다. 다만 오랜 지도 경험과 루트세팅 경력이 쌓였기에, 이런 노하우를 유망주를 키워 내는 데 집중해 좋은 선수를 길러내고픈 마음이 있다. 선수로서의 전성기는 지나갔지만, 지도력에 있어선 지금이 절정이라는 또 다른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봄 느낌 물씬한 포근한 하늘 아래, 호랑이가 살았다는 바위를 오르는 범 같은 사내 조경아.

난해한 루트인 오른쪽 벽으로 갈기머리 사내가 향한다. '수어장대'(5.11d) 앞에서 암벽화에 발을 구겨 넣는다. 1990년대부터 머리를 길러 이제는 트레이드마크가 된 장발을 휘날리며 극악의 오버행에 도전한다. 그는 삼성을 나오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 머리를 길렀고 지금까지 그 헤어스타일을 유지해 왔다.

수어장대는 볼더링처럼 동작 하나 하나가 숙제이면서 쾌감이다. 아껴둔 근력을 모두 끌어올려 폭발적인 무브로 중력을 이겨낸다. 홀드가 보이지 않는 마지막 상단, 잔뜩 움츠린 범 한 마리가 몸을 날린다.

자유를 찾아 하늘 속으로 점프하듯 범을 닮은 사내가 범굴암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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