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서스 절경에 숨은 중세 마을을 걷다 [나홀로 세계여행 스바네티]

코카서스산맥의 남쪽, 가장 매혹적인 땅에 자리 잡고 있는 스바네티Svaneti는 해발 3,000~ 5,000m 높이의 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고 조지아뿐만 아니라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를 포함하는 코카서스 3국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인 곳으로 꼽힌다. 지리적으로 다른 지역과 단절되어 있고 시간에 갇힌 듯 보이는 작은 마을들이 구름 위로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다.
조지아의 역사와 문화, 자연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이곳에는 많은 트레일 코스가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스바네티 트레일은 메스티아Mestia에서 우쉬굴리Ushguli까지 약 60km를 3박4일간 걷는 코스이다.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살고 있는 스바네티 마을을 통과하며 걷는 동안 펼쳐지는 코카서스 경치는 이 트레일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1일차 메스티아~자베시, 약 16km, ↓523m↑763m
첫날 목적지는 해발 1,680m에 위치한 자베시Zhabeshi. 트레킹은 메스티아의 중앙광장에서 시작된다. 메스티아 마을을 벗어나 흙길을 따라 약 5km는 숲이 우거진 경사길이 계속된다. 작은 패스를 넘어서면 트레커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작은 노점 카페가 있다. 조지아에서 유명한 배 음료를 샀다. 달콤하고 시원하다. 올라오느라고 수고한 모든 피로가 다 가시는 것 같다. 온전히 쉬기 위해 양말도 벗고 잠시 휴식을 취한다. 테트눌디Tetnuldi를 시작으로 4,000m가 넘는 코카서스 설산이 장엄하게 펼쳐진 풍광을 마주하니 조지아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목적지인 자베시까지 아직 10km 남았다. 보이던 설산도 모두 멤버 체인지를 했다. 내리막이라 길도 편안하다. 설산이 마주하며 걷는 길 양편으로 데이지 꽃밭이 이어지고 곁에는 아주 작은 마을이 있다. 참으로 고요하다. 마을은 폐허. 폐허 건물 안에는 소와 돼지들만이 살고 있다.
무르시켈리Murshkeli로 들어서니 게스트하우스 팻말이 붙은 집이 눈에 뜨인다.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어서 카페라고 이름 붙인 집에 들어갔더니 보틀 워터는 없단다. 물병에 무료로 수돗물을 가득 채워 주었다. 그나마 내가 가지고 있는 뜨거워진 물보다는 한결 시원하다.

예전에는 북쪽 제방을 따라 동쪽으로 올라가서 물크라강Mulkhra River을 건넜는데 홍수로 심하게 파손된 후에 복구가 되지 않아서 콜라시Cholashi 남쪽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강을 건너니 시멘트 포장길. 지열이 올라와서 걷기가 쉽지 않다. 돼지고기 삶아도 될 만큼 뜨겁다. 목적지가 이제 3km 정도 남았는데 정말로 힘들다.
드디어 자베시에 들어섰다. 멀리 갈 힘도 없어서 눈앞에 보이는 숙소를 예약했다. 4일 코스 중에서 하루는 성공이구나. 내일은 덥기 전에 걸어야겠다.

2일차 자베시~아디시,약 10km, ↓527m↑909m
둘째 날 목적지는 해발 2,040m에 위치한 아디시Adishi. 거리가 짧아서 부담 없지만 더위를 피해 걷고 싶어서 오전 7시에 숙소를 출발한다. 산으로 오르는 길 아침 일찍 먹이를 찾으러 나왔던 돼지들이 나를 보고 놀라 도망간다. 이정표가 잘되어 있어서 길 찾기는 수월하다.
현재 7시 30분. 더워도 너무 덥다. 소똥 피해서 걷는 것도 힘든데 이른 아침이라 거미줄이 너무 많다. 스틱으로 거미줄을 치우며 1시간 정도 걷다 뒤돌아보니 저 멀리 지난밤에 머물렀던 마을의 집들이 장난감처럼 옹기종기 앉아 있다. 현재 해발고도 2,360m. 길에서 나를 반겨 주는 작은 꽃들이 힘을 준다. 적막한 길을 걸으며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이런 시간이 참으로 행복하다. 누가 이런 꽃길을 만들었을까? 온 산이 온갖 꽃들로 넘실거린다. 야생화와 설산이 함께하는 공간. 참으로 생경한 풍경이다. 드문드문 캠핑한 흔적도 보인다. 조지아는 트레킹도 캠핑도 자유롭다. 그래서 더 사랑스럽다.

테트눌디 스키 리조트로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머리 위로 지나간다.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오늘 트레일이 끝날 때까지는 비는 내리지 않기를 기도한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숲속 오솔길에도 꽃들이 가득하다. 계곡 물살이 생각보다 무척 세다. 자작나무 숲길이 나왔다. 또 다시 계곡을 넘었다. 다리가 아닌 널빤지를 깔아놓아서 살짝 불안하다.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도 건너야 한다. 숲길을 걷다가 고개를 들면 언제나 반겨주는 코카서스 설산들이 나를 응원한다.
아디시는 코카서스산맥의 스바네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답게 코시키(돌탑)가 정말 많다. 동네 산책 후 저녁식사하러 돌아오다가 하늘을 보니 UFO 같은 희한한 모양의 구름이 떴다. 참으로 많은 일몰을 보았지만 이렇게 진기한 장면은 처음이다. UFO에 타고 우주로 날아가고 싶다.

3일차 아디시~이프랄리, 약 18km, ↓1,070m↑870m
셋째 날 목적지는 해발 1,800m에 위치한 이프랄리Iprali. 아디시에서 아디시찰라강Adishchala River을 건너기 전까지 약 5.5km의 구간은 초원이 펼쳐진 평원이다. 밤새 강하게 퍼붓던 비는 부슬비로 바뀌어서 맞으며 걸을 만하다. 내 뒤편의 파란 하늘이 앞에 머물러 있는 검은 구름을 쫓아내고 있다.
빙하가 멀지 않은데 오렌지빛 양귀비가 지천이다. 참으로 경이로운 풍경이다. 아디시빙하Adishi Glacier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다. 봉우리는 라쿠차-라르트코Lakutsa-Laartko로 높이가 4,655m. 운무와 빙하가 숨바꼭질하고 있다.

아디시찰라강 앞에 섰다. 물살이 너무 세다. 강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 참 부럽다.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불안하다. 잘못해서 물속으로 넘어지면 노트북도 카메라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 바로 내 앞에서 한 사람이 강물에 빠지는 불상사를 목격했다. 말을 타기로 한다. 솔직하게는 말 타고 강 건너는 그 기분도 느끼고 싶다. 25라리를 지불했다. 옆에서 잡아 주는 줄 알았는데 기수는 강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나 혼자 말을 타고 건넌다. 불과 몇 초의 시간이지만 무척 긴장되고 무섭다. 다행히 안전하게 강 건너편에 도착했다. 강을 건너오니 아디시빙하가 더욱 확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제 치쿠트니에리 패스Chkhutnieri Pass를 오른다. 거의 700m를 치고 올라가야 한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빗방울이 조금 더 굵어진다. 좁은 숲길은 한 사람도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 게다가 지나갈 때마다 물을 듬뿍 뿌려 준다. 등로는 점점 더 험해진다. 빙하에서 흘러내린 물과 빗물이 섞여서 길은 엉망진창이다. 지그재그로 올라가기 시작한 길이 한없이 이어진다. 걷다가 가끔 뒤를 돌아보면 아디시빙하가 우뚝 서있고 앞에는 아디시찰라강이 힘차게 흐른다. 늙은 공룡같이 주글주글 이어지는 빙하의 주름살에 소름이 돋는다.

드디어 오늘 최고 고도 도착.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좁은 산길 주변에 야생화가 가득하다. 내리막이라 만만할 줄 알았는데 올라오는 길보다 더 힘들다. 멀리서 볼 때는 꽃길이었는데 진흙에 물이 듬뿍 담겨 있으니 발을 옮길 때마다 등산화에 더 많은 진흙이 달라붙어서 점점 무거워지고 너무 미끄러워서 마치 스키장에서 눈 위를 걷는 것 같다. 이미 등산화도 옷도 모두 젖었다. 저 멀리 점처럼 찍힌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산장 비슷한 오두막이 보인다. 카페였으면 좋겠다. 따뜻한 차 한잔하면서 쉬어가고 싶다.
작은 오두막에는 먼저 도착한 팀이 모닥불을 피고 몸을 말리고 있다. 나도 그 안으로 들어섰다. 으슬으슬하던 몸이 따뜻해지고 옷도 조금씩 말라간다. 나중에 알았다. 그 팀은 가이드를 동반한 그룹이었는데 마치 내가 멤버처럼 그들과 합석을 한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이프랄리 도착. 그런데 숙소를 구할 수 없다. 숙소가 많지 않고 가격도 다른 마을에 비해 비싸다. 게다가 대부분의 숙소를 여행사에서 미리 예약해 놓아서 남은 방이 없다. 한 숙소에서 추천해 준 곳으로 왔다. 가격 협상은 했지만 화장실도 방도 너무나 심각하다. 대안이 없으니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샤워는 포기, 고양이 세수만 하고 난로 곁에 앉아서 등산화를 말리며 시간을 보낸다. 내일의 날씨는 맑기를 바라며.

4일차 이프랄리~우쉬굴리, 약 13km, ↓436m↑677m
마지막 날 목적지는 해발 2,200m에 위치한 우쉬굴리. 마을을 지나 초원을 건너면 수 km의 숲길이 이어진다. 하늘이 파랗게 빛나고 운무가 너무 멋지다. 다브베리Davberi마을로 가야 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전에는 문을 열고 걸어갔던 길인데 지금은 굳게 잠겨 있다. 울타리에 걸쳐진 사다리를 타고 넘었다. 그나마도 현지인이 알려주었다. 트레킹하려고 왔는데 훈련받으러 온 느낌이다. 그 다음은 사다리도 없는 울타리. 철사로 묶어 놓은 울타리는 발 디딜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결국 옆에 나뒹구는 철봉을 걸쳐놓고 넘었다. 이 무슨 고난의 길인가? 만약 어제 빗길에 이곳을 넘어야 했으면 어찌 했을까? 아찔하다.
이제부터는 정말 트레킹. 500m 이상 계속 된 꽃길에서 이슬로 샤워를 한다. 어제부터 오늘 새벽까지 밤새 머금었던 이슬이 내가 걸을 때마다 우수수 떨어진다. 바지가 모두 젖었지만 상큼하고 쌀쌀한 이 느낌이 참으로 좋다.
자작나무의 떨림이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 곁에 한동안 서 있어도 떠나고 싶지 않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자작나무가 온 몸으로 나를 환영한다. 이제 우쉬굴리까지 2.7km. 점심은 우쉬굴리에서 먹을 수 있겠다. 지금부터는 도로와 함께 나란히 걸어간다.
우쉬굴리를 형성하는 네 개의 커뮤니티 중 하나인 무르크멜리Murkmeli는 부서진 집이 너무 많다. 너무 오래된 건물이라서 손보기가 쉽지 않나보다. 그곳에서 말을 타는 아이를 발견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말과 함께 놀고 있다. 정말 중세 도시처럼 살아가는 마을이다.
우쉬굴리의 중심지인 차자시에 도착. 마을 기슭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이제 스바네티 트레일은 끝났다.
우쉬굴리 마을을 산책하다가 영화 '데데Dede' 포스터를 보는 순간 어찌나 반가운지. '데데'는 1990년대 초 스바네티의 산을 배경으로 삶에서 행복을 찾으려 애쓰며 살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감독인 마리암 카치바니는 우쉬굴리에서 태어나 자랐고, 주연 배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출연 배우들은 연기 경험이 없는 지역 주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데는 여러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했다. 영화의 무대가 된 장소에서 그 영화를 보는 기분이란? 관람객은 나 홀로. 오로지 나만을 위한 극장이다. 1시간 30분 상영 시간 동안 혹독하게 눈이 내리는 우쉬굴리로 들어갔다. 얼마나 몰입해서 보았는지 장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쏙쏙 새겨졌다.
쉬카라빙하
조지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쉬카라Shkhara는 높이 5,193m. 아름다운 우쉬굴리 마을이 바로 쉬카라 기슭에 있다. 우쉬굴리까지 왔으니 쉬카라빙하를 만나러 가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마을부터 빙하까지는 왕복 18km. 코스는 어렵지 않지만 거리가 길다. 말이나 차를 타고 빙하를 약 3km 앞둔 카페 앞까지 이동한 뒤 1시간 정도 걸으면 거대한 빙하 바로 앞까지 갈 수 있다.
스바네티 트레킹을 완주한 다음날 새벽, 엔구리강을 따라서 쉬카라로 향한다. 살포시 면사포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숨었다 하는 쉬카라의 온전한 모습을 보고 싶어서 한순간도 눈길을 떼지 못한다. 야생화가 지천인 초원을 지나 숲길로 들어서니 완전 돌길이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빙하 앞에는 지난밤을 이곳에서 홀로 보낸 남자가 있다. 리투아니아에서 온 얀. 우쉬굴리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 매년 이곳에 와서 캠핑을 한단다. 이곳에 오면 모든 것이 비워지고 정리되어서 참으로 행복하다고 한다.
빙하 계곡으로 내려갔다. 양말을 벗고 차가운 빙하 물에 발을 담근다. 전기가 흐르듯 짜릿함이 온몸을 감싼다.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시원함에 4일 동안 걸었던 모든 피로가 다 사라진다.
우쉬굴리로 돌아가는 길에 12세기에 그려진 인상적인 벽화가 있는 라마리아 교회Lamaria Church를 방문했다. 지역 주민들은 조지아의 황금기를 이끈 타마라 여왕Queen Tamara이 바로 이 교회 아래에 묻혔다고 믿고 있다.
조지아 여행을 계획하면서 꼭 걷고 싶었던 스바네티 트레킹을 마치고 나니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온몸이 나른하다. 오늘은 더 달콤한 잠을 잘 거 같다. 스바네티 트레일을 걸으며 마주한 장엄한 자연과 소박한 삶이 어우러진 풍경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고 혼자 트레일을 걸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 방문 시기
트레킹 시즌은 6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6월에는 꽃이 만발한 푸른 풍경, 10월에는 화려한 가을 단풍을 감상할 수 있지만,
낮이 훨씬 짧고 추워진다. 또한, 10월 하순에는 첫눈이 내릴 수도 있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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